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
황건적의 난, 혹은 황건 기의(黃巾起義), 황건 민변(黃巾民變)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후한(東漢) 영제(靈帝) 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 봉기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종교(태평도)의 형태로 조직된 대규모 민란 중 하나이다. 한(漢) 영제 광화(光和) 7년(184년)에 장각(張角, Zhāng Jiǎo, ?~184), 장보(張寶, Zhāng Bǎo, ?~184), 장량(張梁, Zhāng Liáng, ?~184) 등이 이끌었으며, 후한 조정의 통치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말(漢末) 삼국시대에 이름을 날린 여러 제후와 영웅호걸들은 거의 모두가 황건적 토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동시에 이 전쟁은 각 지역의 제후들이 스스로 병력을 장악하고 각지에 할거(割據)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한 왕조의 멸망과 삼국시대의 시작을 간접적으로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부패한 통치
동한 중기 이후 사회 모순이 대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환관과 외척이 전횡을 일삼아 정치는 어두웠고, 관리들은 탐욕스럽고 잔인했으며, 무거운 세금을 강탈하고 협박과 갈취를 자행했다. 경제적으로는 호족 지주의 세력이 계속해서 커지면서 토지 겸병이 성행하여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거나 떠돌이가 되었으며,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어 고통은 날로 깊어지고 사회 생산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환제(桓帝, Huán Dì, 132~167)와 영제(靈帝, Líng Dì, 156~189) 시기에 이르러 강족의 난으로 국가 재정은 점차 고갈되었다. 조정의 운영과 재정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백관의 봉록을 삭감하고, 왕후들에게 세금을 빌려 군국의 긴급한 필요를 충당해야 했다. 환제 시기에는 심지어 공공연하게 벼슬을 매매하며 막대한 재산을 거두어들였다. 영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져 미친 듯이 재물을 긁어모았다. 그는 벼슬의 판매 가격을 공표했는데, 이천석(二千石) 관직은 2천만(錢), 사백석(四百石) 관직은 4백만(錢)이었다. 심지어 대상에 따라 가격을 협상할 수도 있었다. 관리들은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최대한 백성들을 수탈했다. 정부는 벼슬을 많이 팔기 위해 관리를 자주 교체했고, 심지어 한 지방관이 한 달 안에 몇 번씩 바뀌기도 했다.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영제는 또한 군국이 대사농과 소부(少府)에 각종 세금과 공물을 납부할 때, 먼저 1할을 궁중에 납부하도록 규정했는데, 이를 ‘도행전(導行錢)’이라고 불렀다. 또 서원(西園)에 만금당(萬金堂)을 지어 사농의 비단과 금품을 쌓아 그의 사사로운 재물로 삼았다. 그는 또한 돈을 소황문(小黃門)과 중상시(中常侍) 등 환관들에게 맡겨두었는데, 각각 수천만 냥에 달했다. 여기에 이 시기 사대부와 귀족 양측이 환관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며 당고의 화(黨錮之禍)가 발생하여 청렴한 관리들이 조정이나 환관들에게 해를 입거나 금고형에 처해졌다. 환관들은 더욱더 제멋대로 백성들을 해쳤고, 이로 인해 항상 민변이 격화되었다.
동한 후기 7, 80년간 각 주자사부(刺史部) 관할 구역의 군현에서 소규모 민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 민변들은 모두 진압되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이런 민요가 있었다: “머리털은 부추 같아, 베어도 다시 돋고; 머리는 닭과 같아, 베어도 다시 운다. 관리들은 두려워할 필요 없고, 소민(小民)은 본래 가볍게 여길 수 없다.”
