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랴(Athaliah, BC. ?~835년경) : 유다의 왕비(섭정, BC. 841~835)
- 출생 : 미상 / 사마리아
- 사망 : 기원전 835년경
- 배우자 : 여호람(Jehoram)
- 자식 : 아하시야(Ahaziah)
- 부친 : 오므리(Omri) 혹은 아합(Ahab)
- 모친 : 이세벨
아달랴(히브리어: עֲתַלְיָה, 현대 히브리어: ʻAtalya, 티베리안 히브리어: ʿĂṯalyā, 그리스어: Γοθολία, 라틴어: Athalia)는 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다윗 왕의 후손인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로서 유다의 왕비 배우자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원전 841년에서 835년경까지 여왕 통치자(섭정 또는 직접 통치)가 되었다.
1.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딸인가 아합의 딸인가?
아달랴의 삶에 대한 기록은 히브리 성경의 열왕기하 8:16–11:16과 역대기하 22:10–23:15에 나온다. 신명기적 역사관에 따르면, 그녀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딸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 왕비의 딸로 여겨진다. 일부 학자들은 아달랴가 오므리의 딸이었으나, 아합의 궁정에서 고아로 자랐다고 본다.
2.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하다
아달랴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간의 조약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람과 결혼했다. 여호람은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고 여섯 명의 형제들을 죽였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통치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유다 왕이 되었다(열왕기하 8:16). 이스라엘의 여호람은 아달랴의 친아버지에 따라 그녀의 오빠이거나 조카였다.
3. 여호람의 통치
유다의 여호람은 8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과 할아버지 아사는 야훼, 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분의 길을 따랐던” 경건한 왕들이었다. 그러나 여호람은 그들의 본을 따르지 않고 야훼를 거부했으며, 그 결과 유다에 대한 그의 통치는 저주를 받게 된다. 에돔이 반란을 일으켰고, 여호람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레셋, 아랍인, 에티오피아인의 습격으로 왕궁은 약탈당했고, 여호람과 아달랴의 막내아들 아하시야를 제외한 그의 가족 전부가 사로잡혔다.
4. 아하시야의 통치와 북왕국의 쿠데타(예후)
여호람이 죽은 후,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고, 아달랴는 '게비라'(왕대비)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1년 후(열왕기하 8:26), 아하시야와 이스라엘의 여호람은 여호람의 군대 장군인 예후에게 살해된다. 예후는 불경한 왕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야훼의 비밀스러운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 후, 예후는 이세벨과 아달랴의 다른 친척들을 모두 죽였다. 아합은 이미 예후의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전투에서 죽었다.
5. 아달랴, 유다의 왕권을 찬탈하다
아하시야의 죽음 소식을 듣자, 아달랴는 유다의 왕좌를 장악하고 왕위 계승권을 가진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 여기에는 아하시야의 아들들과 그의 친척들, 그리고 아마도 여호람의 다른 아내에게서 난 자녀들도 포함된다. 일부는 이러한 살해가 다윗의 후손들이 아달랴의 친척들(대부분 이미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이를 여호사밧이 아들을 아달랴와 결혼시킨 결정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여긴다.
6. 요아스의 즉위와 아달랴의 죽음
그러나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학살 속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구해냈다. 바로 아하시야와 그의 아내 시비아의 아들인 유다의 요아스였다. 요아스는 여호세바의 남편이자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비밀리에 길러졌다.
"찬탈자 여왕"으로서 아달랴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유다에 바알 숭배를 확립했다. 6년 후, 여호야다가 솔로몬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것을 보고 아달랴는 경악했다. 그녀는 반란을 막으려 달려갔으나, 여호야다의 명령에 따라 성전 밖에서 장군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그녀의 피가 "성전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7. 아달랴 통치 기간의 연대 측정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아달랴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42년에서 837년 사이로 보았다. 반면, 에드윈 R. 틸레(Edwin R. Thiele)는 그의 대표작 세 번째 판에서 그녀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42/841년부터 836/835년 사이로 연대를 측정한다. 그러나 아달랴의 시작 연대를 기원전 842/841년으로 보는 것은, 틸레가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사망 연대로 제시한 기원전 841/840년보다 1년 빠르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틸레는 이러한 모순을 결코 해결하지 못했다.
8. 문학과 음악 속에서의 아달랴
아달랴는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유명한 여인들에 대하여》(De Mulieribus Claris)와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의 《여인들의 도시 책》(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에서 논의되었다.
1691년, 프랑스 비극 작가 장 라신(Jean Racine)은 이 성서 속 여왕에 대한 연극 《아탈리》(Athalie)를 썼다. 독일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은 라신의 연극을 위한 극음악(그의 작품 번호 74번)을 작곡했고, 이 음악은 1845년 베를린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멘델스존 음악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발췌곡 중 하나는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War March of the Priests)이라는 제목이다.
1733년,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헨델(Handel)은 아달랴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오라토리오 《아탈리아》(Athalia)를 작곡하며 그녀를 “이세벨의 딸, 바알 숭배자 유다의 여왕”이라고 칭했다. 바알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타나크/구약성경에서 자주 숭배했던 가나안인들의 다산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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