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2일 금요일

신흥우(申興雨, 1883-1959) 기독교인, 정치가, 교육가, 청년운동가, 호는 금하(錦霞)

신흥우(申興雨, 1883-1959) 기독교인, 정치가, 교육가, 청년운동가, 호는 금하(錦霞)



 

1883

  • 1883326(음력 218) 충북 청원군 남성면 묵정리에서 신면휴(申冕休: 세종조의 대유학자인 신숙주의 15대손)와 김씨부인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한학자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4

12세 때인 189411월 배재학당에 입학,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였다. 재학시절 서재필ㆍ윤치호 등을 스승으로 만나 개화사상을 굳혀 갔다.
 

1897

  • 15세 때인 1897년 부모의 뜻에 따라 2년 연상인 이재규(李梓奎)와 결혼하였다.
 

1898

  • 16세에 부친과의 약속을 어기고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9

  • 17세 때인 1899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1901

  • 개화와 자강을 위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좋다는 아펜젤러의 권유에 따라 1901년 관립 한성덕어(德語; 독일어) 학교에 들어가 어학공부를 하였다. 이 학교재학 시절에 학생회를 조직, 그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토요일 오후마다 토론회를 열어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의 선양에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구한국 정부로부터 유신운동을 꾀한 불순분자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1903년 초까지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는 함께 투옥된 이승만ㆍ성낙준ㆍ양의종 등과 함께 옥중학교를 개설, 동료 투옥자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1903

  • 출옥 후 곧 미국 유학에 올라 1903년 봄 미국 남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입학했다. 예과 2년을 마치고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곧 문리과대학으로 전과하였다.
 

1908

  • 유학하는 동안 19083월 친일 외교관 미국인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의 변호사 및 통역을 맡았다.
 

1910

  • 1910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1

  • 1911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이어 곧 귀국하였고 미감리회 선교부의 요청으로 19116월 모교인 배재학당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2

  • 1월에는 배재학당 최초의 한국인 학당장이 되었다.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하려 하였으나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다.)
  • 1912년부터 중앙 YMCA의 이사직에 몸담았다.
 

1914

  • 191410월부터는 잡지사인 공도사(公道社) 사장이 되어 19193월까지 인쇄업에 종사하였다.
 

1916

  • 1916년에는 배재학당의 고등보통학교로의 개편에 따라 그 교장이 되었다.
  • 1916년 배재학당을, 일제의 정책에 순응, 고등보통 학교로 개편했을 때부터 그를 친일파로 보는 일부 인사가 있었다.
 

1918

  • 1918배재학보를 창간하였다.
 

1919

  • 19195월에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미국 기독교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한국의 31운동에 관한 생생한 사실을 진술하였고 이를 석달동안에 집필, 한국의 갱생(The Rebirth of Korea)으로 출판한바, 31운동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11월 귀국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를 받았고, 또한 여러 가지 오해를 받는 등으로 배재학교의 교장직에서 권고사직 당했다.
  • 31 운동 당시의 표면적 활동이 전무함에 대해 의혹을 품는 오해도 허다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19201월 권고사직을 당하고, 9월 배재고보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1920

  • 배재학교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곧 YMCA 활동에 투신하였다.
  • 19209, 1912년부터 이사직에 몸담고 있던 중앙 YMCA의 총무로 선임된 것이다. 이때부터 농촌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 1920년 함태영, 여운형, 송진우 등과 함께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고, 7대 조선체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3

  • 한편 1923년에는 일본 YMCA에 속한 한국 YMCA를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4

  • 1924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YMCA 세계동맹에 한국 YMCA를 정식 가입시키는 데 큰 공적을 남겼다. 또한 클라크(F. C. Clark), 번스(H. C. Bunce) 등 외국의 저명한 농업전문가를 초빙하여 농촌사업을 본격화시켰고 덴마크식의 농민학교 및 협동조합을 조직, 확대해 나갔다.
  • 1924년부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농촌계몽사업 선도에 나서서 농촌의 빈궁 추방에 주력하였다.
 

