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呂布, AD. 161년 이전~199년) : 후한 말의 무장, 동탁을 살해함
- 이름 : 여포(呂布)
- 자(字) : 봉선(奉先)
- 별칭(별명) : 비장(飛將) - ‘나는 장수’라는 뜻
- 작위 : 온후(溫侯)
- 출생지 : 구원현 오원군(九原縣 五原郡) - 지금의 내몽골 바오터우 구위안구
- 사망지 : 하비현(下邳縣) -조조에게 포위 후 처형됨
- 출생 : 161년 이전
- 사망 : 199년 2월 7일
- 주요 관직
- 좌장군(左將軍) : 197–199년
- 평동장군(平東將軍) : 동쪽 평정
- 분위장군(奮威將軍) : 192–197년, ‘분발하며 위엄 있는 장군’
【출생】
- 기원후 161년 이전에 출생하였다.
- 여포의 본적은 산서(山西) 병주(并州)이다.
【기원후 189년】
- 중평(中平) 6년(189년), 그는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병주에서 관직에 있었다. 자사(刺史) 정원(丁原, ?~189)이 기도위(騎都尉)를 겸하며 하내(河內)에 주둔했고, 여포를 주부(主簿)로 임명하여 그를 매우 중용했다.
- 한(漢) 영제(靈帝)가 붕어한 후, 정원은 환관들을 주살하려는 대장군 하진(何進, ?~189)의 밀모에 참여하기 위해 수도로 들어갔다. 정원은 조정으로부터 집금오(執金吾)로 임명되었다. 하진이 살해되고 동탁(董卓, ?~192)이 수도로 진입한 후, 동탁은 여포를 꾀어 정원을 살해하게 했고, 그 대가로 여포를 기도위로 임명했다. 동탁은 여포를 매우 신뢰하고 아꼈으며, 심지어 부자 관계를 맺기로 맹세하기도 했다. 여포는 활과 말을 잘 탔고, 힘이 비범하여 ‘비장’(飛將)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은 그를 중랑장(中郎將)으로 재임명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기원후 190년】
- 한(漢)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년), 동탁은 여포를 시켜 동한(東漢)의 황제릉과 공경(公卿)의 능묘를 파헤쳐 금은보화를 탈취하게 했다 .
【기원후 192년】
- 동탁 토벌전 당시, 관동군(關東軍)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봉기했을 때 여포 역시 참전했다. 하지만 장수 호진(胡軫)과 불화가 있어 손견(孫堅, 155~191)에게 패배했다. 결국 동탁은 천자를 끼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 동탁은 자신이 흉악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여포를 자신의 시위(侍衛)이자 중각(中閣)의 수비병으로 삼았다. 그러나 동탁은 성격이 급했고, 불쾌할 때 여포에게 수극(手戟)을 던지기도 했다. 한편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간통하고 있었으므로, 동탁이 이를 알아챌까 봐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해했다. 『영웅기』(英雄記)에서는 동탁이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네가 나의 사사로운 처소를 어지럽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당시 왕윤(王允, ?~192), 사손서(士孫瑞), 양찬(楊瓚) 등은 동탁 암살을 모의했고, 이에 여포를 끌어들였다. 여포는 이를 승낙하고 동탁 암살에 성공했다. 그는 분위장군(奮威將軍, 일설에는 분위(奮武) 장군)에 임명되었고, 가절(假節)의 권한과 삼공(三公)에 버금가는 의장(儀仗)을 받았으며, 온후(溫侯)에 진봉(進封)되어 왕윤과 함께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각과 곽사, 조정을 장악하다】
- 동탁(董卓, ?~192년 5월 22일)이 죽은 지 한 달여 만에, 그의 옛 부하 이각(李傕, ?~198)과 곽사(郭汜, ?~197) 등은 본래 부대를 해산하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가후(賈詡, 147~223)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각은 동탁의 옛 부하들을 불러 모아 장안(長安)을 공격했다. 여포(呂布, 161년 이전~199년 2월 7일)는 이각과 곽사 연합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하여 도망쳤고, 결국 이각과 곽사의 군대가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원술, 장양, 원소에게 의탁하다】
- 여포는 이각에게 패배한 후, 먼저 원술(袁術, ?~199)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동탁을 죽인 공로를 자만하며 매우 오만하고 제멋대로 굴었다. 원술은 여포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불만을 품었고, 이에 여포는 장양(張楊)에게로 옮겨갔다. 장양의 부하들은 여포를 사로잡아 이각에게 넘겨줄 것을 건의했다. 여포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원소(袁紹, ?~202)에게 의탁했다.
