유송 효무제 유준(劉宋 孝武帝 劉駿, AD. 430~464년) : 유송 4대 황제(AD. 453~464년)
- 유송 효무제 (劉宋 孝武帝 劉駿)
- 부친 : 송 문제 유의륭(宋文帝 劉義隆)
- 모친 : 소황태후 노혜남(昭皇太后 路惠男)
- 출생일 : 430년 9월 19일
- 사망일 : 464년 7월 12일 (향년 33세)
- 묘소 : 경녕릉(景寧陵)
- 통치 기간 : 453년 5월 20일 ~ 464년 7월 12일 (11년 53일)
- 전임 황제 : 유소(劉劭)
- 후임 황제 : 송 전폐제(前廢帝, 유자업)
- 연호 :
- 孝建(효건) : 454년 ~ 456년 (3년)
- 大明(대명) : 457년 ~ 464년 (8년)
- 시호 : 효무황제(孝武皇帝)
- 묘호 : 세조(世祖)
【기원후 430년】
- 유준(劉駿)은 남조(南朝) 송문제(宋文帝) 원가(元嘉) 연간(430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그는 송문제 유의륭(劉義隆)의 셋째 아들이다.
- 그의 어머니는 노혜남(路惠男) 귀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빈첩은 아니었으며, 유준 역시 아버지인 문제로부터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했다.
【기원후 435년】
- 435년에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무릉왕(武陵王)에 봉해졌고, 식읍(食邑) 2천 호를 받았다.
【기원후 439년】
- 439년에는 10세의 나이로 조서(詔書)를 받아 상주(湘州)의 모든 군사들을 도독하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상주자사(湘州刺史)에 임명되었고, 석두(石頭)를 지키는 사무를 맡았다.
【기원후 440년】
- 440년에는 사지절(使持節) 직위와 함께 남예(南豫), 예(豫), 사(司), 옹(雍), 병(并) 5주의 모든 군사들을 도독하는 남예주자사(南豫州刺史)로 옮겼으며, 여전히 정로장군을 겸하며 석두성(石頭城)을 지켰다.
【기원후 444년】
- 444년에는 진주(秦州) 도독을 추가하고 무군장군(撫軍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원후 445년】
- 445년 16세의 나이로 조서를 받아 옹(雍), 양(梁), 남북진(南北秦) 4주와 형주(荊州)의 양양(襄陽), 경릉(竟陵), 남양(南陽), 순양(順陽), 신야(新野), 수(隨) 6개 군의 모든 군사들을 도독하는 영만교위(甯蠻校尉),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사지절은 그대로, 무군장군 또한 그대로 겸했다. 동진(東晉)이 강동(江東)에 안주한 이래, 유준은 남조에서 최초로 양양을 진수(鎭守)한 황실 자제가 되었다.
【기원후 448년】
- 448년에는 조서를 받아 남연(南兗), 서(徐), 연(兗), 청(青), 기(冀), 유(幽) 6주와 예주(豫州)의 양군(梁郡)의 모든 군사들을 도독하는 안북장군(安北將軍),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옮겼고, 사지절은 그대로 겸하며 팽성(彭城)을 진수했다. 얼마 후 송문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유준에게 연주자사를 추가로 임명했고, 둘째 아들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을 남연주자사로 삼았으므로, 유준(劉駿)의 남연주 도독 직위는 즉시 취소되었다.
【기원후 450년】
- 450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가 병력을 이끌고 남침하자, 송문제는 유준에게 조서를 내려 병력을 이끌고 여양(汝陽)에 주둔한 북위 영창왕(永昌王) 탁발인(拓跋仁)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 유준은 1천 5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양을 기습했고, 위군(魏軍)은 방비가 없었기에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후 송군에게 원군이 없다는 것을 탐지하고 반격하여 송군은 대패했고, 9백 명의 병사만이 살아남았다.
- 5월 19일, 유준은 여양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진군장군(鎮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기원후 451년】
- 3월 19일, 위군은 우이(盱眙)의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 4월 13일, 북위의 침략 방어에 공이 없었으므로, 송문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유준을 북중랑장(北中郎將)으로 강등했다.