2. 태평도의 창립과 전파
이와 동시에 장각(張角, Zhāng Jiǎo, ?~184), 장량(張梁, Zhāng Liáng, ?~184), 장보(張寶, Zhāng Bǎo, ?~184) 삼 형제는 기주(冀州) 위군(魏郡, 지금의 허베이 한단)에서 술법과 주문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병든 백성들이 그가 만든 부적 물을 마신 후 약을 쓰지 않고도 나았고, 장각은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신선으로 추앙받았다. 장각은 또 팔사(八使)를 외부로 파견하여 교리를 전파했다. 이에 따라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점점 늘어나 심지어 수십만 명에 달했으며, 청(青), 서(徐), 유(幽), 기(冀), 형(荊), 양(揚), 연(兗), 예(豫) 등 여덟 개 주의 감찰 구역에 속한 군현 전체에 퍼져 당시 전국 인구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장각은 민간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3, 40만 명의 신도를 모았다. 신도가 점차 많아지자 장각은 ‘황천태평(黃天太平)’, 즉 ‘태평도(太平道)’를 창립하고 신도들을 관리했다. 그는 자신을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칭했으며, 세력 범위를 36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방(方)'이라고 불렀다. 대방(大方)은 1만여 명, 소방(小方)은 6천~7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마다 한 명의 지도자를 두었으며, 모든 지도자는 장각의 통제를 받았다. 이에 따라 한나라 왕실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날마다 커졌다. 신도들 중에는 호족, 관리, 환관 등도 적지 않았다. 사도 양사(楊賜, Yáng Cì, ?~185) 등 일부 관료들이 조정에 상표를 올려 태평도 수령들을 체포하고 교민들을 해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한 조정은 위험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탄압하지 않았다.
태평도는 중국 최초의 도교 조직 중 하나이다. 장각은 당시 백성들이 관부에 대한 증오심이 크다는 것을 알고, 병을 고쳐준다는 명목으로 교리를 전파하며 비밀리에 반란을 준비했다.
3. 황건적의 난
한 영제 광화(光和) 7년 갑자년(184년), 장각(張角, Zhāng Jiǎo, ?~184)은 신도들과 약속하여 3월 5일(4월 3일)에 “창천이 죽고, 황천이 서다, 갑자년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는 구호를 내걸고 반한(反漢) 봉기를 일으켰다. 여기서 '창천'은 동한 왕조를, '황천'은 바로 황건적을 의미한다. 오행종시설(五德終始說)의 추측에 따르면, 한(漢)은 화덕(火德)에 해당하며, 화(火)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황색을 상징한다. 따라서 모든 신도들은 머리에 황색 두건을 둘러 표식으로 삼았고, 이는 부패한 후한 왕조를 대체하려는 상징이었다. 장각은 한편으로 정부 기관 문에 ‘갑자’ 두 글자를 써넣어 표식을 삼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원의(馬元義, Mǎ Yuányì, ?~184)를 형주와 양주로 보내 수만 명을 모아 엽(鄴)에서 준비하도록 했다. 또한 여러 차례 낙양으로 가서 환관 봉서(封胥), 서봉(徐奉)과 연합하여 내부에서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
봉기 한 달 전, 장각의 문도이자 제남(濟南) 사람 당주(唐周, Táng Zhōu, ?~?)가 관부에 밀고하여 낙읍(洛邑)의 내응자 마원의를 고발했다. 마원의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고, 관병들은 태평도를 신봉하는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살해했으며, 천여 명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동시에 기주(冀州)에 장각을 추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장각은 어쩔 수 없이 한 달 앞당겨 2월(3월 4일)에 봉기를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머리에 황색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들을 ‘황건(黃巾)’ 또는 ‘아적(蛾賊)’, ‘의적(蟻賊)’이라고 불렀다. 장각은 자신을 ‘천공장군(天公將軍)’, 장보(張寶, Zhāng Bǎo, ?~184)를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 Zhāng Liáng, ?~184)을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하며 북방 기주 일대에서 봉기했다. 한 달 만에 전국 7개 주 28개 군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황건적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부형이 죽어도 자제들이 떼 지어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주(州)와 군(郡)이 함락되고, 관리와 사병들이 도망쳤으며, 수도를 뒤흔들었다.
