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董卓, AD. ?~192년) : 중국 후한말의 인물
- 이름 : 동탁(董卓)
- 자(字) : 중영(仲穎)
- 작위 : 미후(郿侯)
- 출생지: 민현 감숙성(岷縣, 甘肅)
- 사망일 : 192년 5월 22일 / 서안(西安)에서 사망
- 주요 관직 :
- 태사(太師) : 189–192년
- 승상(相國) : 189년
- 전장군(前將軍) : 188–189년
【변방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다】
-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에서 태어났다.
- 비범한 괴력을 지녔고, 말 위에서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 젊은 시절 강호(羌胡) 족이 사는 지역을 유람하며 호걸들과 교류했다. 나중에 농사를 지을 때, 호걸들이 찾아오면 생계에 필요한 소를 잡아서 성대하게 대접했고, 서로 예의를 갖춰 왕래했다.
- 농서태수(隴西太守)는 동탁을 군 병마연(郡兵馬掾)으로 등용하여 변방을 순시하게 했다
- 양주자사(涼州刺史) 성취(成就)는 다시 동탁을 종사(從事)로 등용하여 기마병을 이끌고 오랑캐를 토벌하게 했다.
【강족 토벌에 공을 세우다】
- 한(漢) 환제(桓帝) 말년에 동탁은 한(漢)나라 금군(禁軍) 우림랑(羽林郎)으로 징집되었고, 이후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郎將) 장환(張奐)의 부하 군사마(軍司馬)가 되어 한양(漢陽)의 강족들을 토벌했다. 동탁은 거칠면서도 지략 있는 전투 방식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총 1만여 명의 강군(羌軍) 병사들을 토벌했으며, 직접 강군 군장과 호걸들을 참수했다. 이 때문에 강족들은 동탁을 매우 두려워했고, 감히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탁은 낭중(郎中)으로 승진했으며, 비단 9천 필을 상으로 받았는데, 그 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 이후 광무령(廣武令), 촉군(蜀郡) 북부도위(北部都尉), 서역(西域) 무기교위(戊己校尉)를 역임했지만, 죄를 지어 혁직되었다. 병주자사(并州刺史) 단경(段熲)은 동탁을 공부(公府)에 추천했고, 사도(司徒) 원외(袁隗)는 그를 연(掾)으로 삼았다. 차례로 병주자사, 하동태수(河東太守)로 승진했다.
【기원후 185년】
- 중평(中平) 원년(185년), 한(漢) 영제(靈帝)는 동탁을 중랑장으로 봉하고 그에게 황건군(黃巾軍)을 토벌하게 했지만, 그는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 나중에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강군이 양주(涼州)에서 봉기하자, 동탁은 다시 중랑장(中郎將) 직함을 받아 파로장군(破虜將軍) 장온(張溫)을 따라 강군을 토벌했다. 강군이 유성(流星)을 보고 사기가 꺾여 후퇴하려 할 때, 동탁은 선제공격하여 수천 명을 베어 죽였다.
- 한번은 동탁이 한군을 이끌고 수만 명의 강호(羌胡)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끊겼는데, 동탁은 강군에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철수 경로에 있는 강물을 막아 둑을 쌓아 큰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그 호수에 물이 수십 리에 걸쳐 가득 차자, 동탁은 인공 호수 아래 둑을 허물어 그 틈을 타 몰래 한군을 도주시켰다. 도주 후 동탁은 쌓았던 둑을 무너뜨렸다. 수만 명의 강호(羌胡) 군대가 동탁이 도주한 것을 발견하고 추격했을 때, 무너진 둑으로 인해 생긴 큰물이 이미 깊어서 강호(羌胡) 군대는 강을 건너 동탁의 한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군 6개 군이 동한과 강족의 전쟁에 참가했는데, 5개 군은 강군에게 패했지만, 동탁의 한군만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 동탁은 동한과 강족의 전쟁 전선에서 철수하여 섬서(陝西) 부풍(扶風)에 주둔했고(장온(張溫) 군 중에서 유일하게 전군이 돌아온 부대이다), 태향(斄鄉, 옹주(雍州) 무공(武功)) 후(侯)에 봉해지고 천 호의 식읍을 받았다.
