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2일 금요일

윤치호(尹致昊) 1865-1945. 감리교인, 정치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윤치호(尹致昊) 1865-1945. 감리교인, 정치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남감리회 최초의(1887) 교인. 호는 좌옹(佐翁). 윤웅렬(尹雄烈)의 장남.


 

1865

  • 18651120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이일영(李日永)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 [윤치호가 설립한 송도중학교 홈페이지에는 1965123일 출생으로 되어있다]
 

1873

  •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당시 토포사(討捕使)에 등용된 부친을 따라 9세에 상경하였다.
 

1875

  • 187511세 때부터 개화파 인사 서광범(徐光範)의 인척 김정언(金正言) 혹은 김정호(金正浩)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하였다.
 

1879

  • 1879년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 강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 강씨는 그가 출타중인 사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되었고, 임신하게 되자 그는 상심하게 되었다. 1885, 백랑 등 첩들을 정동 집으로 들이면서 본부인 강씨는 본가로 되돌려보냈다. 친정으로 돌려보낸 강씨 부인은 이듬해 사망한다.
 

1881

  • 그의 부친의 배려에 의해 1881년 봄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에 유학, 나카무라(中村正直, 1832-91)가 설립, 운영하던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닦았으며 뒤에 후쿠자와(福澤諭吉)의 훈도를 받았고 자습으로 영어공부에도 힘썼다.
  •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 도쿄제국 대학 철학과 교수의 부인 밀레트(L. G. Millet) 여사와 도쿄제국 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교사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1882

  • 1882년 김옥균의 권고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를 다시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당시 조선인 중 간단한 회화라도 할 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이었다.
 

1883

  • 18831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 씨에게 영어를 배웠다.
  • 그 결과로 1883년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주선으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초대 주한미국 특명전권대사 푸트(Lucius H. Foote; 福德)의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그해 4월에 그와 함게 귀국, 약관 19세의 나이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에 통역으로 활약하였으며 곧 통리기무아문 준사가 되어 주한 미국공사관의 통역관으로 재직했다.
 

1884

  • 1884118일부터 89일까지 윤치호는 거듭하여 사관학교 설립을 상주한다. 윤치호는 군대 통솔권의 일원화 군인정신의 합일, 상무정신의 강화를 통하여 충성스럽고 용감한 국방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 18847월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신식 병원과 전화국을 유치, 개설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신식 병원 도입과 전화국 개통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전면 백지화된다.
 

1885

  •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던 부친이 유배당하자 윤치호는 18851월에 상해로 망명 겸 유학의 길을 떠났는데, 이때 그는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비로소 버리를 깎고 양복을 착용하였으며 푸트의 소개장과 상해 주재 미국 총영사 스탈(Sthal)의 주선으로 미남감리회에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Chinese College)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1227, 그는 해외로 나갈 뜻을 건의했고 1885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119일 출국한다. 이때 척족 대신들은 그가 유학을 빙자하여 도피하려 한다고 탄핵했으나 고종의 특별 배려로 출국할 수 있었다.
 

1886

  • 1879년에 결혼한 본국의 부인 강씨가 1886년 사망하였다.
 

1887

  • 중서서원에 재학중인 188743일 지도교사 본넬(W. B. Bonnel)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남감리회 교인이 되었다.
 

1888

  • 188810월 중서서원을 졸업한 후 다시 미국에 유학, 밴더필드신학교에서 2년동안 수학하였다.
  • 1888928, 상해를 출발하여 114, 미국 테네시 주의 내시빌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도쿄를 경유하여 박영효, 김옥균을 만났다.
  • 그는 곧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 선교를 위해 1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 조지아 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
  • 이때 그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 내심 미국의 민주주의, 청교도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 한 만큼 받는다는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차별대우를 보고 그는 분개했다.
 

1890

  • 18909월 에모리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남부지역 순회강연을 통하여 한국을 소개하는 한편 남장로교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3

  • 그는 순회강연 중 모금된 200달러를 18933월 에모리대학 총장 캔들러(W. A. Candler)에게 위탁, 한국 젊은이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가을 그는 다시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모교인 중서서원에서 영문법을 강의하였다.
  •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 중 손꼽히는 미국내 대학 졸업생의 한사람이었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남감리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배편으로 귀국한다.
  • 189311,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로 건너간 윤치호는 189311월에 모교인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고, 그가 조선으로 귀국할 때까지 중서서원에서 영어, 영문학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4

  • 18943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 등 일행을 맞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
  • 다음날 328,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 18944월에 알렌 교장의 주선으로 미국 맥티어여학교를 졸업한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2녀가 태어났다.
 

