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5일 월요일

이용도(李龍道, 1901-1933) :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부흥사. 호는 시무언(是無言).

이용도(李龍道, 1901-1933) :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부흥사. 호는 시무언(是無言).

 

1901

  • 19014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李德興)과 양마리아의 41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 시변리교회 전도부인으로 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915

  • 시변리에 있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5세 때 개성 한영서원(후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하였다.
 

1919

  • 64, 송봉애와 결혼하였다.
 

1920

  • 한영서원 재학중에 31운동에 가담, 2개월간 옥고를 치르었고 다시 1년도 못되어 19202월 기원절(紀元節)의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을 개성 감옥에 구금되었다.
  • 1020, 아들 영철 출생하다.
  • 11월 조선독립주비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21

  • 출옥후 고향인 시변리의 영신(永信)학교에서 얼마간 교사로 봉직하다가 1921년 성탄절에 다시 불온문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 11월 워싱턴 군비감축회의에 맞추어 동맹 휴교(同盟休校)를 주도하고 체포되어 19211226일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1922

  • 출옥후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복학하였으나 1922년 가을 재차 태평양회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2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3

  • 19238월 이처럼 전후 4차례에 걸쳐 모두 3년여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24

  • 개성 한영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1924년에 졸업하였다.
  •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 왓슨(A. W. Wasson; 王永德) 선교사는 이 독립군을 목사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를 서울의 협성신학교에 추천하여 보냈다.
  • 신학교 재학 중 아이생활춘풍, 공주와 꽃 팔이등 아동 가극을 발표하였다.
  • 1924년 봄 그는 협성신학교 영문예과에 입학하였고 재학시절 이환신(李桓信)ㆍ이호빈(李浩彬) 등과 특히 가까이 지내며 형제애를 나누었고 송창근(宋昌根)이 미국 유학 경비가 모자라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집 전세금 250원과 입던 양복을 그에게 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1925

  • 11, 폐병3기 진단, 이환신의 고향 평안남도 강동지역 교회에서 눈물로 집회인도하여 감동체험
 

1927

  • 317, 딸 영숙 사망
  • 4월 가극 춘풍발표(아이생활, 19274월호)
  • 5월 가극 공주와 꽃팔이발표(아이생활, 19275-6월호)
  • 12월 협성신학교 연극 십자가를 지는 이들각본, 주연 출연
 

1928

  • 19281월 신학교를 졸업(14)하였고 즉시 강원도 통천(通川)읍교회에 파송받아 부임하였다. 부임후 1년 가까이 그의 목회생활은 평범한 것이었다.
  • 11월 성극 애굽의 이스라엘발표(아이생활, 192811월호)
  • 12월 성극 믿음으로 사는 화공발표(아이생활, 192812월호)
  • 그러나 교회 청년 박재봉(朴在奉)의 열렬한 기도와 신앙생활에 자극을 받아 산기도와 금식기도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여 19281224일 새벽 통천교회에서 기도중 환상 중에 악마를 추방하는 성령체험을 하였다.
  • 1229일 온정리교회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 체험
 

1929

  • 192914일 양양교회에서 역시 유사한 체험을 한 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50-60명에 불과하던 통천교회가 150-60명으로 늘어났고 그의 설교에 감화력이 넘쳐 부흥사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통천 인근지역 교회에서 부흥회를 초빙을 받아 가는 곳마다 20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많은 심령이 새로워지는 부흥운동이 전개되어 크게 명성을 떨치었다.
 

1930

  • 특히 1930년 새해 벽두에는 멀리 인천 앞 덕적도로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될 때 일본 유학 중 귀향한 사회주의자 김광우란 청년이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감리교신학교에 편입하여 19373월 동신학교를 졸업한 뒤 감리교계의 중진목사가 되게 하였다. 1930226일부터 39일까지 평양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그 집회에서 주의 권능이 크게 역사하였다.
  • 19302월 평양 중앙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집회를 계기로 서문밖교회의 기도동지들이 모여 평양기도단을 결성했는데 그 중심 인물은 김예진ㆍ김익선ㆍ김지영ㆍ김영선ㆍ김용진ㆍ이도근ㆍ박윤선ㆍ김인서ㆍ이정심ㆍ이종현ㆍ김교순 등이었다.
  • 1930928일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0월에 주일학교 연합회 간사로 보직을 받고 통천읍교회를 떠나 상경하였다.
  • 1125일 남북감리교 감독, 도미유학 주선 약속
 

1931

  • 19311월 영동강습회에 이어 서울에서 교사강습회에 강사로 활동하였으나 오히려 부흥강사로 분주하게 활동하게 되자 특별파송을 받아 순회부흥사로 신앙부흥운동에 헌신하였다. (19일 걸아 최억성 만남)
  • 1931년도 부흥집회를 보면 평양중앙교회를 비롯하여 재령동부와 서부교회, 경남 거창, 만주 간도(용정), 평양 남문외교회, 함흥영무, 황해도 은률, 선천남부, 서울 아현, 경남 통영, 사천(泗川), 충북 진천, 서울 삼청 중앙전도관, 인천 내리, 개성남부, 강원도 화천, 평양 명촌과 산정현교회 등에서 전국 가는 곳마다 크게 교회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부흥운동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황해도 재령교회에서 크게 역사하였으나 황해노회에서 문제가 제기되어 이용도 목사는 재령교회 훼방, 여신도와의 서신거래, 소등(消燈) 기도, 교역자 공격, 무교회주의자라는 등 여러가지 조건을 들어 금족령을 내렸다.
  • 720일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만남
  • 726일 이용도 목사 초청으로 김교신 광화문교회 강도
  • 9월 삼방약수터 요양 중 원산수도자들과 집회
  • 102일 아현성결교회 집회 인도중 추방당함
 

