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람(Jehoram, BC. 882~842년경 : 유다의 다섯 번째 왕(BC. 849~842년경)
- Jehoram of Judah [Hebrew : יְהֹורָם, Yəhōrām, “Yahweh is exalted”)
- Joram [Hebrew : יוֹרָם, Yōrām / Greek : Ἰωράμ / romanized : Ioram / Latin: Joram or Ioram]
- 출생 : 기원전 882년경
- 사망 : 기원전 842년경
- 재위 :
기원전 853~849년경(여호사밧과 공동통치)
기원전 849~842년경(단독통치) - 전임 : 여호사밧(Jehoshaphat)
- 후임 : 아하시야(Ahaziah)
- 부친 : 여호사밧(Jehoshaphat)
- 배우자 : 아달랴(Athaliah of Israel)
- 자녀 : 아하시야(Ahaziah), 여호세바(Jehosheba)
1. 인물 개요 : 여호람
1) 다윗 왕조의 다섯째 유다 왕
여호람(Jehoram/Joram)은 다윗 왕조의 유다 왕으로, 아버지는 여호사밧(Jehoshaphat)이다. 성경은 그가 32세에 즉위해 8년을 다스렸다고 전하며, 재위 후반 2년간 중병을 앓았다고 기록한다. 공적 기록은 주로 열왕기하 8장과 역대하 21장에 집중되어 있으며, 통치 전반에 걸친 불안정과 대내외 위기가 병치되어 나타난다.
2) 이름 : 여호람과 요람, 명칭 혼용의 문맥
성경 본문은 유다 왕 여호람과 이스라엘 왕 여호람(요람)을 같은 시기 인물로 함께 언급하기 때문에 독해 혼란이 발생한다. 동일 번역 내에서도 ‘여호람’과 ‘요람’이 교차 표기되며, 열왕기와 역대기는 동일 사건을 매우 유사한 문장으로 다루면서도 유다 왕의 이름을 서로 다르게 표기한다. 이 맥락에서 독자는 문맥 속 ‘유다 왕/이스라엘 왕’ 지시 대상을 엄밀히 구분해야 하며, 고고학 자료로는 하사엘의 공적을 전하는 텔 단 석비가 동시대 충돌의 배경을 보완한다.
2. 유다의 제5대 왕
1) 즉위, 형제 숙청, 혼인 동맹과 불안정
여호람은 여호사밧이 생존해 있던 때에 왕이 되었고, 이는 공식적 공역(co-regency)을 시사한다. 그는 즉위 후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형제 여섯 명을 제거했는데, 역대하 21장 2절은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아버지 시대의 대이스라엘 화해 노선에 따라 여호람은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와 혼인했다. 하지만 더 강한 북왕국과의 연결에도 그의 통치는 흔들렸고, 대외적으로 에돔이 반란하여 독립을 쟁취하며, 리브나 또한 배반했다. 역대기는 이 배반의 원인을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평가로 설명한다.
여호람의 치세에는 블레셋과 아라비아 세력이 유다를 침입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왕실 식구들을 사로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예언자 엘리야의 서한이 전해져 악정에 대한 징벌을 경고했고, 이어 여호람은 장내 질환에 걸려 ‘창자가 빠져나오는’ 극심한 병으로 2년 뒤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는 조상 왕들의 묘실이 아닌 다윗 성에 매장되었고, 백성의 애도 의식(분향/장작더미 예우)도 받지 못했다는 냉혹한 결말이 덧붙는다.
역대하는 여호람의 말기에 창자 관련 치명적 질환이 2년간 지속되었다고 전한다. 전근대 기록은 이를 신적 심판의 언어로 해석하지만, 현대 학계는 대장암 혹은 직장 탈출 등 가능성을 가설로 논한다. 그의 죽음은 백성의 조문과 불사름 의례가 생략된, 왕으로서 이례적으로 냉대받은 결말로 기록되며, 왕실 묘역이 아닌 다윗 성에 매장된 사실이 편집자의 강한 평가를 반영한다.
