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일 수요일

진 효무제 사마요(晉 孝武帝 司馬曜, AD. 362~ 396년) : 동진 9대 황제(AD. 372~396년)

진 효무제 사마요(晉 孝武帝 司馬曜, AD. 362~ 396) : 동진 9대 황제(AD. 372~396)

 
  • 효무제(孝武帝)
  • 출생 : 362
  • 사망 : 396116(향년 33세 또는 34)
  • 능묘 : 융평릉(隆平陵)
  • 통치 기간 : 372912~ 396116(2455)
    • 전임 황제 : 진 간문제 사마욱(司馬昱)
    • 후임 황제 : 진 안제 사마덕종(司馬德宗)
  • 연호(年號) :
    • 녕강(宁康) : 373~ 375
    • 태원(太元) : 376~ 396
  • 시호(谥号) : 효무황제(孝武皇帝)
  • 묘호(庙号) : 열종(烈宗)
 

기원후 362

  • 간문제(사마욱)와 이릉용의 육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창명(昌明)이다.
  • 그 당시 그의 아버지 사마욱(司馬昱)는 회계왕(會稽王)이며 조카 손인 애제(哀帝)의 재상(총리)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사마요의 어머니 이릉용(李陵容)은 원래 직물 생산에 종사하던 하인이었는데, 어느 도사가 그 여자가 왕자를 낳을 운명이다라고 예언한 말을 들은 사마욱는 그녀를 첩으로 삼았고, 실제로 그녀가 사마요를 낳게 되었다. 그가 새벽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라 하고, ()창명(昌明)’이라 지었는데, 둘 다 새벽혹은 밝음을 뜻한다.
 

기원후 365

  • 365, 겨우 세 살이던 그에게 당시 황제였던 폐제(廢帝)는 사마욱에게 더 높은 작위인 낭야왕(琅邪王) 작위를 제안하면서, 사마요에게는 회계왕(會稽王) 작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사마욱는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이 작위들을 정중히 사양했고, 폐제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기원후 371

  •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환온(桓溫)은 폐제가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으며, 아들들도 그의 친자가 아니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를 폐위시키고, 사마욱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는 바로 간문제(簡文帝)가 되었으나, 실제 권력은 여전히 환온이 쥐고 있었다.
 

기원후 372

  • 372, 간문제가 병이 들자 그는 912일에 사마요를 황태자로 삼았고, 유언으로는 환온에게 황위를 넘겨도 좋다고 남겼다. 그러나 신하 왕탄지(王坦之)가 이에 반대하자, 간문제는 그를 설득하여 유언을 수정했고, 환온을 실제로는 제갈량이나 왕도 같은 대신으로만 비유하도록 내용을 고쳤다. 그럼에도 간문제가 사망했을 때, 많은 신하들은 환온을 두려워해 사마요를 즉위시키는 데 주저했다. 결국 왕표지(王彪之)의 주도로 사마요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그가 바로 효무제(孝武帝)이다.
  • 새 황제 사마요(효무제)는 즉위 당시 겨우 10세였기 때문에, 그의 사촌인 저태후(儲太后)-즉 강제(康帝)의 황후이며 사상(謝尚)의 조카-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정무는 사안(謝安)과 왕탄지(王坦之)가 주도했다. 당대의 실권자였던 환온(桓溫)은 함정에 빠질 것을 우려해 섭정 제안을 거절했다.
 

기원후 373

  • 373, 환온이 사망하자, 그가 정권을 찬탈할 것이라는 우려는 사라졌다.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환충(桓沖)은 진() 왕조의 유지를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당시 진 왕조가 직면한 가장 큰 외부 문제는 북쪽의 강력한 라이벌인 전진(前秦)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박이었다. 373, 전진은 진나라의 양주(梁州, 현재의 산시 남부)와 익주(益州, 현재의 쓰촨 및 충칭 지역)를 공격해 점령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사안과 환숭의 통치 아래 국정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기원후 375

  • 375101, 효무제는 왕온(王蘊)의 딸인 왕법혜(王法慧)를 황후로 맞이했다. 당시 효무제는 13, 왕법혜는 15세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국 고전을 공부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기원후 376

  • 376, 저태후는 공식적으로 섭정직에서 물러났으며, 정권을 효무제에게 반환했다. 하지만 실제 정무는 여전히 사안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 같은 해인 376, 진나라의 속국(봉신국)이었던 전량(前涼)이 전진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진은 환충이 지휘하는 군대를 보내 전진의 압박을 완화하려 했지만, 전량은 빠르게 함락되었고 환충의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의 대규모 침공을 우려한 진 정부는, 회수(淮河) 이북의 백성들 대부분을 회수 이남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기원후 378

  • 378, 전진은 진나라의 중요 도시들인 양양(襄陽), 위흥(魏興, 현재 장쑤 쑤첸 동남쪽), 팽성(彭城)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진나라의 명장 사현(謝玄)은 팽성이 함락되자마자 재탈환에 성공했지만, 양양과 위흥은 결국 전진에 넘어가고 말았다(379).
 

기원후 380

  • 3801024, 왕황후(王法慧)가 사망했다. 효무제는 그 이후로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기원후 381

  • 381, 효무제는 불교 경전(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궁궐 안에 불교 강당을 세우고 승려들을 초빙해 거주하게 했다.
 