【기원후 452년】
- 452년, 23세가 된 유준은 남연주 군사 도독을 추가로 받아 남연주자사로 산양(山陽)을 진수했다. 얼마 후 강주(江州), 형주(荊州)의 강하(江夏), 예주(豫州)의 서양(西陽), 진희(晉熙), 신채(新蔡) 4개 군의 모든 군사들을 도독하는 남중랑장(南中郎將),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옮겼고, 사지절은 그대로 겸했다. 당시 강구(江寇)가 횡행하여 송문제는 보병교위(步兵校尉) 심경지(沈慶之)를 파견하여 적을 토벌하게 했으며, 유준이 정벌 대군을 전적으로 통솔했다. 유준의 측근 안준(顏竣)은 일찍이 팽성(彭城)에서 승려를 가장하여 유준이 “진인(真人)”이 될 것이라는 부참(符讖) 소문을 퍼뜨렸고, 이는 수도까지 전해졌다. 송문제는 이를 빌미로 죄를 물으려 했으나, 태자 유소(劉劭)의 황제를 저주하는 무고(巫蠱)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유준과 안준에게는 잠시 죄를 묻지 않았다.
- 452년, 유소(劉劭)와 또 다른 형제인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은 아버지 송 문제(宋文帝)를 저주하여 죽게 하려 한 무당 사건에 연루되어 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이들은 유소가 더 빨리 황제가 되도록 무당에게 저주를 부탁했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송 문제는 이들을 폐위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원후 453년】
- 3월 16일 밤늦게, 유준(劉駿)의 큰형이자 황태자였던 유소(劉劭)는 밤중에 병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군주를 시해했고, 송문제(宋文帝)는 살해되었다.
- 유소는 황제에 즉위한 후 유준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승격시키고 산기상시(散騎常侍) 직위를 추가하여 회유하려 했으나, 몰래 보병교위(步兵校尉) 심경지(沈慶之)에게 유준을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심경지는 명령을 받은 후 유준을 만나려 했지만, 유준은 병을 핑계로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심경지는 결국 유준의 앞으로 가서 유소의 친필 편지를 건넸다. 유준은 눈물을 흘리며 심경지에게 어머니 노숙원(路淑媛)과 마지막 작별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심경지는 말했다. “하관(下官)은 선제(先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항상 덕을 갚고자 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따름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의심이 깊으십니까!” 유준은 이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절하며 “가국(家國)의 안위는 장군께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심경지가 안팎의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 4월 11일, 유준은 비상령을 선포하고 무리를 보여주며 유소에게 반대하는 거병(擧兵)을 일으켰다. 형주자사(荊州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과 옹주자사(雍州刺史) 장질(臧質)이 의거에 호응했다.
- 5월 1일, 유준은 건업(建康, 현재 난징시)으로 향하는 격문(檄文)을 보냈다.
- 5월 14일, 관군장군(冠軍將軍) 유원경(柳元景)은 유소와 신정(新亭)에서 대전(大戰)을 벌였고, 유소는 패하여 도망쳤다.
- 5월 17일, 유준의 병력은 강녕(江寧)으로 진격했다.
- 5월 18일,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이 투항하여 상표(上表)를 올려 유준에게 존호(尊號)를 바쳤다.
- 5월 19일, 유준은 신정(新亭)에 주둔하며 산기시랑(散騎侍郎) 서애(徐爰)에게 즉위 예의를 초안하게 했다.
- 5월 20일, 무릉왕 유준은 신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고, 이때 나이 24세였다.
- 5월 27일, 건강성(建康城)을 함락하고 역적 황제 유소와 둘째 형 유준을 참수했다.
【기원후 454년】
- 3월 17일, 남군왕(南郡王) 유의선, 강주자사(江州刺史) 장질, 예주자사(豫州刺史) 노상(魯爽), 연주자사(兗州刺史) 서유보(徐遺寶)가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신황(新皇)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은 보고를 받고 크게 두려워했다. 유준은 심지어 어가(乘輿)와 황제 법물(法物)을 유의선에게 바쳐 유의선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즉시 막아서며 “어찌 이 자리(황위)를 다른 사람에게 줍니까!”라고 말했다. 유준은 이에 멈췄다.
- 4월 19일, 안북사마(安北司馬) 하후조환(夏侯祖歡)은 서유보를 격파했다.
- 6월 1일, 진군장군(鎮軍將軍) 심경지는 역양(歷陽)의 소현(小峴)에서 노상을 대파하고 그를 참수했다.