- 원소에게 의지하여 여포는 그가 흑산군(黑山軍)을 격파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여포는 자신의 공을 내세워 원소에게 병사를 달라고 청했고, 원소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또한 여포는 장수들이 곳곳을 약탈하고 백성을 노략질하는 것을 방치했다. 여포는 자신이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원소에게 작별을 고했다. 원소는 겉으로는 장사 30명을 보내 여포를 배웅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여포를 암살하려던 계책이었다. 여포는 원소의 계략을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에게 장막 안에서 거문고를 타게 한 다음 자신은 그 틈을 타 몰래 떠났다. 원소는 여포를 추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그의 부하 장수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침묵했고, 감히 여포를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여포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조조를 공격하다】
- 장막(張邈, ?~195)은 진궁(陳宮)의 계책을 받아들여, 본래 조조(曹操, 155~220)의 근거지였던 연주(兗州)에 여포(呂布, 161년 이전~199년 2월 7일)를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때 조조는 동쪽으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정벌하고 있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회군했으며, 원소(袁紹, ?~202)의 도움을 받아 여포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여포는 부대를 파양(濮陽) 서쪽 40~60리 지점에 주둔시켰고, 조조는 야습을 감행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 싸웠다. 여포는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구원하러 왔고, 세 방향에서 조조를 포위 공격했다.
- 여포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수십 차례 교전했으며, 전투는 치열했다. 조조는 용감한 병사를 모집하여 돌격하게 했고, 전위(典韋, ?~197)가 선뜻 응답하여 수십 명을 모았다. 그들은 갑옷을 두 겹으로 입고, 방패를 버린 채 긴 창을 들고 싸움에 나섰다. 서쪽 전선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위는 적군을 가로막아섰다. 적군이 활과 쇠뇌를 마구 쏘아대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전위는 눈을 감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적이 10보(步) 이내로 오면 나를 불러라!” 병사들은 "10보 이내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전위는 다시 외쳤다. “5보 이내로 오면 불러라!” 모두가 두려워하며 외쳤다. “적이 코앞에 있습니다!” 전위는 10여 자루의 긴 창을 들고 큰 소리로 일어나 공격했고, 전위에게 공격당한 적들은 모두 쓰러졌다. 결국 여포는 후퇴했다.
【유비에게 의탁하다】
- 여포는 적수를 당해내지 못하고 동쪽으로 유비(劉備, 161~223)에게 의탁했다. 여포는 서주에 들어서자마자 원술에게 편지를 보내 유비와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고, 유비는 그에게 소패이(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여포는 유비를 아우라고 불렀다(이로 보아 여포가 유비보다 나이가 많으며, 161년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유비와 원술이 다투자, 여포는 그 틈을 타 쉬저우를 빼앗고 스스로 서주 목(牧)이라 칭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여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여포는 유비를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원술과 유비를 화해시키다】
- 얼마 후 원술이 유비를 공격하자, 여포는 원술이 태산(泰山)의 산적들과 연합하여 자신을 포위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원문 사극(轅門射戟)을 통해 이 전투를 화해시켰고, 원술 휘하의 기령(紀靈)은 감탄하며 “장군의 천위(天威)다!”라고 칭송했다. 그 후 진규(陳珪)의 이간책으로 인해 여포는 원술과의 동맹을 끊고 조조와 잠시 의화(議和)를 맺었다. 그러나 진규의 아들 진등(陳登)은 조조와 성공적으로 연락하여 조조의 내응이 되어 여포를 토벌하기로 했다. 여포가 원술과의 우호를 끊었기 때문에, 원술은 군사를 일으켜 쉬저우를 공격했다. 진규는 이간계를 써서 여포로 하여금 원술군을 크게 무찌르게 했다.
