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1일 일요일

[AD. 263년] 조위(曹魏)의 촉한(蜀漢) 멸망전

조위(曹魏)의 촉한(蜀漢) 멸망전(AD. 263년)

 

1. ‘촉한 멸망전개요

 
조위의 촉한 멸망전’, 혹은 위나라의 촉 멸망전’, ‘촉한 멸망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은 삼국 후기의 병합 전쟁이다. 263, 조위 정권의 실질적 권력자 사마소(司馬昭, Sīmǎ Zhāo, 211~264)는 촉한을 향해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종회(鍾會, Zhōng Huì, 225~264), 등애(鄧艾, Dèng Ài, 197~264), 제갈서(諸葛緒, Zhūgě Xù, ?~?) 등을 동, , 서 삼로로 나눠 한중(漢中)을 공격하도록 파견했다. 한군(漢軍, 촉한군)은 대장군 강유(姜維, Jiāng Wéi, 202~264)를 필두로 저항군을 조직했고, 검각(劍閣)의 험난한 요새를 거점으로 위군과 한동안 대치하여 위군은 한때 진퇴양난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등애가 정예 병력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음평(陰平)을 넘어 부성(涪城)과 면죽관(綿竹關)을 점령하며 성도(成都)성 아래까지 진격했다. 촉한의 후주 유선(劉禪, Liú Shàn, 207~271)은 항복했고, 강유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종회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촉한은 멸망했고, 삼국 정립 시대를 끝내는 통일 전쟁의 막을 올렸다.
 

2. 촉한의 정세

 
247년부터 262년까지, 촉한의 대장군 강유(姜維, 202~264)는 계속해서 위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촉한의 국력은 날마다 소모되었다(강유의 북벌 참조). 여기에 후주 유선(劉禪, 207~271)이 환관 황호(黃皓, Huáng Hào, ?~?)를 총애하며 정치는 날로 문란해졌다. 강유는 황호를 여러 차례 탄핵했으나, 오히려 황호에게 박해를 받았고 황호는 염우(閻宇, Yán Yǔ, ?~?)로 강유의 자리를 대체하려 했다. 유선 또한 강유가 여러 차례 위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고 강유를 멀리했다. 결국 강유는 황호의 박해를 피하고 조위의 방어에 집중하기 위해 군대를 답중(沓中)으로 옮겨 둔전을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촉한 내부에는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3. 조위의 정세

 
조위 측은 고평릉의 변 이후 사마씨 가문이 위나라 정권을 장악했고, 황제는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장수 등애(鄧艾, 197~264)가 여러 차례 강유의 북벌군을 물리쳤고, 사마소(司馬昭, 211~264) 또한 수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마소는 위나라 황제 조모(曹髦, Cáo Máo, 241~260)가 피살당한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불리한 영향을 만회할 의도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촉나라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등애조차도 낙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종회(鍾會, 225~264)만이 이 계획을 지지했다. 사마소는 촉 정벌을 고수했고, 심지어 반대하는 장수 등돈(鄧敦, Dèng Dūn, ?~?)을 참수하기까지 했다.
 

4. 사마소, 촉한 정벌을 결정하다

 
사마소는 촉한을 먼저 토벌하고 나중에 손오(孫吳)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촉한 멸망 후에 빠르게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고, 종회(鍾會, 225~264)를 관중(關中)에 주둔시켜 남하할 준비를 시켰다. 강유는 위나라의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유선에게 상황을 보고하며 양평관(陽平關)과 음평(陰平)의 교두(橋頭) 방어에 병력을 더 배치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유선은 황호의 귀신이나 무당의 말만 믿고 강유의 건의를 무시했으며, 심지어 조정의 신하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5. 남하 한중

 
2638, 18만 위군이 세 갈래로 남하했다. 서로군은 정서장군 등애가 이끄는 3만 명으로, 적도에서 출발해 감송, 답중 방면으로 강유를 직접 공격했다. 중로군은 옹주자사 제갈서가 이끄는 3만여 명으로, 기산에서 무가, 음평의 교두를 향해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다. 동로군은 진서장군 종회가 이끄는 주력 10여만 명으로, 사곡, 낙곡, 자오곡 세 갈래로 나뉘어 한중으로 진군했다.
 