- 6월 29일, 유의선과 장질은 군사를 이끌고 양산(梁山) 영채(營寨)를 공격했다. 예주자사 왕현모(王玄謨)는 유격장군(遊擊將軍) 원호지(垣護之), 경릉태수(竟陵太守) 설안도(薛安都)를 내보내 맞서 싸우게 하여 장질을 격파했다. 원호지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렀고, 유의선과 장질은 대패하여 도망쳤다.
- 7월 13일, 장질은 참살되었다.
- 7월 28일, 양주(揚州)와 형주(荊州)가 영토가 넓고 병력이 많아 자사(刺史)가 쉽게 이상한 뜻을 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유준은 조서를 내려 양주와 절동(浙東) 5개 군을 분할하여 “동양주(東揚州)”를 설치했다. 또한 형주, 상주(湘州), 강주(江州), 예주(豫州) 4개 주에서 8개 군을 분할하여 “영주(郢州)”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형주와 양주는 약화되었다. 그는 “남만교위(南蠻校尉)” 직책을 폐지하고 수비병을 건강(建康)으로 이동시켜 수도의 방비를 강화했다.
- 8월 4일, 유의선은 강릉(江陵) 옥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유준은 유의선(劉義宣)의 반란으로 인해 여러 왕후(王侯)들의 권세를 약화시키고자 했다. 이에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은 여러 왕후의 수레와 의복, 기용(器用), 악무제도(樂舞制度)를 감축하는 9개 조항을 상주했다. 유준은 이를 허락한 후, 다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24개 조항으로 확대하여 번왕(藩王)의 지위를 전면적으로 억제하고 위엄과 권한을 독점했다.
【기원후 455년】
- 8월 29일, 효무제의 16세 동생 무창왕(武昌王) 유혼(劉渾)이 스스로 초왕(楚王)이라 칭하고, 연호(年號)를 영광(永光)이라 임의로 정하여 예제(禮制)를 넘어서는 행동을 했으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사사했다. 이 사건은 이후 효무제가 자신의 형제들을 하나둘 숙청하는 흐름의 시발점이 된다.
- 종왕(宗王) 형제 중에서는 오직 일곱째 동생 유굉(劉宏)만이 친애받고 중용되어 455년에 재상이 되었다(458년에 사망). 효무제(孝武帝)는 동시에 강동(江東) 한문(寒門) 출신인 심경지(沈慶之)와 창황(傖荒) 북인(北人) 유원경(柳元景)을 중용했다. 두 사람의 공적에 따라 차례로 삼공(三公)으로 승진시켰고, 이는 오흥 심씨(吳興沈氏)와 하동 유씨(河東柳氏)가 남조(南朝)의 고문(高門)으로 올라서는 시작점이 되었으며, 남조에서 한문과 한인(寒人)이 군공(軍功)으로 삼공에 오르는 선례를 개창했다.
【기원후 458년】
- 458년(대명(大明) 2년), 안준(顏竣)을 외방으로 보내고 왕승달(王僧達)을 처형한 후, 유준은 대권을 독차지하고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문(高門) 출신인 채흥종(蔡興宗)과 원의(袁顗) 외에는 더 이상 종왕 형제와 고문 강족(強族)의 대신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오직 행신(倖臣)들에게 위임하여 귀와 눈 역할을 하게 하고 조정의 정치를 암암리에 좌우하게 했다. 이는 후대에 이른바 “한인장기요(寒人掌機要)”라는 정치 상황을 형성했다. 효무제의 집권 통치는 역사서에서 “주위독운(主威獨運), 관치백사(官置百司), 권불외가(權不外假)”라고 칭해졌다. 행신 중에서 대법흥(戴法興), 소상지(巢尚之), 대명보(戴明寶), 서애(徐爰) 네 사람이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나 크게 총애받았으며, 모든 일을 그들과 의논했다. 소상지와 서애는 특히 신중함을 알았으나, 대법흥과 대명보는 이를 빌미로 위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아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몸값이 천금에 달했다. 대명보는 특히 교만하고 방종하여 장자 대경(戴敬)이 황제의 어용품을 돈으로 사들이는 것을 방치했고, 심지어 유준이 순행할 때 말을 타고 어련(御輦) 옆에서 오가며 질주하기도 했으며, 전혀 꺼리는 바가 없었다. 유준은 크게 노하여 대경을 처형하고 대명보를 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 다시 석방하여 처음과 같이 중임을 맡겼다. 대법흥은 유자업(劉子業)이 황태자였을 때부터 이미 명을 받아 시종했고, 후에 유준의 유명(遺命)을 받아 유자업이 즉위하는 것(송전폐제(宋前廢帝))을 보좌했다. 이로 인해 송전폐제 시대에는 민간에서 “대법흥은 진짜 천자이고, 황제는 가짜 천자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권력은 막중했다.