1895

  •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집권하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능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의 부친이 경무사에 복직되니 18952월 윤치호는 부인과 함게 귀국, 낙현동에 주거지를 정하고 의정부 참의로 취임하였고 5월에 학무협판, 7월에 외무협판, 10월에 학부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 1895213, 그는 귀국 즉시 자신의 노비들을 석방시켰다. 그 때, 윤치호의 가족들은 그의 전도를 받고 즉시 대대로 내려온 신주단지를 불태우고 종문서를 불태웠다.[42] 이로서 한국에서 종문서를 제일 먼저 불태운 가문이 되었다.
  • 또한 윤치호는 캔들러 및 알렌(Y. J. Allen; 林樂知)에게 속히 남감리회가 한국선교에 착수하도록 간청하여 을미사변(1895.10) 직후에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이 선교사 리드(C. F. Reid; 李德) 목사를 대동하고 내한하였으며 윤치호는 사재를 털어 남감리회 선교기지를 개성에 마련하도록 후원하였다.
 

1896

  • 한때 춘생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18962월 친러세력에 의하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면서 아관파천으로 풀려나 학부협판에 복직되고 대신서리를 겸했다.
  • 그리하여 18975월 경기도 고양읍에 한옥을 마련하여 고양읍교회를 창설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해 6월에는 리드의 집에서 광희문교회 창설예배를 주도하였다.
  • 한편 특명전권 공사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임명되어(1896) 러시아 니콜라에 2세 대관식에 참석한 후 3개월 동안 모스크바ㆍ페테르스부스크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그해 8월 하순에는 전권공사 일행과 헤어져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어 공부를 마친 뒤 1897년 초에 귀국했다.
  • 1896년 귀국하는 길에 베트남을 경유하여 귀국, 이때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의 문물과 청결성을 보고 감탄, 충격을 받았다.
 

1897

  •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
 

1898

  • 18982월 중추원 부의장에 취임하였으며 겸하여 독립협회 부회장에 추대되었다가 다시 회장에 올랐고 서재필이 강제출국당한 뒤 독립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그해 10월에는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정부대신 이하 시민이 모여 만민공동회의를 개최 자유민권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윤치호 암살 명령이 내려졌으며 이상재ㆍ남궁억ㆍ방한덕 등 17명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윤치호는 정동 구세병권 커틀러(Cutler)의 집에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고 한때 정부의 회유책에 말려들어 한성부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12월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려짐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899

  • 1월 중추원 부의장직을 사퇴
  • 2월 덕원 감리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1903

  • 19031,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그 해 7월엔 천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잡아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쳐서 횡포를 막았다.
 

1904

  • 1904(광무 7) 215,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12,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3, 윤치호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
  • 1904315,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어 그해 4월까지 일본측의 특파대사를 면담하였다. 그해 820일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면서 그는 외무부대신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 1904년 외무협판이 되어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1905

  • 1905년 을사조약에 체결된 후 관계를 떠나 선교사업과 교육사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 그는 1905년부터 YMCA 이사로 활약하였다.
  • 1905(광무 8) 214, 재혼한 아내 마수진이 아이를 낳다가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평소에 중국과 중국인들을 경멸,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만큼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 19054, 어머니 전주 이씨의 권유로 남포 백씨 백동명의 딸 백매려와 중매로 재혼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41세였고 백매려는 16세였다.
  • 190511,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윤치호는 관직을 사퇴했으며 정부로부터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고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들에게 증오감을 줄 것 외에 외무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하여 취임을 거부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곧 독립권의 상실로 인식했다.
  • 이어 윤치호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을 파면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결국 어쩌지도 못하는 황제를 보고 그는 꼭두각시라고 보고 경멸하게 된다.
 

1906

  •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지속하였으며 19063,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였고, 회장에 선출되어 지도하기도 했다.
  • 190654,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15, 그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 190610, 그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에 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당해 12,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 1906년에 YMCA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7

  • 1907, 그는 안창호(安昌浩)ㆍ양기탁(梁起鐸)ㆍ이동휘(李東輝)ㆍ전덕기ㆍ김구 등의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에서 윤치호는 회장, 안창호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밖에 양기탁ㆍ전덕기ㆍ이동휘ㆍ이갑ㆍ이승훈과 같은 언론인ㆍ군인ㆍ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08

  • 대성학교 교장 취임
 

1910

  • 10월 한일병합 직후, 윤치호 자신의 품계가 당시 정2품이었으므로 남작직을 수여받았으나 거절하다.
 

1911

  • 1911기독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교직을 떠났다.
  • 1911922, 아버지 윤웅렬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남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
 

1913

  • 그는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1913) 이후에 친일적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으며 이때 매일신보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친일을 공언하였다.
 

1914

  • 총독부에서 천황 명의로 목배를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1916

  •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YMCA 총무가 되어 모든 실무를 진두지휘하였다.
 

1918

  • 191811, 양기탁이 중국 천진(天津)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양기탁에게 벽돌을 발로 걷어찰 필요가 없으며 담벼락을 머리로 들이받을 필요는 없다. 대화도 통할 인간하고 대화를 하는 법이라며 얼마나 바보스러우냐며 조롱하였다. 191812, 양기탁이 상하이에서 한반도로 압송,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居金島)2년간 유배형에 처해졌다. 양기탁이 거금도에 유폐되자 바로 그를 찾아 면회를 다녀왔다.
 