【유비가 여포의 말을 훔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소패에서 다시 1만 명의 병력을 모았고, 나중에는 여포의 말을 훔쳐갔다. 여포는 크게 노하여 원환(袁渙)에게 유비를 모욕하는 편지를 쓰라고 요구했다. 원환은 거절했고, 여포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원환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원환은 시종일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굳건히 쓰기를 거부했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오직 덕(德)으로써 사람을 욕되게 할 수 있다고 들었을 뿐, 욕설로 사람을 욕되게 할 수 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유비가 군자라면 이러한 모욕에 개의치 않을 것이고, 유비가 소인이라면 응답할 것이니, 그때는 욕을 당하는 쪽이 이쪽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제가 유비를 위해 일하게 된다면, 오늘 제가 당신을 위해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제가 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당신을 모욕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그래도 괜찮습니까?” 여포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포는 다시 원술과 연합하여 유비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
【평동장군으로 임명되다】
- 한(漢) 헌제(獻帝)가 하동(河東)으로 망명했을 때, 여포에게 자신을 맞이하러 오라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여포는 식량이 부족하여 응답하지 못하고, 단지 사신을 보내 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은 여포를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고 평도후(平陶侯)에 봉했다. 조조가 조정을 장악한 후에는 친필로 여포를 크게 위로하며, 역적 공손찬(公孫瓚), 원술, 한섬(韓暹), 양봉(楊奉) 등을 토벌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다시 사신을 헌제에게 보내 상소했다. 자신이 황제를 맞이할 뜻이 있지만, 외장으로서 조조와 싸운 전적이 있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설 수 없으며, 쉬저우에서 대기하겠다고 했다. 또한 조조에게는 옛 악감정을 잊고 위로와 칭찬을 해준 것에 감사하며, 원술 토벌 등에 기꺼이 협력하겠다고 답했다. 조조는 또 봉거도위(奉車都尉) 왕칙(王則)을 사신으로 보내 조서와 평동장군 인수를 가지고 여포를 찾아갔다. 또한 친필로 조정에 인수가 없으니, 준 인수는 자신의 집에서 만든 상등품이라고 전하며, 원술의 제위 칭호에 반대하고 관계를 끊은 여포의 태도를 칭찬했다. 여포는 진등(陳登)을 파견하여 표장을 바치며 감사를 표했고, 조조에게 좋은 띠를 선물로 답례했다.
【기원후 196년】 하맹의 반란
- 건안(建安) 원년(196년) 6월, 하맹(郝萌)은 원술(袁術, ?~199)의 부추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하비(下邳)를 공격했다. 하비의 방어는 견고하여 돌입할 수 없었고, 여포(呂布, 161년 이전~199년 2월 7일)는 누가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알몸으로 부인들과 함께 거름 구덩이(糞坑)로 도망쳤다. 여포는 고순(高順)의 진영으로 도망쳤고, 고순은 여포에게 적을 판단할 만한 단서가 있는지 물었다. 여포는 단지 하내(河內) 사람의 말을 들었다고 답할 뿐이었다. 고순은 당시 상황을 신속하게 분석하여 하맹이 반란을 일으킨 것임을 판단했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하비부에 진입했다. 하맹의 부장 조성(曹性)은 배신하여 하맹과 맞섰다. 하맹은 조성을 찔러 부상을 입혔고, 조성은 하맹의 한쪽 팔을 잘랐다. 마지막으로 고순이 하맹을 참살했다. 사건이 끝난 후, 여포는 조성에게 사건의 발단이 무엇인지 물었다. 조성이 “하맹이 원술의 선동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답했다. 여포가 다시 “누가 공모했는가?”라고 묻자, 조성은 진궁(陳宮, ?~198)이 공모했다고 답했다. 당시 진궁은 여포 옆에 앉아 있었는데, 긴장하여 얼굴이 붉어졌지만, 여포는 진궁의 재능을 아껴 추궁하지 않았고, 나중에 조성을 시켜 하맹의 잔당을 통솔하게 했다.