1932

  • 그러는 중에서도 1932년도 한해동안 그가 부흥집회를 연 교회는 동대문, 인천 내리, 서울 자교, 연화봉, 서울 상동ㆍ도화동, 강원도 양구, 인천 내리, 서울 용두동ㆍ신설동 체부동, 평양 명촌, 신암, 평남 한포, 충남 당진, 서울 광희문, 평남 안주, 운산 북진, 해주 남본정, 서울 자교, 황해도 신계, 양주 월계리, 서울 중앙전도관 등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도시와 시골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길은 꺼질 사이없이 두루 퍼졌다.
  • 당시 신앙생활의 주필인 김인서(金麟瑞)이용도 목사의 부흥식이라면 식이고, 파격이라면 파격이겠다. 보기에는 갈대같이 약한 이가 장단에서는 사자같이 강하다. 이목사의 기도란 영에 읊어지는 시편이거나 하늘에 닿는 긴 호소이오 그의 설교란 생명에 떨리는 핏방울이거나 진리가 흐르는 청계수의 한폭이다. 복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보다 예수의 정체에, 교리보다 영에, 신학보다 진리에, 의식보다 체험자체 등을 이목사가 강조한 점이다.”라고 평하였다.
  • 그러나 당시의 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그의 이같은 신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용도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 무절제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학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호기심과 경탄의 눈초리로 그의 부흥집회를 지켜보던 한국교회는 그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심판자로 서게 되었다. 장로교의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禁足令)을 내렸고 1932년 평양노회는 1) 타교파의 강사를 집회에 청할 때에는 규정된 수속을 취할 것, 2) 조용히 기도하고 떠들지 말 것, 3) 무인가 단체를 해산할 것 등 다분히 이용도 및 평양기도단을 염두에 둔 결의를 결정하였다. 게다가 기독신보사설은 그를 이세벨의 무리로 정죄하고 나섰다.
  • 11월 한준명 사건으로 평양압류 사건
  • 1128일 평양노회 임시노회 한준명, 백남주 치리 결의
 

1933

  • 1933년 음력 정월초 사경회가 평양 신양리교회에서 개회되어 2,000여 명씩 10일동안 모여 피와 땀을 쏟을 정도의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해 봄 안주집회, 곧이어 222일부터 해주남본정교회에서 공적인 부흥집회로는 마지막으로 부흥회 집회인도를 하였다.
  • 그의 부흥회 주제는 회개, 기도, 사랑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인과 교회의 회개를 촉구했고 특히 1930년대 정체현상에 있던 조선교회의 각성을 외쳤다.
    “신조에, 조직에, 언론에, 그 무엇에 선구자보다 회개운동의 선구자가 조선에 필요하다. 갱생을 초래하는 회개, 신생적 회개운동이 없어 다른 모든 운동은 의미가 없다. 미구에 쓸어질터인고로! 그래서 교계의 선구자라는 완전한 신생자라야 한다. 죄에서 죽고 의에서 난 자라야 한다.”
  • 형식화한 기성교회에 대한 회개 촉구는 나중에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오인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는 곳마다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평양기도단이다.
  • 장로교인 대부분인 이 평양기도단은 후에 장로교에서 정죄를 받았지만 1907년 대부흥 이후 평양에 기도운동을 재재하여 신앙의 활기를 되찾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그 공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외치고 그대로 살려고 했던 말씀은 사랑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아닌 철저한 이타적 사랑이었다. 말년에 그가 한준명(韓俊明) 사건에 연루되어 교계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을 그 순간에도 자기 변명보다는 사랑으로 이를 자기 속에 용해시키려 하였다.
    “나는 신앙 태도에 다소간 다른 점이 있는 H는 고사하고 도적이나 음부나 살인강도라고 하더라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죽기를 원하고 힘쓰는 자입니다. 만일 여러분 보시기에 양해 못할 점이 있든가 용인 못할 것이 있거든 버리던가 내쫓던가 하십시오. 나는 나의 원하는 바는 세상이 버린 사람, 세상에서 쫓겨나거나 몰리워나는 사람은 받아 그를 거두어 손을 잡고 울며 살려고 합니다. 내쫓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요 임무일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쫓기우는 자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 장로교 총회는 19339한준명ㆍ이호빈ㆍ백남주ㆍ이용도 및 황국주 등을 이단으로 인정한다고 결의하였다. 이처럼 타교단에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이단시비를 들고 나옴에 따라 감리교회에서도 그가 속한 경성지방회 교역자회의는 그를 소환하여 오랜 시간 증언을 청취하였으며 19333월 중부연회는 그에게 파문이 아닌 휴직처분을 내렸다.
  • 이후 19336월 평양 신양리에서 예수교회가 창설될 때 그는 초대 선도감(宣道監)으로 선출되어 공식적으로는 예수교회의 창설자가 된다. 결국 이것이 게기가 되어 전에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김인서는 그를 혹독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 이같은 소란 속에 그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고생하다가 1933102일 원산에서 가족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평소 그의 말대로 가늘고 길게 사느니보다는 굵고 짧게 산인생이었으며 그의 일생은 193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었고 정체화되어가는 교회에 회개와 기도와 사랑을 선포한 광야의 소리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 그의 사후 변종호(邊宗浩) 목사 편집으로 이용도목사서간집(1934), 이용도목사전(1958), 이용도목사의 일기, 이용도 목사연구 40, 이용도목사저술집(1975), 용도신학, 용도목사사모50등이 출판되었고 그가 쓴 글들이 예수지에 수록되었다.
  • 1995815일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 199810월 기독교대감리회 총회, 19993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에서 이용도 목사 복권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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