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1일 일요일

원소(袁紹, AD. ?~202년)

원소(袁紹, AD. ?~202)

 
  • 이름 : 원소(袁紹)
  • () : 본초(本初)
  • 출생 : 미상 (Unknown)
  • 출생지 : 하남 상수현(河南 商水縣)
  • 사망일 : 202628
  • 사망지 : 하북 한단(河北 邯鄲)
  • 작위 : 업후(鄴侯)
  • 직업 : 무장, 정치가, 군벌
  • 주요 관직 경력
    대장군(大將軍, 196~ 202628) : 최고 군권 보유
    우장군(右將軍, 195~ 196)
    기주목(冀州牧, 191~ 202628) : 전임(한복) 후임(원상)
    사예교위(司隸校尉, 190~ 191) : 자칭 임명
    차기장군(車騎將軍, 190~ 191) : 자칭 임명
    발해태수(勃海太守, 190)
 

기원후 188년 이전출생

  • 가문 : 여남 원씨(汝南袁氏) 가문에서 출생하다. 그의 가문은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 높았는데, 고조부 원안(袁安)부터 친아버지 원봉(袁逢), 숙부 원외(袁隗)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5명이 삼공(三公)의 직위를 역임했다. 이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임을 의미하며, 그의 문하생과 옛 부하들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다.
  • 신분 : 그의 친어머니는 비녀(婢女)였으므로, 원소(袁紹)의 초년 신분은 다소 미천했다. 전략(典略)에는 그를 비천한 출신이라 비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입양 : 친아버지 원봉(袁逢)의 형인 좌중랑장(左中郎將) 원성(袁成)이 일찍 죽자, 원소(袁紹)는 원성(袁成)에게 입양되다. 이는 명문가의 전통을 잇기 위한 조치였다.
  • 초기 관직 : 어린 나이에 낭관(郎官)이 된 후 복양장(濮陽長)으로 승진하는 등 일찍이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상기(喪期)와 은거기원후 188년 이전

  • 상기 : 어머니가 사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삼년상을 지냈다. 이후 입양된 아버지 원성(袁成)의 삼년상까지 지내며 총 6년간의 긴 상기(喪期)를 보내다. 이는 효를 중시하는 당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는 행동이었다.
  • 은거 : 상기가 끝난 후 낙양(洛陽)에 은거하며 유협(遊俠)들과 교류하고,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행보는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 출사 : 숙부 원외(袁隗)의 설득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의 연()이 되고, 시어사(侍御史)와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을 지내는 등 중앙 정계에 복귀하다.
 

기원후 188중평 5

  • 서원팔교위 임명 : 소황문(小黃門) 건석(蹇碩),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포홍(鮑鴻) 등 당대 주요 인물 8인과 함께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로 임명되다. 그는 중군교위(中軍校尉)로서 한영제(漢靈帝)가 새로 창설한 서원군(西園軍)의 부 지도자가 되다.
 

환관 주살과 동탁(董卓)과의 대립

  • 환관 주살 : 외척 하진(何進)과 환관들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자, 하진(何進)에게 환관 주살을 건의했다. 하진(何進)이 망설이다가 환관들에게 먼저 살해되자, 원소(袁紹)는 하진(何進)의 복수 명분으로 병력을 이끌고 낙양(洛陽) 남궁(南宮)으로 진입하여 모든 환관들을 주살했다. 이는 한나라의 정변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 중 하나였다.
  • 동탁(董卓)의 대두 : 이때 동탁(董卓)이 하진(何進)의 요청을 빙자하여 낙양(洛陽)으로 들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동탁(董卓)은 소제 유변(少帝劉辯)을 폐하고 헌제 유협(漢獻帝劉協)을 옹립하려 했으며, 원소(袁紹)에게 이를 모의하도록 요구했다.
  • 기주 망명 :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의 뜻에 내심 반대했으나,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한 후 기주(冀州)로 망명하다. 동탁(董卓)은 원소(袁紹)의 영향력을 의식하여 그를 발해 태수(勃海太守)와 안향후(邟鄉侯)에 봉하는 회유책을 쓰다.
 