1925

  • 당시 기독교가 외국의 신학적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조선의 주체적인 신학을 수립해야 한다는 조선적 기독교론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5년 이상재 등과 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를 결성하였다.
  • 1925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여 기독교 시민윤리를 홍보, 순회 강연을 하였다
 

1927

그리고 이상재를 주축으로 한 신간회에도 참가하여 민족주의 운동에도 헌신하였다. 또한 1927년 장ㆍ감 양교파의 주요 교계 지도자를 규합 기독교회 적극적인 대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적극신앙단을 조직 활약하기도 하였다.
 

1930

  • 1930년 도미하여 모교인 남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

  • 19324월 미국 여행 중 히틀러전을 읽었고, 그해 10자유와 통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배재학당 시절부터 약 30년간 지탱하였던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파시즘을 제창하였다. 사상전환의 배경에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서구 열강에 대한 회의와 흥업구락부의 침체 등이 있었다.
  • 19326월경 파시즘을 받아들인 적극신앙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적극신앙단을 결성한 것은 이승만의 측면지원단체이자 정치적 후원단체인 흥업구락부가 비기독교인도 많다는 점과, 정치적으로는 거리를 둔 순수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따로 단체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신흥우 자신의 기독교계 점령을 우려한 감리교파를 비롯한 각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1935

  • 193515년간 재직한 YMCA 총무직에서 퇴임하였다.
 

1937

  • 1937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당했다.
  •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동양화라는 미명 아래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19378월 조선신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의 거행준비회 발기인,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시국 순회 강연회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8

  • 1937년 말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389월 전향 입장을 밝히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과 일본정신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 1938년 기독교계 연합 친일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9

  • 19391월 중국지역 최전방의 일본군 위문행사를 추진하였다.
  • 19399월에는 아펜젤러(H. D. Appenzeller)의 후임으로 다시 배재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 일제 말기 극렬한 탄압 속에서는 학교를 유지키 위해 부득이 창씨개명을 했으며 몇 차례의 시국강연회에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일제에 이용당하기를 거부하여 태평양전쟁 직전에는 학교장직을 사임하고 집안에 은거하였다.
  • 1939년 친일잡지사인 동양지광사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1

  • 194110월 조선임전보국단의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 194111월 지원병 보급 설전대로 활동하였다.
 

1942

  • 19422월 동양지광사가 주최한 영미 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 19425월 징병제 실시 감사 축하대회에 참여하였다
 

1943

  • 194311매일신보에 글을 게재하여 지원병 출정을 독려하였다.
 

1944

  •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과 이사가 되었다.
 

1945

  •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침략전쟁에 대한 전폭적인 협력을 선동하였다.
 

1948

  • 해방 후 1948721일 영자신문 The Union Democrat를 창간하여 편집자겸 주필로 활약하였고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낸 피셔(J. E. Fisher) 박사를 논설위원으로, 정성채(鄭聖采)를 발행인으로 영입, 정론을 추구하였다. 이 신문은 1949년까지 속간되었다.
 

1949

  •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장에 선임되었다.
 

1950

  • 19501,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주일특명전권대사겸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파견 외교사절단장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4개월만에 직책을 사임하였다.
  • 19505월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고배를 마셨고 625사변 중인 19508월에 도미하였다.
 

1951

  • 19512월 미국에서 살 길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 19524, 다시 귀국하여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54

  • 19547월 대한 YMCA연합회 고문총무로 추대되어 다시 청년운동에 나섰다.
 

1955

  • 19551그리스도 청년의 보국운동이라는 제목으로 4개의 강령을 발표하는 등 자못 활기찬 기독청년운동의 재건을 추진해 나갔다.
 

1957

  • 이후 19577월 민주당에 입당,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자유당의 이승만에 맞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The Korea Times, 한국일보등에 계속 기고하였다. 내용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농업개발 정책의 제시 등으로 일관하였다.
 

1958

  • 그러나 1958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하였다.
 

1959

  • 1959315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 부인과의 사이에 23녀를 두었으나 31운동 전후한 시기에 3남매를 잃었고 현재는 장녀 보석(寶石, 1909년생), 차녀 보옥(寶玉, 1911년생)이 있다.
 

사후

  •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평신도 3인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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