【기원후 459년】
- 459년, 유준은 유사가 경릉왕 유탄의 불법 행위를 핵주(核奏)하도록 암시하여, 유탄을 후(侯)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원랑(垣閬)을 연주자사로 임명하여 부임지에 간다는 명목으로 유탄을 습격하게 했다. 일이 발각되어 실패했고, 원랑은 살해되었다.
- 6월 4일, 유탄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광릉성(廣陵城)을 점령했다. 유준은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심경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 9월 22일, 광릉성이 함락되었고, 유탄은 참수되었으며, 성안의 삼천 남자들은 모두 살해되고 여자들은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어졌다.
【기원후 461년】
- 461년, 효무제의 충동적인 동생 해릉왕(海陵王) 유휴무(劉休茂)는 영주(永州)의 태수로 있었는데, 그의 통신 장교 양경(楊慶)과 대쌍(戴雙), 그리고 군사 장교 우심지(庾深之)가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는 곧 유휴무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효무제가 모든 형제들에 대해 점점 더 의심스러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그의 숙부 유의공(劉義恭, 현 재상)은 제왕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 변경 지역의 태수가 되는 것, 그리고 그들의 가족 구성원 외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심회문(沈懷文)의 권유로 유의공의 제안은 시행되지 않았다.
【기원후 462년】
- 462년, 효무제의 가장 총애하던 후궁인 은비(殷妃)가 사망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은비가 사실 유의선(劉義宣)의 딸로, 효무제가 유의선 사망 후 공식적으로 후궁으로 삼았지만 관료 은엄(殷琰)의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하며 근친상간 관계를 은폐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부는 은비가 실제로 은엄의 집안 출신으로, 유의선에게 주어졌다가 유의선 사망 후 효무제가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고 믿는다.) 그는 은비를 너무 애도한 나머지 국사를 처리할 수 없었고, 그녀를 위해 웅장한 무덤과 사당을 지었으며, 많은 평민들을 이러한 프로젝트에 강제 노동시켰다.
【기원후 463년】
- 대명(大明) 7년(463년) 말부터 8년(464년)까지 절강(浙江) 등지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심각한 대기근이 발생했다. 절강 지역의 10분의 6에 해당하는 인구가 굶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송나라 시대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은 이를 들어 유준을 비판하며, 그가 말년에 술과 사치를 좋아하여 원래 강성했던 유송이 그가 재임하던 말기에 쇠락했다고 말했다.
【황음무도(荒淫無道)】
- 유준(劉駿)은 매우 호색하여 궁 밖으로 나가 친소(親疏),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미녀들을 총애하는 것을 즐겼다.
- 북송(北宋) 사학자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규문(閨門)에서 무례하여 친소와 존비를 가리지 않아, 소문이 민간에까지 흘러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 《자치통감ㆍ권128ㆍ송기10》
【난륜(亂倫) 소문】
- 454년, 유준은 남군왕(南郡王) 유의선(劉義宣, 육촌 숙부)의 몇몇 딸들을 총애했다. 이에 유의선은 유준을 증오하게 되었고, 이어서 강주자사(江州刺史) 장질(臧質)의 권유를 받아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실패했고, 유의선은 주살되었다. 유준은 아마도 사촌 여동생 중 한 명을 몰래 맞아들였을 것이다(유준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은숙의(殷淑儀)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여덟째 아들 유자란(劉子鸞) 등 5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은숙의가 유씨(劉氏) 여인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 사서에 따르면 유준은 어머니 노태후(路太后)와 난륜(亂倫)의 혐의가 있었다. 남조(南朝) 사람 심약(沈約)이 저술한 《송서(宋書)》의 기록은 비교적 완곡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이 규방 안에서 공경함이 매우 적었고, 총애하는 이가 있어 혹은 태후의 방 안에 머물렀으므로 민간에서는 시끄럽게 추문이 돌았다. 궁정의 일은 비밀이 많아 분별하기 어렵다.” - 《송서ㆍ열전1ㆍ후비전》 - 《송서》는 유준이 노태후가 거처하는 현양전(顯陽殿)에서 궁녀들을 자주 총애했는데,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민간에 그 사이에 말 못 할 추문이 돌았다고 지적했다. 《송서》의 저자 심약은 이를 부인하지 않고, “궁정의 일은 비밀이 많아 분별하기 어렵다”라며 모호하게 표현했다.