기원후 190초평(初平) 원년

  • 정월 : 관동(關東) 연합군 맹주 추대 : 동탁(董卓)의 폐립(廢立)에 반발하여 발해(渤海)에서 거병하고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칭하다. 이어서 각지의 관동(關東) 제후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원소(袁紹)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고 동탁(董卓) 토벌 연합군을 결성하다.
  • 낙양 철수 : 동탁(董卓)의 선봉 부대가 손견(孫堅)에게 패하고 연합군의 기세에 위협을 느끼자, 동탁(董卓)은 낙양(洛陽)을 버리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하다.
  • 연합군의 와해 : 왕명을 받고 출병했던 관동(關東) 제후들은 서로 간의 불화와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연합군을 해산하다. 원소(袁紹)와 한복(韓馥)은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유우(劉虞)가 이를 거절하다.
 

기원후 200년 이전하북(河北) 통일

  • 기주(冀州) 장악 : 계략을 써서 한복(韓馥)의 기주(冀州)를 빼앗아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하다.
  • 군벌 격파 : 이후 수년 동안 추종자들의 보좌를 받아 공손찬(公孫瓚), 공융(孔融), 장연(張燕) 등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격파하다.
  • 하북(河北) 패자 등극 : 기주(冀州)를 기반으로 청주(青州), 병주(并州), 유주(幽州) 등 하북(河北)4개 주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십만 명의 대군을 거느려 당시 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로 성장하다.
  • 산동(山東) 지역 개입 : 산동(山東) 지역 전사(戰事)에도 개입하여 조조(曹操)가 여포(呂布), 장막(張邈) 등을 격파하는 것을 돕고 장홍(臧洪)을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파견하다. 그러나 장홍(臧洪)이 과거의 일로 원소(袁紹)를 배반하고 동군(東郡)이 반기를 들자, 2년에 걸친 공격 끝에 동군(東郡)을 점령하고 장홍(臧洪)을 처형하다.
 

헌제(獻帝) 영접 불발과 조조(曹操)와의 관계 악화

  • 모사들의 건의 : 헌제(獻帝)가 이각(李傕)과 곽사(郭汜)의 통제를 벗어나 낙양(洛陽)으로 도피했을 때, 모사 저수(沮授), 전풍(田豐), 허유(許攸)는 황제를 업성(鄴城)으로 영접할 것을 건의하다. 하지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은 황제를 모시는 것이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반대했다.
  • 조조(曹操)의 기회 선점 : 원소(袁紹)가 망설이는 사이, 조조(曹操)는 군사 순욱(荀彧)의 조언을 받아들여 먼저 헌제(獻帝)를 허도(許都)로 영접하여 천자(天子)를 받들고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리다.
  • 원소(袁紹)의 불만 : 원소(袁紹)는 자신도 황제를 맞이할 뜻이 있었으나 공손찬(公孫瓚)과의 전투 등으로 여의치 않아 조조(曹操)에게 대신 영접을 요청하다. 이후 헌제(獻帝)의 명의로 태위(太尉), 업후(鄴侯)에 봉해지나, 조조(曹操)의 아래에 놓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내가 조조(曹操)를 살렸는데 은혜를 배반하고 천자(天子)를 끼고 나에게 명령하는가!"라며 분노하다. 결국 조조(曹操)가 대장군(大將軍) 직위를 양보하자 대장군(大將軍)이 되다.
  • 경포(耿苞) 사건 : 주부(主簿) 경포(耿苞)가 한()나라의 운수가 다했으니 원씨(袁氏)가 천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원소(袁紹)는 여론을 떠본 후 결국 그를 처형하여 상황을 수습하다.
 