4. 한 왕조의 대응
한 영제는 3월 무신일(184년 4월 1일) 하진(何進, Hé Jìn, ?~189)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좌우 우림군(羽林軍) 오영사를 이끌고 도정(都亭)에 주둔하여 무기를 정돈하고 수도를 진압하도록 했다. 또한 함곡관(函谷關), 태곡(太谷), 광성(廣城), 이궐(伊闕), 환원(轘轅), 선문(旋門), 맹진(孟津), 소평진(小平津) 등 각 관문에 도위를 배치하여 방어하게 했다. 전국 각지에 조서를 내려 엄방하도록 하고, 각 주군은 전쟁 준비, 병사 훈련, 무기 정돈, 의병 소집을 명령했다. 유비(劉備, Liú Bèi, 161~223)도 상인 장세평(張世平), 소쌍(蘇雙)의 자금을 지원받아 의병을 조직했다. 이때 중상시 여강(呂強)은 한 영제에게 “당고의 화로 쌓인 원한이 오래되었는데, 만약 황건적과 모의했다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고 아뢰었다. 한 영제는 제안을 받아들여 임자일(4월 5일)에 당고의 화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사면하고, 유배된 모든 죄수를 돌려보냈다. 각 공경에게 말, 노(弩), 병기를 기부하도록 요구하고, 여러 장수 가문의 자제 및 민간의 뛰어난 전략가들을 공거서(公車署署)로 추거하여 면접을 보도록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예 병력을 파견하여 각지의 봉기를 진압했다. 노식(盧植, Lú Zhí, 139~192)은 부장 종원(宗員)과 함께 북군(北軍) 오교사를 이끌고 북방 전선을 담당하며 장각의 주력 부대와 대치했다. 황보숭(皇甫嵩, Huángfǔ Sōng, ?~195)과 주준(朱儁, Zhū Jùn, ?~195)은 각각 한 군을 이끌고 오교, 삼하 기병 및 막 모집된 정예 병사와 용사 4만여 명을 통솔하여 영천(潁川) 일대의 황건적을 토벌했다. 주준은 또 상표를 올려 하비(下邳)의 손견(孫堅, Sūn Jiān, 155~191)을 좌군사마로 모집했고, 손견은 고향 청년들과 모집된 여러 상인 및 회수, 사수 일대의 정예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주준 군과 합류하여 출발했다. 갑자일(4월 17일), 장만성(張曼成)이 남양군수 저공(褚貢)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장각에게 호응했다.
관군(官軍)은 첫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4월에 주준 군은 황건적 보재(波才)에게 패하여 철수했다. 황보숭은 장사(長社)에 주둔하여 방어할 수밖에 없었고, 보재는 대군을 이끌고 성을 포위했다. 관군은 병력이 적고 사기가 저조했다. 또 여남(汝南)의 황건적은 소릉에서 태수 조겸(趙謙)을 격파했고, 광양(廣陽)의 황건적은 유주자사 곽훈(郭勳)과 태수 유위(劉衛)를 살해했다.
5. 반격
5월, 한 영제는 황보숭(皇甫嵩, Huángfǔ Sōng, ?~195)이 포위된 것을 보고 기도위(騎都尉) 조조(曹操, Cáo Cāo, 155~220)에게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황보숭은 이미 계책을 떠올렸다. 해 질 녘에 강풍이 불자, 황보숭은 병사들에게 횃불을 들고 몰래 성을 나가 황건적 진영 주위의 잡초를 이용해 화공을 펼치며 크게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성 위에서도 횃불을 들고 호응했고, 황보숭은 북으로 전투를 독려하며 적진으로 돌격해 적군을 대파했다. 황건적은 크게 혼란에 빠져 사방으로 흩어졌고, 마침 도착한 조조의 구원군과 합세하여 황보숭, 주준, 조조 세 방향에서 협공하여 수만 명을 도살했다. 관군은 승리했다.
6월, 남양태수 진힐(秦頡)은 장만성(張曼成)과 싸워 장만성을 참살했다. 황건적은 조홍(趙弘)을 새로운 총수로 삼아 10여만 명의 병력으로 완성(宛城)을 점령했다. 황보숭과 주준의 군대는 계속해서 여남과 진국의 황건적을 공격하며 보재(波才)를 양적까지 추격했고, 마침내 서화에서 팽탈(彭脫)을 대파했다. 남은 병사들이 완성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손견(孫堅, Sūn Jiān, 155~191)이 성에 먼저 올라 적을 크게 격파하며 예주 일대의 황건적을 성공적으로 토벌했다. 다른 한편, 노식(盧植, Lú Zhí, 139~192)은 여러 전투에서 장각을 대파하고 1만여 명을 참살했다.