- 그러나 북조(北朝) 사람 위수(魏收)가 저술한 《위서(魏書)》는 거리낌 없이 유준이 어머니와 난륜 관계를 가졌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유준은 음란하고 무도하여 그의 어머니 노씨(路氏)와 사통했고, 그 추문이 구월(甌越)에 널리 퍼졌다.” - 《위서ㆍ열전85ㆍ도이유유전》 - 위수는 또한 유준이 천성적으로 호색하고 음란함이 지나쳤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들인 송전폐제(宋前廢帝) 유자업(劉子業)은 즉위 후 유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대단히 호색하여 존비(尊卑)를 가리지 않았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당나라 시대 역사가 유지기(劉知幾)는 그의 저서 《사통(史通)》에서 다음과 같이 변론했다.
“심씨(沈氏)가 책을 저술할 때 옛 왕조를 중상모략하기를 좋아하여, 진(晉)에 대해서는 고의로 기이한 말을 만들고 송(宋)에 대해서는 비방하는 말이 많았다. 이전 역사에 기록된 것도 그 오류를 이미 비웃었는데, 위수(魏收)는 북조에 아부하고 남국(南國)을 특히 괴롭히면서, 그의 허황된 주장을 이어받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사마예(司馬睿)가 우금(牛金)의 후예라고 하고, 유준이 노씨와 사통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학정을 돕고 남의 재앙을 기뻐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원후 464년】
- 464년 7월 12일, 유준은 옥촉전(玉燭殿)에서 병사했다.
- 향년 35세였고,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황태자 유자업이 즉위하여 송전폐제가 되었다.
- 8월 27일, 단양군(丹陽郡) 몰릉현(秣陵縣) 암산(岩山, 현재 난징시 장닝구 몰릉진)에 위치한 경녕릉(景寧陵)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 묘호는 “세조(世祖)”였다.
-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은 그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효무제 통치 말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말년에 [효무제]는 특히 탐욕스러웠다. 주나 군의 태수가 임지를 떠나 수도로 돌아올 때마다, 황제는 그들에게 충분한 양의 조공을 바치도록 명령했고, 또한 그들의 재산을 모두 따낼 때까지 그들과 끊임없이 도박을 했다. 그는 매일 술에 취해 있었고 거의 정신이 맑은 적이 없었지만, 그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종종 책상에서 술에 취해 잠들곤 했지만, 관리들로부터 긴급 제출물이 있으면 빠르게 깨어나 취한 기색 없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관리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고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다.”
