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2일 월요일

원술(袁術, AD. 155~199년)

원술(袁術, AD. 155~199)

 
  • 이름 : 원술 (袁術)
  • () : 공로 (公路)
  • 출생 : 155, 하남성 상수현(河南省 商水縣)
  • 사망 : 199, 현재 안후이성(安徽省) 일대
  • 직책 및 작위:
    후장군(後將軍, 189~190)
    남양태수(南陽太守, 189~192)
    양주목(揚州牧, 192~197, 자칭)
    좌장군(左將軍, 192~197)
    중가황제(仲家皇帝, 재위 : 197~199)
 

기원후 155년경출생 및 명문가 배경

  • 탄생 : 서기 155(정확한 출생연도는 출처 미상이다)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출신으로, 명망 높은 원씨(袁氏) 가문에서 태어나다. ()는 공로(公路)이다.
  •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위세 : 원술(袁術)의 가문은 동한(東漢) 시대 유학을 연구하며 4대에 걸쳐 삼공(三公, 태위, 사도, 사공)의 최고 요직을 다섯 명이 역임하여 '사세삼공(四世三公)' 또는 '사세오공(四世五公)'이라 불렸다. 고조부 원안(袁安)은 사공(司空사도(司徒), 숙증조부 원창(袁敞)은 사공(司空), 조부 원탕(袁湯)은 사공(司空사도(司徒태위(太尉), 친아버지 원봉(袁逢)은 사공(司空), 숙부 원외(袁隗)는 사도(司徒태부(太傅)를 지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은 원술(袁術)에게 막대한 사회적 지위와 인맥을 제공하여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그의 문하생과 옛 부하들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어, 언제든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 혈연 관계 : 조부 원탕(袁湯)의 셋째 아들인 원봉(袁逢)의 적차자(嫡次子)이다. 원소(袁紹)는 원술(袁術)의 친형인 원봉(袁逢)의 서자였으나, 둘째 백부 원성(袁成)의 계자(繼子)가 되었으므로 사서(史書)에서는 보통 원소(袁紹)를 원술(袁術)의 당형(堂兄)이라 칭하지만, 실제로는 이복형제이다. 이 복잡한 가족 관계는 훗날 두 형제 간의 경쟁과 갈등의 한 원인이 된다.
 

동탁 집권 이전까지

  • 초기 관직과 성격 : 후한서(後漢書)원술전(袁術傳)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협기(俠氣)가 강해 여러 귀공자들과 매사냥, 개 사냥 등 유흥을 즐겼으나 후에 점차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된 후, 낭중(郎中)을 거쳐 하남윤(河南尹),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등 중앙의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진입한다.
 

기원후 189년까지하진(何進) 피살 이후 동탁(董卓) 집권 초기

  • 환관 세력 제거 시도 : 대장군 하진(何進)이 환관 세력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살해되자, 원술(袁術)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으로서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洛陽) 남궁(南宮)을 포위했다. 그는 가덕전(嘉德殿)의 청쇄문(青鎖門)에 불을 질러 환관 단규(段珪)를 궁 밖으로 몰아내려 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정변은 더욱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 남양(南陽)으로 도피 : 동탁(董卓)이 하진(何進)의 요청을 빌미로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조정을 장악했다. 동탁(董卓)은 천자를 폐립(廢立)하려 했고, 원술(袁術)을 후장군(後將軍)에 임명하며 자신에게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원술(袁術)은 동탁(董卓)의 의도를 파악하고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남양(南陽)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 도피는 그에게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할 기회가 되었다.
  • 남양(南陽) 기반 다지기 : 남양(南陽)에 웅거하면서 손견(孫堅)이 남양 태수 장자(張咨)를 살해한 후 그의 군사를 이끌고 원술(袁術)에게 의탁하는 등 휘하 세력을 늘려갔다. 유표(劉表)의 천거로 남양 태수(南陽太守)에 오르기도 했다. 남양(南陽)은 호구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비옥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으나, 원술(袁術)은 법도를 제대로 확립하지 않고 약탈로 재물을 축적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는 그의 지도자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기원후 190초평 원년

  • 반동탁 연합 참가 : 동탁(董卓)이 한() 소제 유변(少帝劉辯)을 폐하고 한 헌제 유협(漢獻帝劉協)을 옹립하자, 이에 반발하여 원소(袁紹)가 주도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
  • 원소(袁紹)와의 대립 시작 : 원소(袁紹)가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려 하자, 원술(袁術)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이를 반대하며 형제간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 영토 분쟁과 인신공격 : 손견(孫堅)이 동탁(董卓)을 공격하러 출정한 사이, 원소(袁紹)는 주흔(周昕)을 파견하여 손견(孫堅)의 예주(豫州) 본거지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원술(袁術)은 군사를 이끌고 주흔(周昕)을 격퇴하며 맞섰다. 원소(袁紹)에게 의지하는 다른 호걸들을 비난하며, 원소(袁紹)가노(家奴, 비천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의 이복형)”라 칭하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심지어 공손찬(公孫)에게는 원소(袁紹)가 원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라는 서신까지 보내는 등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 공손찬(公孫)과의 동맹 강화 : 헌제(獻帝)의 밀명을 받은 유우(劉虞)의 아들 유화(劉和)를 억류하여 유우(劉虞)에게서 수천 기병을 갈취했다. 이 과정에서 유우(劉虞)와 원소(袁紹) 사이가 틀어지고, 공손찬(公孫)은 자신의 종제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원술(袁術)을 지원하게 함으로써 원술(袁術)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했다. 공손월(公孫越)이 원소(袁紹)와의 예주(豫州) 쟁탈전에서 전사하자, 공손찬(公孫) 또한 원소(袁紹)와 원한을 맺어 수년간 전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후 190~195

