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12대 영제 유굉(靈帝 劉宏, AD. 156~189년) : 재위 AD. 168~189년
【기원후 156년】
- 유굉(劉宏)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정확한 탄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 그는 후한 장제(章帝)의 현손(玄孫)이자 하간효왕(河間孝王) 유개(劉開)의 증손자이다.
- 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劉萇)이고, 어머니는 동부인(董夫人)이다.
【기원후 168년】
- 환제(桓帝) 유지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황태후 두씨(竇氏, 두묘 竇妙)는 조카인 대장군 두무(竇武)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독정후 유굉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 2월 17일(양력), 1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여 후한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 연호는 건녕(建寧)을 사용했다.
- 재위 기간은 기원후 168년부터 기원후 189년까지이다.
- 즉위 초기에는 두태후(竇太后)가 수렴청정하고, 그의 아버지 두무가 대장군으로서 국정을 장악했다.
- 두무(竇武)는 환관을 숙청하여 황실의 재정을 보충하고 조정을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환관들은 미리 기회를 잡고 영제를 설득하여 두무와 두씨 일족을 숙청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환관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고, 정중하게 조언하는 대신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영제는 환관들을 마치 부모처럼 대했고, 특히 조충(曹忠)과 장양(張讓) 등 ‘십상시(十常侍)’로 불리는 환관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영제의 통치】
- 당고의 화(黨錮之禍) 재발 : 환관의 전횡에 비판적인 유학자들과 대신들에 대해 다시금 대규모 숙청(기원후 169년)을 단행하여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환관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 매관매직(賣官賣職)과 재정 파탄 : 영제는 조정의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아 매관매직을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부패가 만연했으며, 능력 있는 관리 대신 뇌물로 관직을 산 자들이 득세했다. 황제가 직접 서원조(西園助)라는 상인 집단을 만들어 이익을 독점하기도 했다.
- 사치와 향락 :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영제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으며, 궁녀들과 희롱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스스로 ‘만국정부(萬國政父)’라고 칭하기도 했다.
- 군정 장교단(西園八校尉) 설립 : 말기에는 환관들을 비롯한 측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중앙 직할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 자연재해와 농민 봉기 : 영제 치세 동안 지진,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이는 민심 이반을 가속화했다.
【기원후 172년】
- 두 번째 연호는 희평(熹平)이다(기원후 172년 ~ 178년).
【기원후 178년】
- 세 번째 연호는 광화(光和)이다(기원후 178년 ~ 184년).
【기원후 184년】
- 네 번째이자 마지막 연호는 중평(中平)이다(기원후 184년 ~ 189년).
- 황건적의 난(黃巾之亂) 발발 : 장각(張角)이 이끄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후한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 영제는 비록 황건적의 난을 진압했지만, 지방 군벌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원후 189년】
- 5월 13일, 34세의 나이로 덕양전(德陽殿)에서 사망했다.
- 두 명의 아들 중 후한 소제(少帝) 유변(劉辯)이 황제에 즉위했지만, 그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何進)과 환관들의 권력 투쟁 속에서 곧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 능은 낙양(洛陽) 인근의 문릉(文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굉(劉宏)
- 묘호 : 없음 (후에 헌제가 ‘예종 睿宗’이라는 묘호를 추증했으나 공식화되지 않음)
- 시호 : 효령황제(孝靈皇帝) : 영제 (靈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후 156년
- 출생지 : (명확한 기록 없음)
- 사망 : 기원후 189년 5월 13일 (향년 34세, 또는 33세)
- 사망지 : (낙양 궁궐 내 덕양전으로 추정)
- 재위 : 기원후 168년 2월 17일 ~ 기원후 189년 5월 13일 (21년 85일)
- 전임 : 후한 환제(桓帝) 유지(劉志)
- 후임 : 후한 소제(少帝) 유변(劉辯)
- 후한 영제 유굉의 치세는 외척과 환관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과 황제의 무능함, 사치와 향락, 매관매직 등으로 점철되었다. 이로 인해 후한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고 황건적의 난과 같은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하여 제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영제의 가계】
1) 부모
- 부친 :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劉萇)
- 모친 : 동부인(董夫人)
- 양아버지 : 한 환제 유지(漢桓帝 劉志) - 이 황제는 환제의 양자로, 환제 사후 황위를 이었다.
2) 후비 (후궁 및 황후)
- 송황후(宋皇后)
- 하황후(何皇后) – 홍농회왕 유변의 생모
- 왕미인(王美人) – 사후에 영회황후(靈懷皇后)로 추존됨, 헌제 유협의 생모
- 마귀인(馬貴人) – 《한관육종 · 한의(漢官六種·漢儀)》에만 언급됨
3) 자녀
- 홍농회왕 유변(弘农怀王 刘辩) – 생모는 하황후, 훗날 후소제(少帝)로 즉위함
- 한 헌제 유협(漢獻帝 劉協) – 생모는 왕미인, 후한의 마지막 황제
- 만년공주(万年公主) – 생모는 기록되지 않음
- 만년공주(萬年公主), 폐구공주(平樂公主) 등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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