【가족 관계】
- 조부모
- 조부 : 유유(劉裕) — 고조 무황제(高祖 武皇帝)
- 조모 : 호도안(胡道安) — 장황태후(章皇太后)
- 부모
- 부 : 유의륭(劉義隆) — 태조 문황제(太祖 文皇帝)
- 모 : 노혜남(路惠男) — 소황태후(昭皇太后)
- 형제 (총 19명, 유준은 셋째)
- 유소(劉劭) 원흉(元兇) : 부친 유의륭 시해 후 즉위 → 유준에 의해 처형
- 유준(劉濬) 시흥왕(始興王) : 유소와 함께 처형됨
- 유준(劉駿) 효무제(孝武帝) : 본인
- 유삭(劉鑠) 남평목왕(南平穆王)
- 유소(劉紹) 여릉소왕(廬陵昭王)
- 유단(劉誕) 정령왕(竟陵王) : 반란으로 효무제에 의해 숙청됨
- 유굉(劉宏) 건평선간왕(建平宣簡王)
- 유의(劉祎) 동해왕(東海王)
- 유창(劉昶) 의양왕(義陽王)
- 유혼(劉渾) 무창왕(武昌王) : 장난삼아 즉위문 작성 → 자살 강요
- 유유(劉彧) 명제(明帝) : 유준 사후 즉위, 형제 다수 숙청
- 유휴인(劉休仁) 건안왕(建安王)
- 유휴우(劉休祐) 산양왕(山陽王)
- 유휴무(劉休茂) 해릉왕(海陵王)
- 유휴업(劉休業) 파양애왕(鄱陽哀王)
- 유휴첩(劉休倩) 임경충왕(臨慶沖王)
- 유이부(劉夷父) 신야회왕(新野懷王)
- 유휴범(劉休範) 계양왕(桂陽王)
- 유휴약(劉休若) 파릉애왕(巴陵哀王)
- 자매 (공주 11명 이상, 기록된 이름 4명)
- 유영아(劉英娥) 동양헌공주(東陽獻公主)
- 유영원(劉英媛) 임천장공주(臨川長公主)
- 유영미(劉英媚) 신채공주(新蔡公主)
- 유수명(劉修明) 강락공주(康樂公主)
- 해염공주(海鹽公主)
- 장성공주(長城公主)
- 회양장공주(淮陽長公主)
- 남양공주(南陽公主)
- 낭야정장공주(琅邪貞長公主)
- 남군헌공주(南郡獻公主)
- 심양공주(尋陽公主)
- 여강공주(廬江公主)
- 황후
- 왕헌원(王憲嫄) — 문목황후(文穆皇后)
- 妾妃 (기록된 후궁 13명)
- 은숙의(殷淑儀) : 선귀비(宣貴妃)
- 진숙원(陳淑媛) : 황태후(유자업의 생모)
- 하숙의(何淑儀)
- 사소화(史昭華)
- 사소의(史昭儀)
- 서소용(徐昭容)
- 사소용(謝昭容)
- 하첩여(何婕妤)
- 강첩여(江婕妤)
- 양첩여(楊婕妤)
- 완용화(阮容華)
- 두용화(杜容華)
- 강미인(江美人)
- 아들들 (27명 이상, 대부분 요절 혹은 살해됨)
- 유자업(劉子業) 전폐제(前廢帝) : 피살(폭군)
- 유자상(劉子尚) 예장왕(豫章王) : 명제에 의해 피살
- 유자훈(劉子勛) 진안왕(晉安王) : 피살
- 유자수(劉子綏) 안륙왕(安陸王) : 피살
- 유자심(劉子深) : 요절
- 유자방(劉子房) 심양왕(尋陽王) : 피살
- 유자욱(劉子頊) 임해왕(臨海王) : 피살
- 유자란(劉子鸞) 시평효경왕(始平孝敬王) : 전폐제에게 피살
- 유자인(劉子仁) 영가왕(永嘉王) : 피살
- 유자봉(劉子鳳) : 요절
- 유자진(劉子真) 시안왕(始安王) : 피살
- 유자현(劉子玄) : 요절
- 유자원(劉子元) 소릉왕(邵陵王) : 피살
- 유자우(劉子羽) 제경왕(齊敬王) : 피살
- 유자형(劉子衡) : 요절
- 유자맹(劉子孟) 회남왕(淮南王) : 피살
- 유자황(劉子況) : 요절
- 유자산(劉子產) 남평왕(南平王) : 피살
- 유자운(劉子雲) 진릉효왕(晉陵孝王) : 요절
- 유자문(劉子文) : 요절
- 유자여(劉子輿) 여릉왕(廬陵王) : 피살
- 유자사(劉子師) 남해애왕(南海哀王) : 전폐제에게 피살
- 유자소(劉子霄) 회양사왕(淮陽思王) : 피살
- 유자옹(劉子雍) : 요절
- 유자추(劉子趨) : 사망(명확한 기록 없음, 피살 추정)
- 유자기(劉子期) : 명제(劉彧)에게 피살
- 유자사(劉子嗣) 동평왕(東平王) : 명제에게 피살
- 유자열(劉子悅) : 명제에게 피살
- 양자 (1명)
- 유찬(劉贊) 무릉왕(武陵王) : 유준 사후, 유자업(劉子業) 폐위 후 옹립된 적 있음 (즉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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