장각은 광종(廣宗)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식은 방어 시설을 짓고, 해자를 파고, 운제를 만들어 성을 함락시킬 준비를 했다. 이때 한 영제는 소황문 좌풍(左豐)을 파견하여 군사 상황을 시찰하게 했다. 어떤 이들은 노식에게 좌풍에게 뇌물을 주라고 권했으나 노식은 거절했다. 그러자 좌풍은 영제에게 상표를 올려 "광종의 적은 쉽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 노중랑(노식)은 성을 굳게 지키며 군대를 쉬게 하면서 하늘의 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참소했다. 이는 노식이 적을 포위만 하고 공격하지 않아 '적을 기르며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영제는 크게 노하여 죄수 수송 마차에 노식을 태워 경사로 압송했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장수들을 재배치하는 조서를 내렸다. 황보숭은 북쪽 동군으로 향했고, 주준은 남양의 조홍을 공격했으며, 노식 대신 동탁(董卓, Dǒng Zhuó, ?~189)을 기용했다. 한편, 마찬가지로 종교 형태인 오두미도(五斗米道)가 파군(巴郡)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도자인 '천사(天師)' 장수(張修) 또한 병사를 일으켜 군현을 공격했으나 영제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6. 잔당 소탕
주준(朱儁, Zhū Jùn, ?~195)은 형주자사 서구(徐璆)와 진힐(秦頡)을 합쳐 1만 8천 명의 병력으로 조홍(趙弘)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6월부터 8월까지 함락시키지 못했다. 수도에서는 주준에게 회군하라는 상주가 있었는데, 다행히 장온(張溫)이 상표를 올려 사정을 말하여 영제는 회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식이 퍼지자 주준은 다급해져 조홍을 공격했고, 조홍은 살해당했다. 한충(韓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주준은 병력이 부족했으므로 포위망을 확대하고 진지를 구축했으며, 흙산을 쌓아 성 안을 관망했다. 주준군은 북을 치며 서남쪽을 공격했고, 황건적의 주의가 분산되자 주준은 직접 5천 정예병을 이끌고 동북쪽을 기습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고 성으로 진입했다. 한충은 어쩔 수 없이 내성으로 후퇴하여 방어했다.
황건적은 좌절하여 사기가 저하되었고 관군에 항복했다. 장초(張超), 서구, 진힐은 모두 항복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준은 만약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백성들에게 ‘이득이 있으면 도적이 되고, 이득이 없으면 항복하는’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급히 공격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주준은 흙산에 올라 성 안의 상황을 관망했고, 황건적이 항복할 수도 없고 퇴로도 없어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에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주준은 포위망을 풀었고, 한충은 과연 싸우러 나왔으며, 주준에게 크게 격파당했다. 주준은 한충을 북쪽으로 수십 리 추격하여 1만여 명을 참살했다. 한충은 항복했으나 진힐이 한충에게 쌓인 앙금이 오래되었기에 그를 죽였다. 이 행동은 오히려 황건적 잔당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다시 손하(孫夏,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중”으로 개명됨)를 총수로 추대하여 완성의 내성을 지키게 했다. 주준은 다시 급히 공격했고, 11월 계사일(185년 1월 11일)에 황건적은 패주했다. 관군은 서악정산까지 추격하여 다시 대파했으며, 손하와 1만여 명을 참살했다. 황건적은 해산되었고, 완성 일대는 평정되었다. 중평 2년(185년) 봄, 주준은 개선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다른 한편으로 황보숭은 8월에 동군 창정(倉亭)에 도착하여 복이(卜巳)를 대파하고 생포했으며, 7천여 명을 참살했다. 한편 동탁(董卓, Dǒng Zhuó, ?~189)은 장각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별다른 전과 없이 돌아왔다. 영제는 을사일(9월 20일)에 황보숭에게 계속 북상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장각은 이미 병사했고, 10월에 광종에서 장량(張梁, Zhāng Liáng, ?~184)과 싸웠는데, 장량군은 병력이 많고 강하여 첫 전투에서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음 날, 황보숭은 병영을 닫고 병사들을 쉬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 적군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황건적의 전의는 즉시 느슨해졌다. 황보숭은 밤을 틈타 병력을 이끌고 새벽에 적진을 기습했다. 오후까지 싸워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고 장량과 3만여 명을 참살했으며, 도망치다 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5만여 명에 달했다. 수레와 치중 3만여 량을 불태웠고, 사로잡은 인원도 매우 많았다. 장각은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능욕당했고, 수급은 경사로 보내졌다. 11월, 황보숭은 거록태수 곽전과 함께 하곡양을 공격하여 장보(張寶, Zhāng Bǎo, ?~184)를 참살하고 1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황건적의 난은 잠시 평정되었다.