  • 광범위한 동맹 체결 :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에 대항하기 위해 공손찬(公孫), 평원상(平原相) 유비(劉備), 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 등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 손견(孫堅) 전사 : 유표(劉表)를 공격하러 파견했던 핵심 장수 손견(孫堅)이 불행히도 전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다. 이는 원술(袁術)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강동(江東) 지역에 대한 그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했다.
  • 광정(匡亭) 대전 참패 : 조정이 임명한 연주자사(兗州刺史) 김상(金尚)과 협력하여 연주(兗州)를 공격했다. 흑산적(黑山賊)의 잔당과 흉노(匈奴) 어부라(於扶羅)의 지원까지 받아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의 연합군과 광정(匡亭)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원술(袁術)이 크게 패배했다.
 

기원후 195년 전후

  • 양주(揚州) 침탈 : 광정(匡亭) 대전에서 패배한 후 옹구(雍丘)로 퇴각했으며, 남은 병력을 이끌고 구강군(九江郡)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조정이 임명한 양주자사(揚州刺史) 진온(陳溫)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를 장악했다. (다른 설에 따르면 진온(陳溫)은 이미 사망했고, 원술(袁術)이 수춘(壽春)을 취하려 했으나 진우(陳瑀)의 거부로 음릉(陰陵)으로 퇴수(退守)했다. 이후 진우(陳瑀)를 속여 부절(符節)을 빼앗고 수춘(壽春)을 점령했다.)
  • 마일제(馬日磾) 이용 : 이각(李傕)이 장안(長安)을 장악한 후 원술(袁術)과 동맹을 맺고 그를 좌장군(左將軍), 가절(假節)의 직위에 봉했다. 원술(袁術)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일제(馬日磾)의 부절(符節)을 빼앗고 자신의 휘하 장수들을 징용하도록 강요하며 자신의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 유요(劉繇)와의 우호 관계 : 조정이 임명한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요(劉繇)를 회유하기 위해 오경(吳景)과 손분(孫賁)을 보내 유요(劉繇)를 강남(江東)의 곡아(曲阿)로 맞이하게 했다. 스스로는 더 이상 양주자사(揚州刺史)를 칭하지 않으며 그의 지위를 인정, 일시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기원후 195흥평 말년

  • 조조(曹操) 추격 실패 :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조조(曹操)를 맹렬히 추격했다. 조조(曹操)가 진백남(秦伯)에게로 도피하자, 진백남(秦伯)은 스스로 조조(曹操)라고 거짓말하며 원술(袁術)의 추격병들을 속였고, 결국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조조(曹操)를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
 

기원후 196건안 원년 : 유비(劉備)와의 충돌

  • 무평(武平) 전투 : 조조(曹操) 군대가 무평(武平)에 진군하자, 원술(袁術)이 임명했던 진상(陳相) 원사(袁嗣)가 조조(曹操)에게 항복하며 원술(袁術)의 전방 거점 중 하나가 상실되었다.
  • 유비(劉備) 공격 : 여름 6, 원술(袁術)은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에서 병력을 이끌고 같은 서주(徐州)에 있던 유비(劉備)를 공격했다. 이때 유비(劉備) 휘하의 조표(曹豹)가 반란을 일으켜 여포(呂布)를 선동하여 유비(劉備)의 본거지인 하비(下邳)를 빼앗게 했다. 원술(袁術)은 이 틈을 타 유비(劉備)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 여포(呂布) 부추김 : 오경(吳景)을 광릉 태수(廣陵太守)로 천거하고, 여포(呂布)의 휘하 장수 학맹(郝萌)의 반란을 부추겼으나 실패로 끝나다.
  • 여포(呂布)의 개입 : 여포(呂布)는 패배한 유비(劉備)에게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한 후, 원술(袁術)이 다시 유비(劉備)를 공격하려 하자 이른바 '원문사극(轅門射戟)'으로 원술(袁術)의 장수 기령(紀靈)을 위압하여 원술군(袁術軍)을 퇴각시켰다. 여포(呂布)는 원술(袁術)과 유비(劉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는 원술(袁術)의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원후 197건안 2: 황제 참칭(僭稱)과 몰락의 시작

