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金英珠, 1899-1950, 납북) 장로교 목사. 호는 해암(海巖)
【1899년】
-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 보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누나의 영향에 의해 개종하였다.
- 김영주가 자란 교회 배경은 함경북도인데 함경도는 처음 그리어슨(R. G. Grierson)이나 로브(A. F. Robb) 및 영(Young)과 같은 보수신학자들에 의해서 그 기초가 다져지기도 하였지만 1925년 캐나다의 연합기독교회가 성립되고 스코트(W. M. Scott; 徐高道)나 맥도널드(D. A. McDonald; 梅道那) 및 바커(A. H. Barker; 朴傑)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선교사들이 대거 파견되면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지도력은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장로교회에 그대로 잔류하려고 한 로브나 영은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동시에 선교지역 규정 때문에 이들이 함경도 선교지역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인 목사들 중 일부도 이러한 변화 때문에 이동이 있었다. 가령 장도원(張道元)은 일본으로 갔고 이원균(李元均)은 그리스도교회로, 그리고 한기춘(韓基春)은 동아기독교회로 각각 옮겨가야만 했다. 함경도는 자유주의 신학이 배양되는 어쩔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여기서 김영주의 신앙이 구형(構形)된 것이다.
【1932년】
- 신학에 뜻을 품고 일본의 간사이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 입학하는 한편, 오사카(大阪)에서 교포들이 모이는 북부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1932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할 때까지 계속 시무하였다.
- 1932년 일본의 간사이(關西)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그는 함북노회에서 잠시 교역하였다.
- 간사이학원의 신학교육은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1933년】
- 1933년 봄 서울 남문밖교회, 곧 현재의 남대문교회에서 그해 6월부터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2월 강도사인허를 받았다.
【1934년】
- 남문밖교회의 목사로 위임 청원을 받은 것은 1934년 6월의 일이었고, 그곳에서 목회하면서 곧 문제의 ‘창세기 모세저작설 부인사건’을 일으켰다.
- 김영주가 자란 배경인 함경도의 자유주의 신학적 풍토와 함께 간사이학원의 신학교육도 역시 자유주의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이 문제는 그해 9월 7일에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문제시되어 강병주 목사의 건의로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女權問題)와 함께 총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총회의 조사 연구위원은 선교사 로버츠(S. L. Roberts; 羅富悅), 불(W. F. Bull; 富緯廉)을 비롯 윤하영ㆍ박형룡 등이었다. 이들 연구위원들은 김영주ㆍ김춘배 두 목사의 이단여부에 관해 조사하고 1935년의 총회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5년】
- 총회 조사연구위원회는 수차에 걸친 진지한 연구 토의 끝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1935년 9월에 모인 제24회 장로회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총회는 이 원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 보고서는 대개 크게 두 부분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 그 첫부분은 창세기 모세저작설에 대한 본문입증(立證)과 정통 성경학자들의 변증을 소개하였고, 둘째 부분에서는 성서의 권위와 교권의 권위,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에 의한 정죄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두 부분이 논리적으로 보수 정통신학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다. 우선 이 보고서는, “교회는 복음을 처음 받은 때로부터의 신앙보존이 사명이라 전제하고, 성서가 신앙과 본문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믿는 데 주저가 없어야하고 아울러 교역자는 이러한 확신의 교훈과 설교가 본분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교역자는 오경(五經) 전부 내지는 성서 대부분을 파괴하는 사람이고, 오경이나 구약 및 예수의 증거, 신약 여러 책의 증거를 거짓말로 인정함으로써,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고 능욕하는 자라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조(聖書無誤說)를 믿는 장로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들 연구위원회는 다시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에 대한 경계를 진언하였다.
- 그것에 의하면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試取問答)을 할 때, 성경비판과 성서 해석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에 물든 자는 임직(任職)을 거절해야 하고 이미 임직된 자는 권징조례(勸徵條例)에 의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김영주는 결국 총회의 지시에 따라야 했고, 그 입장의 취소성명을 발표하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1934년부터 한국 장로교회는 계속 아빙돈단권성경주석문제, 적극신앙단문제, 경중노회(京中老會) 문제, 〈기독신보〉 문제 등으로 자유주의의 침투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고 또 이용도(李龍道)계 신비신령주의자들에 대한 징계 등 시련과 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곧 이어서 신사참배 문제의 강압에 시달려야 했다. 김영주의 이 사건은 한국 교회사의 한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1939년】
- 김영주는 1939년 3월에 조직된 경성노회내 일부 인사의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에 참여했다. 평양신학교가 1938년 9월 신사참배 때문에 무기휴학을 선언하자 신학교육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차재명ㆍ김대현과 협력하여 이 일에 전력을 쏟았고 그 결과 1939년 4월 인사동의 승동교회에서 함태영ㆍ김재준ㆍ윤인구 등으로 교수진을 구성하고 한국인에 의한 한국신학교육의 수행을 기치로 삼아 조선신학교가 출범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다. 김영주의 이 조선신학교 관련은 그의 신학사상의 다른 한 연장형태였다.
【1943년】
- 1943년 3월 일제의 어용기구로 출발한 조선혁신교단을 해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4년】
- 1941년 일제는 미국의 선교사들을 첩보원으로 몰아 강제 추방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는 문짝에 대못을 박아 폐쇄했다. 보수파 장로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버리고 가옥으로 가거나 해외로 망명해 버리고 새문안교회도 폐쇄 위기에 처하자 김영주는 1944년 첫 주일부터 새문안교회의 목사로 위임되었다. 전직자 차재명과 박화선을 이은 한국 모교회(母敎會)의 담임이었다. 일제말기의 핍박 속에서도 새문안교회는 김영주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만 목회가 지탱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성이 넓고 결단력과 사고력을 겸비한 목사로 난시(亂時)의 슬기로운 목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
【1945년】
- 해방후 그는 새문안교회당을 개방해서 교파 통일을 계속하기 위한 장로ㆍ감리교의 협의회 그리고 초교파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 제공하였다.
- 9월에는 남부대회를 소집케 하였다. 그러나 감리교ㆍ장로교에서 모두 자파 환원을 강력히 주장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 8ㆍ15광복 후 12월에 상해임시정부 요인의 환영예배를 주관하였으며, 미군정시대에 서울시 행정의 고문격인 참사(參事)로 있었다.
【1950년】
- 그러나 교회재건이 마무리될 즈음 6ㆍ25사변이 발발하였고, 그해 8월 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1가 43 자택에서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한 후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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