7. 결과
봉기가 비록 진압되었지만, 한나라 왕실의 위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한 영제는 마음을 고쳐먹기는커녕 계속해서 향락에 빠졌다. 각지에서는 소규모 폭동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흑산, 백파, 황룡, 좌교, 청우각, 오록, 시근, 이대목, 좌자장팔, 고초, 유석, 평한, 대홍, 백요, 사리, 연성, 라시, 뇌공, 부운, 비연, 백작, 양봉, 우독 등 수많은 분산된 세력들이 생겨났다. 이들 중 세력이 큰 곳은 2~3만 명, 작은 곳도 6~7천 명에 달했으며(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비연이 이끄는 흑산군(黑山軍)은 심지어 추종자가 1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 영제 중평 5년(188년), 황건적 잔당들이 다시 봉기하여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2월에는 곽태 등이 서하 백파곡에서 봉기하여 태원군, 하동군 등을 공략했다. 4월에는 여남군 갈피의 황건적이 다시 일어나 군현을 공격했다. 10월에는 청주, 서주의 황건적도 다시 일어나 군현을 공략했다. 11월, 한나라 조정은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갈피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포홍(鮑鴻)을 파견했고, 갈피에서 양측이 대전하여 포홍의 군대는 패배했다. 황건적의 각 부대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그 기세는 첫 황건적의 난만큼은 아니었지만 한 영제를 매우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민변을 효과적으로 평정하기 위해 중평 5년(188년) 3월, 영제는 태상 유언(劉焉, Liú Yān, ?~194)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부 자사(刺史)를 주목(州牧)으로 바꾸고, 종실이나 중신들이 이를 겸임하도록 했다. 이들에게 지방의 군사와 행정 권한을 부여하여 정권을 통합하고 지방 정권의 실력을 강화하며, 지방을 더욱 쉽게 통제하고 황건적 잔당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영제가 권한을 하방한 것이 오히려 지방 군웅들이 병력을 보유하고 자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동탁 토벌전 이후 각 군웅들이 서로 공격하며 중원을 다투고, 심지어 동한 황제가 군벌들의 손안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가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황건적의 난은 동한 왕조의 멸망을 촉진한 도화선이자 삼국시대의 서막이었다. 비록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지만, 봉기는 당고의 화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사면을 이끌어내어 많은 문인과 관료들이 다시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8. 영향
36개 방을 조직하고 봉기 날짜를 확정하는 데 있어서 장각(張角, Zhāng Jiǎo, ?~184)은 황건적에게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 이런 계획적인 행동력을 상실했다. 황건적은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었다. 장각이 태평도의 수장이었지만, 그는 기주(冀州)에서만 전전했고 다른 군단을 조정하거나 지휘하지 않았다. 같은 목표도 없었고, 그저 지역을 점령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거나 약탈을 일삼을 뿐이었다. 더욱이 우군(友軍)이 어려움을 겪을 때 각 군은 서로 구원하지 않았고, 관군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각개격파했다. 황건적의 난이 천하를 뒤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결함 때문에 황건적은 결국 한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전멸당했다.
황건적의 난은 동한 말기의 정치 상황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집중된 자사(刺史) 감찰 구역을 주목(州牧)으로 바꾸었다. 이는 황건적의 난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늦추어 동한이 멸망하는 시기를 늦추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탁(董卓, Dǒng Zhuó, ?~189)이 정권을 장악한 후, 지방에서 강한 병력을 가진 자사와 태수들이 중앙 조정에 집단적으로 반역했다. 이는 동한 말기 군벌들의 싸움이 시작되는 서막을 열었으며, 역사적으로 '주목할거(州牧割據)'라고 불린다. 이는 삼국 분립의 먼 원인이 되었다. 비록 그렇지만, 봉기는 당고의 화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사면을 이끌어내어 많은 문인과 관료들이 다시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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