관도(官渡) 대전의 서막200년 이전

  • 전풍(田豐)의 충언 거부 : 조조(曹操)가 유비(劉備)를 토벌할 때, 모사 전풍(田豐)이 허도(許都) 기습을 건의했지만, 원소(袁紹)는 작은 아들의 병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다. 전풍(田豐)하늘이시여! 한 아이 때문에 좋은 기회를 포기하다니!”라며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 연진(延津) 전투 : 전풍(田豐)의 건의를 거부했으나, 장수를 파견하여 연진(延津)을 공격하게 하지만 조조(曹操)의 부장 우금(于禁)에게 저지당하다.
 

기원후 200건안(建安) 5년 : 관도(官渡대전  

  • 대규모 침공 : 10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조(曹操)를 공격하여 관도(官渡) 대전이 시작되다.
  • 모사들의 건의 무시 : 저수(沮授)의 지구전 전략과 허유(許攸)의 허도(許都) 기습 건의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다.
  • 허유(許攸)의 배신 : 모사 허유(許攸)가 가솔(家率) 문제로 처형당하자 원소(袁紹)에게 앙심을 품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다.
  • 오소(烏巢) 기습 참패 : 허유(許攸)의 조언을 받아들인 조조(曹操)가 기병을 이끌고 원소(袁紹)군의 군량 보급지인 오소(烏巢)를 기습하다. 오소(烏巢)를 지키던 순우경(淳于瓊)은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고, 조조(曹操)군에 의해 군량이 모두 불타고 순우경(淳于瓊)이 참살당하는 대참패를 겪다.
  • 사기 저하와 패배 : 오소(烏巢) 함락으로 인해 원소(袁紹)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결국 관도(官渡) 대전에서 조조(曹操)에게 크게 패하다. 이때 과거 전풍(田豐) 등이 헌책했던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다.
  • 내부 반란 : 기주(冀州)에서 여러 반란이 발생했으나, 모두 평정하는 데 성공하다.
 

기원후 201건안(建安) 6: 창정(倉亭) 대전

  • 재정비와 재격돌 : 관도(官渡) 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세를 가다듬어 조조(曹操)와 창정(倉亭) 대전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다.
 

기원후 202건안(建安) 7

  • 521(경술일 628) 병사 : 거듭된 군대의 패배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는 등 와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다.
  • 백성들의 애도 : 헌제춘추(獻帝春秋)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죽었을 때 하북(河北)의 사녀(士女)들이 슬픔에 잠겨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시정(市井)에서 눈물을 흘리기를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는 원소(袁紹)가 비록 실정(失政)도 있었으나 백성들에게는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족 관계

 
  • 조부 : 원탕(袁湯)
  • 부친 :
    • 원성(袁成) 양부
    • 원풍(袁逢) 친부
  • 형제
    • 원기(袁基) 동복형 또는 종형, 한나라 태복(太僕), 원외와 함께 동탁에게 살해됨
    • 원술(袁術) 이복동생, 후에 황제를 자칭했으나 실패
  • 자매
    • 원씨(袁氏) 양표(楊彪)에게 출가
    • 원씨(袁氏) 고궁(高躬)에게 출가
  • 부인 및 첩
    • 유부인(劉夫人) 원희·원상을 낳음
    • 측실 5유부인에게 살해됨
  • 자녀
    • 원담(袁譚) - 장남. 아버지 사후 원상과 다투다 패하고 조조에게 패배
    • 원희(袁熙) - 차남. 원상과 함께 요동으로 도망, 공손강에게 살해됨
    • 원상(袁尚) - 삼남. 원소가 후계자로 삼았으나 형 원담과 다툼 끝에 조조에게 패하고 요동에서 사망
    • 원매(袁買) - 원상의 동생 또는 조카로 추정
  • 기타 일족 및 친척
    • 원외(袁隗) - 원소의 숙부, 조정에서 동탁에게 살해됨
    • 고간(高幹) - 외조카. 조조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
    • 원의(袁遺) - 종형. 자는 백업(伯業), 조조가 높이 평가했던 인물
    • 원서(袁敘) - 종제. 제음태수 역임
    • 원윤(袁胤) - 종제. 단양태수 역임
    • 원춘경(袁春卿) - 동족 인물. 위군태수 역임, 조조에게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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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