1919

  • 19193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 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1921

  • 19211,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윤치호는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 192110월에는 이상재, 이승훈, 박승봉, 유성준 등 기독교인 유지들과 함께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를 설립하고, 잡지 신생명을 통하여 문서로 한글 보급에 나섰다.
  • 미국에 가서 외교 활동을 하라는 이상재, 이승만, 서재필 등의 권고를 거절하다.
 

1922

  • 1922년 한영서원의 후신인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으로 취임, 1925년까지 봉직하였다.
 

1923

  • 19236월 이후 산사에서 벌인 박중양의 휴양, 유흥행위를 비난하던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 감싸주었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 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비난하면서 박중양이 압력을 행사했는데, 이 때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설득하여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하였다.
  • 19237,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1924

  • 1924,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부교장인 임두화(林斗華), 일본인 교사인 이노우에(井上), 마루키(丸木), 다까마츠(高松)에 대한 불만이 폭발, 그 해 6월부터 교감과 세 일본인 교사를 축출해달라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시위가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며 기숙사에 재학 중인 시위참여 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내쫓았고, 동맹휴학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생활비를 댄다고 모금 운동을 하다가 시위에 동참했다. 일본인 교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시위는 송도고보 2학년생들이 시작하였으나 5학년생들도 동참하고 이어 전교생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확대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반일시위로 의심했고, 19249, 윤치호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되 기숙사에서 추방당한 학생들은 모두 복귀시키고 학생들에게 일체 징계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켰다. 9월 말, 총독부 학무국에 불려가 교사의 훈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항심리라며 총독부 당국을 설득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1926

  • 19267, 광주에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총독부에서 그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자들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는 바로 풀려났다.
 

1927

  • 1927,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상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해에 이상재와 최병헌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호는 이를 애도했고, 그의 몇안되는 지인이 사라지면서 고독과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 1927,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송진우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실패한 김성수는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기도한다. 김성수는 신간회의 조병옥, 허헌, 김병로, 이인 등을 통해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김성수측은 신간회의 세력 확대에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2712,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에 작용하였고, 박영효와 함께 192712, 민족개량주의의 대부인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옹립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28년 초에는 송진우가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
  • 한편 윤치호는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면서도 별도의 조직을 결성한다. 윤치호는 박희도와 함께 별도로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였다. 윤치호, 박희도 등은 신우회를 표현단체로 하여 각파 합동전선을 전개하였다. 윤치호와 박희도는 신우회를 중심으로 내분에 휩싸인 신간회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흡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30

  • 1930년 모교인 에모리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30년 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1931

  • 1931, 친일 단체인 토요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진우는 그가 토요회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해 주었다. 송진우와의 언쟁 끝에 송진우는 그를 변절한 소인배라며 질타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송진우 같은 이는 내가 토요회와 같은 모임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나도 그런 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1932

  • 1932, 일제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봉길, 이봉창 사건으로 이반된 한국인의 민심을 끌어들이려는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1933

  • 1933, 그는 예종석의 대아세아 운동과 1934, 동아민족문화협회의 대아세아 운동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1934, 최남선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자, 그가 일본의 국수주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결국 19343,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에 가입했다.
 

1938

  • 1938년 초,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중이라고 연락이 왔으나 그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19386,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경성부에서 결성되었으나 불참했다. 이때 그는 내가 회장으로 지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후에도 직책을 맡게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하였다.
  •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ㆍ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1938318, 공익에 기여한 이에게 상훈을 수여할 때 그에게 포장(褒狀)이 수여되었지만 역시 불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하며 기록해 놓았고, 그 해 5,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429,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1941

  • 19412, 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언더우드 2세 교장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반일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연전 이사회는 재단 이사의 한 사람인 그를 천거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는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실정을 동정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명사 대우를 하는 터이므로 학교를 지키는데 다시 없는 적임자로 보여 이사회가 천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총독부가 연전을 빼앗기 위해 그 다리로 그를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윤치호는 거부하였지만 이사회의 무기명 투표 결과 윤치호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5

  • 19452,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같은해 2,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동해 4, 박춘금을 위원장으로 앉히면서 그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 815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로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가 그해 126일 별세하였다.
 

1950

  • 1950625 사변 이후 인천에 그를 기념하여 송도중ㆍ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76

  • 1976103일 송도중ㆍ고등학교 창립 70주년을 맞아 윤치호 동상이 제막되었다.
 

자녀들

  • 그는 슬하에 모두 12남매를 두었다.
  • 장남 영선(永善)은 광복 후 제3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 차남 광선(光善)은 어장을 경영하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었다.
  • 장녀 봉희(鳳姬)와 차녀 용희(龍姬)에 이어 백부인이 낳은 3남 장선(璋善, 1922년생)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참사관을 지낸 후 사업
  • 4남 기선(琦善, 1923년생)은 피아니스트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재직
  • 5녀 관희(寬姬, 1924년생, 玄永學과 결혼)는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
 

2002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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