【기원후 188년】
- 중평(中平) 5년(188년),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강군이 다시 침입하자, 동탁은 전장군(前將軍) 태향후(斄鄉侯)에 봉해지고,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과 함께 한수(韓遂) 등의 강군을 크게 격파했다.
【기원후 189년】
- 중평(中平) 6년(189년), 그는 소부(少府)로 징용되었지만, 동탁은 수도에 가서 취임하기를 거절했고, 이에 조정은 그를 병주목(并州牧)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 한편, 『태평어람』(太平御覽) 496권에 인용된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동탁이 거록군(鉅鹿郡) 태수(太守) 곽전(郭典)과 함께 곡양(曲陽)으로 퇴각한 황건(黃巾)의 수령 장보(張寶)를 공격할 때, 곽전은 포위 둑을 만들려 했으나 동탁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 후 한군이 황건적을 격파하자, 당시 사람들은 “곽 군이 둑을 쌓고 동 장군이 불허했으니, 여우와 이리들이 이리로 변할 뻔했네. 다행히 우리 곽 군은 강한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아, 한순간에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군주가 강토를 보전했도다.”라는 말로 동탁을 풍자했다고 한다.
- 중평(中平) 6년(189년),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은 환관들을 제거하고자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에 하진은 동탁(董卓) 부대에 명령하여 낙양(洛陽)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동탁은 하동군(河東郡)에 주둔하고 있었고, 면지(澠池)까지 진군했을 때 조정은 종소(种劭)를 파견하여 철군하라는 칙령을 선포했다. 동탁은 조정에 변화가 생긴 것을 의심했지만, 종소의 굳건한 주장으로 석양정(夕陽亭)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동탁의 한(漢)군이 낙양(洛陽)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은 이미 환관들에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 공경(公卿) 이하의 모든 관료들이 동탁과 함께 망산(邙山) 기슭에서 한(漢)나라 황제를 맞이했다. 처음 낙양에 입성했을 때 동탁의 병력은 3천 명에 불과했다. 그는 대군이 수도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여 이웃 제후들을 위협하기 위해 매일 밤 병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 다음, 다음 날 다시 대대적인 기세로 입성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낙양 전체에는 대군이 끊임없이 진군하는 듯한 허황된 상황이 연출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은 동생 동민(董旻)에게 명령하여 오광(吳匡)과 연합해 상사 하묘(何苗, ?~189)를 살해하게 했다. 또한 여포(呂布, ?~198)를 영입하여 정원(丁原, ?~189)을 죽이게 했고, 이로써 신속하게 주변의 병력을 흡수했다. 이어서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유협(劉協, 181~234)을 황제, 헌제(獻帝)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태후(何太后)마저 살해하고 조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그는 한(漢) 화제(和帝), 안제(安帝), 순제(順帝), 환제(桓帝)의 묘호(廟號)와 공회황후(恭懷皇后), 경은황후(敬隱皇后), 공민황후(恭愍皇后)의 존호(尊號)를 박탈하기도 했다.
- 동탁은 태위(太尉)로 승진하고 전장군사(前將軍事)를 겸했으며, 더욱이 미후(郿侯)에 봉해졌다. 동탁은 이미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당고의 화(黨錮之禍)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삼군(三君) 진번(陳蕃, ?~168), 두무(竇武, ?~168)와 팔준(八俊) 이응(李膺, ?~169) 등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현명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려고도 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상국(相國)으로 승진했고, 동탁의 어머니는 지양군(池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순욱(荀彧, 163~212)의 삼촌인 순상(荀爽, 128~190)과 채옹(蔡邕, 132~192) 등에게 조정의 관직에 부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원소(袁紹, ?~202)가 동탁과 다툼을 벌이다 홀로 낙양을 떠나자, 동탁은 본래 원소를 죽이려 했으나, 부하 오경(伍瓊)과 주비(周毖) 등의 설득으로 유화적인 방법으로 그를 안심시키고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임명했다. 동시에 또 다른 명사들인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195),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 ?~191), 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孔伷, ?~189) 등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훗날 모두 동탁을 토벌하는 주력이 되었다. 동시에 동탁 자신의 심복들은 단지 열교(列校)에 불과했으며 동탁에 의해 승진하지 못했다.
【기원후 190년】
-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년), 관동(關東) 연합군은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동탁에게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190년 1월 17일, 동탁은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동탁의 부대는 낙양(洛陽)의 궁궐, 종묘, 창고, 민가 등을 불태우고 무덤을 발굴했다.
