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옥(鄭景玉, 1903~1945) 감리교 목사, 조직신학자. 호는 철마(鐵馬)
【1903년】
- 1903년 5월 24일 전남 진도군 진도면 교동리에서 정기욱과 조창예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진도 소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YMCA 영어반을 수료하고 일본 유학에 올랐다.
【1917년】
- 1917년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 1919년 3월 3·1독립 만세 시위 및 10월 동맹휴학에 참가하고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낙향하여 박종협, 박석현, 김인수 등과 항일비밀결사 ‘보향단(補鄕團)’을 결성하였다.
【1920년】
- 「학생부형제위」(學生父兄諸位), 「옥주동포제위」(沃州同胞諸位) 등 유인물을 제작하여 진도 읍내에 살포했다가 체포되어 1920년 2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6월 선고를 받았다. 목포 형무소 수감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석방 후 박석현, 박종협 등과 진도읍교회(현 진도중앙교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 1920년 허해덕과 결혼하였다(1931년 작고).
【1921년】
- 1921년 서울 기독교청년회학관에서 영어를 배운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23년】
- 도시샤(同志社) 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게되자 귀국하였다.
【1924년】
- 3월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 7월 진도 소작인회 창설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 1927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미국 유학에 올라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 있는 개럿(Garrett)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 이곳에서 당시 미국계에 대표적 신학자였던 롤(F. H. Roll)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의 스승인 롤 박사의 미국적 경험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떠 현대신학의 시조인 독일의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경험을 일단 긍정하고 리츨(A. Ritchle)의 기독교 도덕성을 함께 수용하였다. 그의 하나님 이해는 “철학의 절대보다 좀더 생명적인 것이었고 과학의 원인보다는 좀더 인격적인 것이었고 윤리학의 지고선(至高善)보다는 더욱 친밀한 분”이었다.
- 따라서 완전한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동시에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르친다”라고 보고 이 인격적인 관계란 결국 도덕적 이상의 성취, 완전한 인격적 도덕적 인간성의 성취로 보고 이런 인간의 인격적 도덕적 성취의 극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의 기독교 이해는 도덕적 인격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사회변혁을 목표로 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29년】
- 1929년 9월에 그는 다시 노오드웨스턴 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고 2년 후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1931년】
- 그는 계속 박사과정을 밟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모교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1931년부터 1937년까지 감리교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 부인 허해덕이 작고하였다.
【1932년】
- 김염의와 재혼하였다.
- 그는 1932년에 〈위기의 신학〉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바르트(Karl Barth)을 소개하였고 신학 이후로 계속 현대신학의 안테나 역할을 하여 젊은이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어 유능한 청년들을 신학도로 불러 훈련시켰다.
- 보수적 장로교 신학자들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자’란 비판을 받았지만 자신은 한국 신학의 좌표를 ‘향토화(鄕土化)’와 ‘시대화(時代化)’로 정의하고, 신학 노선에 대해 “나는 신앙에서 보수주의요, 신학에서 자유쥬의다.”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1934년】
- 그는 〈신학세계〉의 주간도 맡으면서 재직기간 중 무려 60여 편의 무게있는 신학논문을 발표하였고 저서로는 한국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설한 《기독교의 원리(1934년 간행)》를 저술하였다.
【1937년】
- 이런 그의 정력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어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그는 그의 고향 진도로 내려가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신학개론》과 《그는 이렇게 살았다》를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은 한국신학사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38년】
- 그의 유명한 설교집인 《그는 이렇게 살았다》를 1938년에 평양 애린원(愛隣院)에서 출판하였다.
【1939년】
- 1939년에 《기독교 신학개론》을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출판하였다.
- 1939년 4월부터 그는 1년간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 신학교의 교장직을 맡았다.
【1940년】
- 1940년 감리교신학교 폐교 후 북만주 사평가의 만주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 년 후 폐교되어 진도로 귀향하였다.
【1941년】
- 1941년에 다시 고향 진도로 내려와 요양하던 중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친미파(親美派) 인물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에 걸려 약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하고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43년】
- 그는 석방되면서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면서도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토, 일요일 제외) 새벽 4-6시에 자기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거의 3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쳤다.
【1945년】
- 그는 1945년 3월부터 복막염 수술을 두 차례나 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총 3,500g에 달하는 수혈도 보람없이 조국 광복 4개월을 앞두고 1945년 4월 1일 “곧 날이 밝는다”라는 확신에 찬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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