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10대 질제 유찬(質帝 劉纘, AD. 138/144~146년) : 재위 : AD. 145~146년
【기원후 138/144년】
- 유찬(劉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그는 후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 또는 증손자이다.
- 출생 연도에 대한 이견 :
기원후 138년에 태어나서, 8세에 즉위, 9세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후 144년에 태어나서, 1세에 즉위, 2세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 부친에 대한 이견:
패서원왕(沛西原王) 유개(劉開)의 아들이자 후한 순제(順帝)의 조카로 기록한다.
발해효왕(勃海孝王) 유홍(劉鴻)의 아들로, 그의 혈통은 ‘장제(증조부) → 청하효왕 유경(할아버지) → 발해효왕 유홍(아버지) → 유찬(질제)’로 이어진다. 이 경우 순제 유보(안제의 아들, 안제는 청하효왕 유경의 아들)와는 먼 친척 관계이며 ‘조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후 145년】
- 충제(沖帝) 유병(劉炳)이 아들 없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외척 양기(梁冀)가 황제를 옹립하기 위해 유력 황족 후보들을 검토했다.
- 나이 많고 덕망 있었던 유산(劉蒜) 등을 배제하고, 나이가 가장 어려 통제하기 쉬웠던 유찬을 선택하여 황제에 즉위시켰다.
- 기원후 145년 2월 16일, 1세 또는 8세의 나이로 후한의 10대 황제로 즉위했다.
- 재위 기간은 기원후 145년 2월 16일부터 기원후 146년 7월 26일까지이다.
- 어린 황제였으므로, 양기(梁冀)의 누나이자 충제의 양어머니였던 양태후(梁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기원후 145~146년】
- 이 시기의 연호는 본초(本初)였다.
- 유찬은 비록 어렸지만 총명했고, 조정에서 권력을 전횡하는 대장군 양기에게 공개적으로 “발호장군(跋扈將軍, 오만하고 날뛰는 장군)”이라고 부르며 질책했다. (8세에 즉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발언은 양기의 분노를 샀고, 양기는 이 어린 황제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다.
【기원후 146년】
- 7월 26일, 양기(梁冀)의 독살로 인해 사망했다.
- 사망 당시 2세 또는 9세였다.
- 양기는 질제의 사망을 계기로 황실 내의 모든 유력자를 배제하고, 자신이 통제하기 쉬운 인물인 유지(劉志)를 황제(후한 환제)로 옹립했다.
- 그의 능은 낙양(洛陽) 인근의 정릉(靜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찬(劉纘)
- 묘호 : 없음
- 시호 : 효질황제(孝質皇帝) : 질제(質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후 138년 (또는 기원후 144년)
- 출생지 : (명확한 기록 없음, 발해효왕의 왕국 내)
- 사망 : 기원후 146년 7월 26일 (향년 2세 또는 9세)
- 사망지 : (낙양 궁궐 내로 추정)
- 부친 : 패서원왕(沛西原王) 유개(劉開) / 발해효왕(勃海孝王) 유홍(劉鴻)
- 모친 : (명시된 기록 없음)
- 배우자 : 없음 (어린 나이에 사망)
- 자녀 : 없음 (어린 나이에 사망)
- 재위 : 기원후 145년 2월 16일 ~ 기원후 146년 7월 26일 (1년 162일)
- 전임 : 후한 충제(沖帝) 유병(劉炳)
- 후임 : 후한 환제(桓帝) 유지(劉志)
- 후한 질제 유찬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총명함을 보였으나, 권력을 전횡하는 외척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은 후한 말기 외척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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