유선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우거기장군 요화를 보내 강유를 지원하게 했고, 좌거기장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을 양평관으로 보내 종회군을 방어하게 했다. 9, 위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으나, 유선은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한중의 한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 위국 동로군이 곧바로 진격할 수 있게 했다. 종회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양평관을 공격했고, 전장군 이보에게는 낙성을 방어하는 군감 왕함을, 호군 순개에게는 한성에 주둔한 수무장군 장빈을 공격하게 했다. 유흠은 자오곡을 통해 주력과 합류했고, 호군 호열은 양평관(양안관)을 공격했다. 양평관 수장인 관중도독 부첨은 굳게 지키려 했으나, 부장 장서가 강등된 것에 앙심을 품고 부첨을 부추겨 성 밖으로 나가 위군과 싸우게 했다. 장서는 후방을 지키겠다고 거짓 약속했고, 부첨이 성 밖으로 나가자 즉시 성문을 열고 위군에게 항복했으며 부첨군의 귀환로를 차단했다. 고립된 부첨은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 전사했으며 전군이 몰살당했다. 위군은 양평관을 점령하고 동로군은 계속 진격해 검각을 압박했다.
 
서로군도 동시에 공세를 펼쳤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흠에게 병력을 나눠 답중을 동서북 삼면에서 공격하게 했다. 강유는 위군 주력이 한중에 진입했고 양안관이 함락될 위험에 처했으며 검각이 고립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전투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싸우면서 후퇴하여 최대한 빨리 검각으로 가서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제갈서의 군대가 기산에서 음평의 교두까지 와서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다. 강유는 위군을 유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공함곡을 우회해 제갈서 군의 후방으로 가서 옹주를 공격하는 척했다. 제갈서는 자신의 후방이 차단될까 두려워 급히 30리를 후퇴했고, 강유는 즉시 되돌아와 다리를 건넜다. 제갈서가 속았음을 깨닫고 추격하려 했으나 한군은 이미 다리에서 멀리 떠났다. 강유는 교두에서 음평까지 밤낮없이 남쪽으로 철수했고, 도중에 북상하던 요화, 장익, 동궐 등의 한군 원군과 합류했다. 당시 양평관은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기에, 한군은 중요한 관문인 검각으로 퇴각해 위군에 저항했다.
 

6. 부성 기습

 
등애는 군대를 이끌고 음평에 도착했다. 그는 정예병을 선발해 제갈서와 연합하여 강유를 피해 강유를 통과해 직접 성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제갈서는 자신이 강유 공격만 명령받았다며 독단적 행동은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등애의 연합군 제안을 거절하고 동쪽으로 가서 종회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종회는 군권을 확대하기 위해 제갈서가 겁을 먹고 진격하지 않는다고 밀고했고, 결국 제갈서는 소환되어 처벌받았으며 그의 직속 병력은 모두 종회에게 넘어갔다.
 
종회는 군대를 이끌고 검각으로 향했다. 검각은 지형이 험준하고 길이 좁고 골짜기가 깊어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웠다. 강유는 이런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진영을 설치하고 요새를 지켰다. 유선도 사람을 보내 동오에 구원을 요청했고, 오국은 정봉, 정봉, 손이를 보내 수춘을 공격해 한을 구하게 했다. 종회는 병력이 수비하는 촉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여러 날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검각은 성도로 가는 주요 통로라 포기할 수 없었고, 위군은 식량이 부족해 군심이 동요하며 퇴각하려는 생각이 생겼다. 모두가 지금까지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까 걱정했다.
 
이때 등애는 방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라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종회에게 음평에서 작은 길을 통해 부성에 도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강유가 검각에서 원군을 오면 검각을 차지할 수 있고, 만약 한군이 구원하러 오지 않으면 강유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성도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등애의 제안이다. 이 계책은 받아들여졌고, 등애가 실행을 맡았다. 등애는 3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음평에서 출발했다. 가는 길은 높은 산과 험준한 지형으로 인적이 드물어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이 덕분에 촉한은 이곳에 방어를 설치하지 않았다. 10, 등애는 음평의 샛길을 따라 700여 리(위나라 기준)의 황량한 무인 지대를 행군했다. 도중에 산을 뚫고 다리를 놓았으며, 길이 막히거나 험난한 곳에서는 등애 자신이 직접 짚으로 몸을 감싸고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고 나무와 절벽을 기어오르며 앞장섰다. 이런 식으로 위군은 마침내 음평의 험난한 길을 통과하여 강유에 도착했다. 강유 수장 마묘는 당황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등애에게 항복했다. 등애는 위군을 이끌고 승세를 몰아 부성을 공격했다.
 