기원후 383

  • 383, 환충은 전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상양과 서남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초반에 잇따른 패배를 당하자,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 비수 전투는 38311월에 벌어졌다.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은 진()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당시 동진의 군사는 겨우 8만이었다. 하지만 비수 전투에서, 전진군은 진군(晉軍)을 유인하기 위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 결과 대패를 당했다. 진군은 비수(肥水)에서 부견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추격하여 서주, 연주, 청주, 사주, 예주, 양주를 수복했다. 사실 부견이 워낙 황급하게 도주했기 때문에 계속 추격했더라면 중원 수복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비수대전).
  • 이 전투에서 전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황제의 형이자 재상이었던 부용(苻融) 역시 전사했다. 이 참패 이후 전진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다시는 진나라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 비수 전투 이후, 진나라의 장수 사현(謝玄)은 영토 수복을 위한 반격 작전을 주도했고, 황하 이남의 전진 영토 대부분을 탈환했으며, 과거 잃었던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도 다시 진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 그러나 이 승리의 공로자로 가장 높이 평가받았던 재상 사안(謝安)은 점차 효무제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안의 사위인 왕국보(王國寶)는 사안이 자신에게 중요한 직책을 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효무제와 그의 동생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아첨하며 사안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기원후 385

  • 사안은 계속해서 재상직을 유지했지만, 385년 사망했고, 이후 그의 후임으로 사마도자가 재상에 임명되었다.
  • 이 무렵부터 효무제와 사마도자 형제는 잔치와 술에 빠져 정사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국가 운영은 점차 해이해졌다.
 

기원후 387

  • 387, 효무제는 당시 다섯 살이던 장남 사마덕종(司馬德宗)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사마덕종은 중증의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말을 못 하고,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하며, 배가 고픈지 배가 부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묘사되었다.
 

기원후 390

  • 390, 효무제는 동생 사마도자가 자신의 총애를 당연하게 여기며 남용하는 모습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균형 세력을 찾기로 했다. 그는 주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황후의 오빠인 왕공(王恭)과 은중감(殷仲堪)을 주요 지방 군벌로 임명했다. 이들은 재능은 있었지만 기질이 좁고 편협한 인물로 평가받았기에, 훗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었다.
 

기원후 395

  • 395년경, 효무제(사마요)와 그의 동생 사마도자(회계왕) 사이의 갈등이 공공연한 충돌로 번졌다. 그러나 이릉용 황태후(李太后)의 중재 덕분에 효무제는 동생을 해임하지 않았다. 이후 서묘(徐邈)가 다시 중재에 나서면서, 두 형제의 관계는 회복된 듯 보였다.
 

기원후 396

396년이 되자, 효무제는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미모가 뛰어난 장귀인(張貴人)이었다.
3969, 청서전(清暑殿)에서 후궁들과 주연을 베푼 뒤 총애하던 장귀인과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장귀인에게 넌 이제 30세가 넘었으니 이제 널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술김에 한 농담이었는데 장귀인이 이걸 진담으로 알아들어 버렸고 결국 그날 밤 장귀인은 자고 있던 효무제를 죽였다. 재위 25년 향년 35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죽었다.
북송 시대에 편찬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에 따르면, 진 효무제가 장귀인에게 폐출하겠다고 농담한 그날 밤, 장귀인은 황제가 소서전(消暑殿)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을 때를 틈타 먼저 환관들을 술로 매수해 내보낸 후, 시녀들에게 지시해 이불로 황제의 얼굴을 덮어 진 효무제를 질식시켜 살해했다. 사건 이후 장귀인은 주변 시종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며 황제가 악몽()에 시달리다 갑자기 사망했다고 하였다
이때 효무제의 태자 사마덕종은 추움과 더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저능아였고, 사마도자는 장귀인과 간통하던 관계라서 이를 숨기고 추궁하지 않았다. 그해 10월에 융평릉(隆平陵)에 안장되었다.
일찍 죽은 데다가 뒤를 이은 이은 황제들이 무능하여 나라가 결국 망국으로 치닫았다는 등 후한의 영제, 남송의 남송 도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도 어리석은 데다가 사치에만 매달린 영제나 도종과 달리 달리 효무제는 처음에는 유능했지만, 말년에 방탕에 빠져 어이없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효무제 가족

  • 황후
    • 효무정황후 왕씨(孝武定皇后 太原王氏)
      • 본명: 왕법혜(王法慧)
      • 생몰년: 360년 ~ 380
  • 황태후
    • 안덕황태후 진씨(安德皇太后 陳氏)
      • 본명: 진귀녀(陳歸女)
      • 생몰년: 362~ 390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이름 미상 (효무제를 살해한 것으로 전해짐)
  • 자녀
    • 장남 : 사마덕종(司馬德宗) 안제(安皇帝)
      • 생몰년: 382~ 419
    • 차남 : 사마덕문(司馬德文) 공제(恭皇帝)
      • 생몰년: 386~ 421
  • 기타 자녀 (이름 미상, 어머니 미상)
    • 진릉공주(晉陵公主)
      • 사망: 432
      • 혼인:
        • 사군(陳郡) 출신 사혼(謝混) 왕재공(王才公), 사망: 412
        • 양야(琊瑯) 출신 왕련(王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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