  • 황제 즉위 :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 ()나라를 대신할 자는 당도고(當塗高)이다라는 참위(讖緯) 예언이 자신의 자()인 공로(公路)와 일치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손견(孫堅)이 얻었던 전국옥새(傳國璽)까지 갖춘 것을 황제 즉위의 근거로 삼았다. 마침내 수춘(壽春)에서 황제(皇帝)를 칭하고 국호(國號)를 중가(仲家)로 정했으며,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직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황조를 세우려 했다. (조조(曹操)는 훗날 그가 두려워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 사방의 적 : 그러나 그의 황제 참칭은 모든 제후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고, 그는 순식간에 중원(中原)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손책(孫策)은 원술(袁術)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여 강동(江東)을 평정했고, 오경(吳景), 손분(孫賁) 등 핵심 인물들까지 손책(孫策)에게 이탈하여 원술(袁術)은 광릉(廣陵), 강동(江東) 등 막대한 영토와 세력을 상실했다. 여포(呂布)는 원술(袁術)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사자를 살해하는 등 관계가 파탄 났으며, 원술군(袁術軍)의 공격마저 격퇴했다. 또한 한실(漢室)의 제후와 국상을 암살하고 그 땅을 병합한 일로 조조(曹操)의 대대적인 토벌을 받아 회남(淮南)으로 퇴각하는 등 사면초가에 빠졌다.
  • 대기근 속의 사치 : 강회(江淮) 지역에 대규모 기근이 닥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극까지 벌어지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때 패상(沛相) 서소(舒邵)가 군량미 10만 곡()을 백성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자, 원술(袁術)은 서소(舒邵)를 죽이려 했다. 서소(舒邵)저 한 명의 목숨을 희생하여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호소했고, 원술(袁術)은 서소(舒邵)를 칭찬하기는 했으나, 정작 자신은 계속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후궁들에게 진미(珍味)를 제공하고 병사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외면했다. 이는 백성들과 병사들의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기원후 198건안 3

  • 여포(呂布) 구원 거부 : 조조(曹操)에게 공격받던 여포(呂布)가 허사(許汜)와 왕해(王楷)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원술(袁術)은 자신의 아들이 여포(呂布)의 딸과 혼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앙심 때문에 구원을 거부했으나, 결국 이들의 설득으로 뒤늦게 군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여포(呂布)는 이미 조조(曹操)에게 멸망한 후였다.
 

기원후 199건안 4: 최후

  • 절대적 고립 : 연이은 패전과 영토 내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그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심지어 잠산(潛山)에 주둔하던 부하 뇌박(雷薄)과 진란(陳蘭)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그들마저 원술(袁術)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고 거부했다.
  • 황제 칭호 양도 시도 : 자신의 상황이 회복 불가능함을 깨닫고, 자신이 칭했던 황제(皇帝)의 칭호를 4개 주를 가진 강력한 형 원소(袁紹)에게 넘겨주려 했다. 그는 또한 원소(袁紹)의 장자이자 당시 청주자사(青州刺史)인 원담(袁譚)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다.
  • 최후의 도피 실패 : 그러나 조조(曹操)가 파견한 유비(劉備), 주령(朱靈), 노소(路招) 등의 군대가 길을 막았으므로, 원담(袁譚)에게 합류하지 못하고 수춘(壽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비참한 죽음 : 수춘(壽春)으로 돌아왔을 때, 부엌에는 겨우 보리 가루 30()만이 남아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꿀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꿀조차 구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처했다. 그는 침상에 앉아 오랫동안 한탄하다가, “나 원술(袁術)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라고 크게 울부짖고는 울분 속에 피를 토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 전국옥새(傳國璽)의 행방 : 원술(袁術)이 죽은 후, 그에게 억류되었던 명사 서구(徐璆)는 원술(袁術)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무용지물이 된 전국옥새(傳國璽)를 가지고 한()나라 조정에 반환했다.
 

가족 관계

 
  • 조부모 세대
    • 원안(袁安) 고조부
    • 원창(袁敞) 숙증조
    • 원탕(袁湯) 조부
  • 아버지 세대
    • 원평(袁平) 원탕의 장자, 대백부
    • 원성(袁成) 원탕의 차자, 이백부
    • 원유(袁隗) 원탕의 4, 사숙부
    • 원봉(袁逢) 원탕의 3, 아버지
  • 형제
    • 원기(袁基) 적형
    • 원소(袁紹) 서형 (종법상 당형)
    • 원의(袁遺) 당형
    • 원윤(袁胤) 당제
    • 원굉(袁閎) 재종형
    • 원충(袁忠) 재종형
  • 배우자
    • 풍씨(馮氏) 부인, 풍방(馮方)의 딸
  • 장인
    • 풍방(馮方) 혹은 풍방(馮芳), 확실하지 않음
  • 자녀
    • 원요(袁耀) 아들
    • 원씨(袁氏) , 손권(孫權)의 비
    • 원씨(袁氏) , 황의(黃猗)의 처
  • 손자녀
    • 원씨(袁氏) 손녀, 손권의 아들 손분(孫奮)의 처
  • 기타 친척 및 인척
    • 양표(楊彪) 인척
    • 양수(楊修) 외조카
    • 하규(何夔) 당형 원의의 외삼촌
    • 고간(高幹) 외조카
    • 원서(袁敘) 당제
    • 원윤(袁胤) 당제 (중복 표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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