- 동탁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력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려 했다. 동탁은 병사를 양성(陽城)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관동(關東) 제후군의 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 동탁은 크게 놀랐다. 또한 동탁의 사위 우보(牛輔)가 3만 병력을 이끌고 하동(河東) 백파군(白波軍)을 정벌하다 대패하자, 동탁은 양측이 연합할 것을 염려했다. 그리하여 정월 12일 계축일(3월 6일)에 이유(李儒, ?~192)를 보내 폐위된 홍농왕(弘農王) 유변(劉辯, 176~189)을 독살했다. 그 외에도 당시 2월 사일(社日)에는 많은 백성이 제사에 참여하러 나왔는데, 동탁의 군대는 그들을 모두 참수했다. 백성의 수레에 소와 부녀자, 재물을 싣고, 사람의 머리를 수레바퀴 축에 매달아 마치 도적을 베어 얻은 것처럼 꾸몄다.
- 조조(曹操, 155~220)가 군사를 일으켜 동탁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형양(滎陽) 변수(汴水)에서 서영(徐榮)에게 격패 당했다. 동탁은 사로잡힌 관동 연합군 병사들을 학살했고, 연합군 또한 내분으로 해산되었다.
【동탁의 말로】
- 동탁은 조야(朝野) 안팎으로 측근들을 널리 배치했다. 조정은 광록훈(光祿勳) 선번(宣璠)에게 명하여 동탁을 태사(太師)로 책봉하고, 그 위계는 제후왕보다 위에 두었다. 동탁은 천자와 비슷한 의복과 수레를 참람되이 사용했고, 삼공(三公)을 부르듯이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상서(尚書) 이하의 관리들은 조정을 거치지 않고 동탁의 집으로 가서 정무를 논의했고, 관료들이 동탁과 이야기하다가 조금이라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이는 조야의 불만을 야기했다.
【기원후 192년】
- 사도(司徒) 왕윤(王允, ?~192)은 이간계를 써서 동탁의 대장 여포(呂布, ?~198)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
- 사서(史書) 기록에 따르면, 동탁은 몸집이 비대하여 시체가 버려진 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시신이 전시되었다. 시신을 지키던 병사들은 동탁의 배꼽에 등불 심지를 꽂아 불을 붙여 조명으로 사용했고, 이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 동탁의 잔당 이각(李傕, ?~198)과 곽사(郭汜, ?~197)가 군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와 왕윤(王允, ?~192)을 살해하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각 등은 동탁의 유골을 수습하여 관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 당일 큰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그 관에 벼락이 떨어졌고, 물이 묘혈로 흘러들어 관이 물 위에 떠올랐다.
- 당나라 시대에는 농서(隴西) 적도(狄道)의 백성들이 동탁을 제사 지내는 일이 있었다. 고적(高適)이 상소를 올려 동탁의 죄악을 역설하며 조정에 이러한 행위를 금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
【가족 관계】
- 동군아(董君雅) : 동탁의 부친, 영천 윤씨 위
- 지양군(池陽君) : 동탁의 생모, 성씨 미상
- 형 - 동탁(董擢) : 자는 맹고(孟高), 일찍 사망
- 본인 - 동탁(董卓) : 자는 중영(仲穎)
- 동생 – 동민(董旻) : 자는 숙영(叔穎), 황보숭에게 전사
- 조카 – 동황(董璜) : 동탁의 조카, 동탁과 함께 출정
- 자녀
- 딸 – 동씨(董氏) : 우보에게 시집감
- 사위 – 우보(牛輔) : 동탁의 사위, 죽은 후 목이 장안에 보내짐
- 아들 – 동모(董某) : 171년생, 일찍 사망
- 아들 – 동모(董某) : 동백(董白)의 아버지
- 아들 – 동모(董某)
- 아들 – 동모(董某) : 190년생, 첩이 낳은 아이, 유아 시 봉후됨
- 양자 – 여포(呂布) : 동탁의 양자, 동탁을 살해
- 손녀 – 동백(董白) : 위양군(渭陽君) 봉작, 미혼 상태에서 작위 수여
- 손자 – 동모(董某) : 186년생, 동탁이 친자식처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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