【기원후 197년】 하비에서의 패배
- 동한(東漢) 건안(建安) 2년(197년) 여름, 여포에게 의탁했던 원술의 배신자 한섬(韓暹)과 양봉(楊奉)은 군량이 부족하여 다른 곳으로 가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다. 그래서 여포에게 작별을 고했지만, 여포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양봉에게 유비(劉備, 161~223)의 땅에서 보리를 빼앗아오라고 명령했다. 한섬과 양봉은 이에 소패(小沛)의 유비와 연합하여 여포를 공격했다. 유비는 겉으로는 승낙했고, 양봉이 유비가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을 때, 유비는 사람을 시켜 양봉을 결박하고 살해했다. 스무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주하던 한섬 또한 현령 장선(張宣)에게 살해되었다. 유비는 한섬과 양봉의 병마를 흡수하여 병력이 크게 증가했다. 동한 건안 3년(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하내로 보내 말을 구매하려 했으나, 도중에 유비군에게 약탈당했다. 여포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원술과 동맹을 맺었다. 원술의 요청에 따라 고순과 장료(張遼, 169~227)를 파견하여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9월에 소패성이 함락되었고, 유비는 홀몸으로 도주하여 조조에게 의지했다. 유비의 처자식은 여포에게 사로잡혔고, 조조는 이에 유비의 군대와 연합하여 여포의 근거지 하비(下邳)를 공동으로 공격했다. 조조는 이전에 내응하기로 약속한 광릉태수(廣陵太守) 진등(陳登)과 연합했다. 진등은 선봉을 맡고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여포는 여러 차례 출전했으나 모두 대패했고, 다시는 성 밖으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조조는 세 달 동안 성을 포위하고 물길을 돌려 성을 에워쌌다. 여포군 내부는 상하가 이심이 되어, 그의 부하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이 반란을 일으켜 고순과 진궁을 결박하여 항복했다. 여포는 백문루(白門樓)에서 적군이 급히 공격하고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측근들에게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목을 조조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주군을 시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성을 내려가 항복했다.
- 이전에 여포는 금주령을 내렸었다. 마침 후성은 부하가 유비에게 가져가던 말 15필을 직접 되찾아왔다. 당시 모든 장수들이 후성을 축하했고, 후성은 전승 축하연을 위해 직접 술을 빚고 돼지를 사냥했다. 잔치를 시작하기 전 여포에게 절하며 돼지 반 마리와 술 다섯 말(斗)을 선물로 바쳤다. 여포는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내가 금주령을 내렸는데 너는 술을 만들었구나. 너희들이 함께 마시고 먹으며 패거리를 지어, 나 여포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냐!” 이에 후성은 두려워했고, 이것이 배반의 빌미가 되었다.
- 조조와 유비 연합군은 하비성으로 진입하여 성을 안정적으로 통제했다. 백문루에서 조조 주재 하에 여포를 비롯한 전포로들을 심문하고 처리하는 안건을 진행했다. 먼저 여포는 결박당한 채 조조의 병사들에게 끌려 조조가 있는 심문정 앞에 도착했다. 이때 여포는 조조를 만나 “이제 세상은 평정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조가 “무슨 뜻이냐?”라고 묻자, 여포는 다시 말했다. “조공께서 꺼리는 것은 저에 불과합니다. 이제 제가 당신께 복종했으니 천하의 근심은 크게 줄었습니다. 저에게 기병을 이끌게 하고, 조공께서 보병을 이끄시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입니다(明公之所患不過於布,今已服矣。令布將騎,明公將步,天下不足定也)” 여포는 말을 마치고 옆에 앉아 있던 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현덕, 당신은 손님으로 앉아있고 저는 포로로 잡혀있습니다. 밧줄이 저를 너무 세게 묶었는데, 어찌 말 한마디로 밧줄을 풀어주지 않습니까?(玄德,卿為坐上客,我為降虜,繩縛我急,獨不可一言邪)”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호랑이를 묶는 데 어찌 단단히 묶지 않을 수 있겠는가?(縛虎不得不急)” 인재를 아끼던 조조는 여포의 무용을 높이 평가하여 받아들일 것을 고려했다. 조조가 사람을 시켜 여포의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려 할 때, 유비는 “정원(丁原)과 동탁(董卓)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라고 조조를 만류했다. 주부(主簿) 왕필(王必) 또한 앞으로 나서 조조에게 여포를 죽일 것을 권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래 너에게 살 길을 열어주려 했으나, 누군가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너를 죽일 수밖에 없구나.” 여포는 “유비 네가 가장 믿을 수 없는 놈이다!”라고 크게 욕설을 퍼부었다.
- 결국 여포는 진궁, 고순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 사람은 교수형에 처해진 후 참수되었고, 그들의 목은 허도(許都)로 보내져 매장되었다.
【가족 관계】
- 정실(추정) - 위씨(魏氏) : 정사에 이름 미기록, 위속(魏續)의 누이로 추정
- 정실(연의) - 엄씨(嚴氏) : 『삼국연의』에만 등장
- 측실(연의) - 조씨(曹氏) : 『삼국연의』, 조표(曹豹)의 딸
- 첩(연의) - 초선(貂蟬) : 『삼국연의』에만 등장, 허구 인물
- 딸 - 呂氏 : 정사에 이름 미기록, 원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