7. 촉한 멸망

 
강유가 항복한 후, 유선은 위장군 제갈첨(諸葛瞻, Zhūgě Zhān, 227~263)을 파견해 등애에 대항하게 했다. 이때 상서랑 황충(黃崇, Huáng Chóng, ?~263)은 제갈첨에게 "서둘러 험지에 의지하여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제갈첨은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고, 등애는 험지를 빼앗을 수 있었다. 제갈첨은 군을 이끌고 부성에서 위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등애가 제갈첨의 선봉을 대파했다. 제갈첨은 어쩔 수 없이 면죽으로 퇴각해 수비했다. 등애는 사자를 보내 제갈첨에게 항복하면 반드시 낭야왕(瑯邪王)으로 봉하겠다며 항복을 권했다. 제갈첨은 노하여 사자를 참수했다. 등애는 즉시 자신의 아들 등충(鄧忠, Dèng Zhōng, ?~?)과 사찬(師纂, Shī Zuǎn, ?~?) 등을 보내 좌우 양쪽에서 한군을 공격하게 했다. 위군이 불리해지자 등애는 크게 노하여 등충과 사찬을 참수하겠다고 위협하며, 두 사람에게 공을 세워 허물을 만회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한군을 크게 격파하고 제갈첨, 상서 장준(張遵, Zhāng Zūn, ?~263), 황충(黃崇, ?~263), 우림우부독 이구(李球, Lǐ Qiú, ?~263) 등을 참살했다. 위군은 면죽을 점령하고 즉시 성도로 진군했다.
 
당시 한나라 병사 대부분은 검각에 있었고, 성도에는 병력이 적었다. 조정의 군신들은 위군이 도성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이들은 남중 지역으로 도망치자고 건의했고, 또 어떤 이들은 손오에 귀의하자고 제안했다. 그중 광록대부 초주(譙周, Qiáo Zhōu, 201~270)는 위나라에 항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많은 신하들이 그에게 동조했다. 11, 유선은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문을 열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위군은 성도를 점령했고, 동시에 태상 장준을 파견해 강유 등에게 항복을 명령함으로써 촉한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검각을 굳게 지키던 강유는 먼저 제갈첨의 패배 소식을 들었으나, 유선의 정확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 검각을 포기하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파중으로 들어갔다. 종회의 대군은 부성에 주둔했고, 별도로 호열(胡烈, Hú Liè, ?~?), 전속(田續, Tián Xù, ?~?), 방회(龐會, Páng Huì, ?~?) 등을 보내 강유와 그의 부대를 추격하게 했다. 강유는 다시 기현으로 물러났다가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요화(廖化, Liáo Huà, ?~264), 장익(張翼, Zhāng Yì, ?~264), 동궐(董厥, Dǒng Jué, ?~?) 등 장수들과 직속 부대를 이끌고 종회군에 항복했다.
 

8. 종회의 야심과 몰락

 
등애는 촉한을 멸망시킨 후 사마소에게 유선을 부풍왕(扶風王)으로 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사마소는 등애를 의심하게 되었고, 종회, 호열 등은 이때를 틈타 등애가 반역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결국 등애 부자는 체포되어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등애가 체포된 후 종회는 촉중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고, 강유는 종회에게 야심이 있음을 보고 사마소에 대항하도록 종회를 부추겼다. 그리하여 종회는 한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강유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는 강유에게 촉군을 이끌고 사곡으로 나가 장안을 점령하고, 이어서 기병은 육로로, 보병은 수로로 맹진과 낙양을 공격하여 천하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종회의 예상과 달리 사마소는 1만여 명의 병력을 사곡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에 주둔했다. 종회는 놀라고 두려워 바촉을 먼저 점령하고 서남 지방에서 할거하기로 결정했다. 강유는 종회에게 아문기독(牙門騎督) 이상의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학살하라고 건의했으나, 종회는 망설였다. 그 결과 호열이 군사를 일으켜 반항했다. 종회와 호열, 그리고 많은 아문 장수들이 성도성 안에서 격전을 벌였고, 강유가 가장 먼저 살해당했다. 얼마 후 위군 병사들이 종회를 죽였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종회가 살해된 직후 등애의 친병들이 등애를 맞이해 돌아오려 했으나, 위관(衛瓘, Wèi Guàn, 220~291)이 전속에게 등애를 공격하게 했다. 양측은 면죽 근처에서 조우했고, 등애 부자는 살해당했다. 이로써 종회의 반란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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