2) 공역, 8년 통치, 반란과 행정 붕괴의 연대기
- 공역과 즉위 : 열왕기하 8장 16절은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여호람(아합의 아들)의 제5년에 즉위했다고 전한다. 이 서술은 여호사밧이 여전히 유다 왕이던 시점의 공역을 내포하며, 당시 유다의 연대 기산법 변화(비즉위년 방식)가 추정되는 근거가 된다.
- 형제 숙청 : 즉위 직후 형제 여섯을 살해해 왕권을 공고화했다. 이는 왕위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내부 지지 기반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역사적 해석이 가능하다.
- 대외 정세 : 에돔은 오랜 종속을 벗어나 반란했고, 여호람의 야간 기동으로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종속 회복에는 실패했다. 리브나도 동시기 반역했고, 이후 블레셋·아라비아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며 왕실은 큰 타격을 입었다.
- 종교ㆍ정치 평가 : 열왕기는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걸었다고 평하며, 아합 가문과의 혼인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타락을 지적한다. 역대기는 그의 배교를 리브나 반역의 종교적 원인으로 연결한다. 그럼에도 다윗에게 준 언약 때문에 유다가 완전히 멸절되지 않았다는 신학적 결론이 병기된다.
3. 여호람에 대해 유의할 점
1) 공역, 비즉위년 기산, 절대연대 조정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여호람의 통치를 기원전 849–842년으로 비정했다. 타일(Edwin R. Thiele)은 공역 시작을 기원전 853/852년, 단독 통치 개시를 848/847년, 사망을 841/840년으로 계산했다. 이후 연구는 타일 체계의 내적 불일치를 보정해 1년 앞당긴 값(공역 854/853, 단독 849/848, 사망 842/841)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 기산법 전환 : 타일은 여호사밧-여호람 시기에 유다가 이스라엘식 비즉위년(non-accession) 기산법을 채택했다고 보았다. 이 변화는 여호람ㆍ아하시야ㆍ아달랴ㆍ요아스 3대 후 아마샤 때 다시 본래의 즉위년(accession) 방식으로 복귀한 것으로 설명된다. 성경 본문은 어떤 기산법 사용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본문 상호 대조로 역산하는 방식이 필요하며 이 지점에서 해석 차이가 발생한다 .
- 달력 기준 차이 : 유다와 이스라엘은 기산 월이 달라(유다: 티쉬리 가을 시작, 이스라엘: 니산 봄 시작) 상호 동기화가 6개월 오프셋을 가진다. 여호람 단독 통치의 첫해는 기원전 848년 니산 1일과 티쉬리 1일 사이로 좁혀지며, 계산 편의상 유다식 표기 849/848로 쓴다. 사망도 842/841 사이로 정밀화 가능하며, 현대 1월 기준 표기와의 혼선을 피하려면 ‘842t’ 같은 표기를 제안한다는 주석 전통이 있다.
2) 이름 문제 재정리 – 동시대 이스라엘 왕과의 혼동 방지
열왕기ㆍ역대기의 상호참조에서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유다의 여호람이 동일 문맥에 나란히 등장한다. 또 동일 번역 내에서 ‘여호람/요람’이 혼용되므로, 사건 주어가 어느 왕국의 군주인지, 동행 인물이 누구인지(예: 아합ㆍ하사엘ㆍ아하시야 등)를 문장마다 재확인해야 한다. 이 혼용은 단지 번역 문제가 아니라, 원전의 다양한 철자·호칭 사용 전통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4. 여호람의 통치에 대한 의미
1) 통치의 의의 – 대이스라엘 동맹의 그늘과 유다의 취약화
여호사밧 대의 대이스라엘 협력과 혼인 동맹은 단기적 안정을 기대하게 했으나, 여호람 치세에서는 오히려 유다의 주권적 위상을 약화시키며 주변국 반란을 촉발한 결과로 이어졌다. 공역 도입, 기산법 전환 같은 행정적 변화는 북·남 왕국의 보조를 맞추려는 의도를 내포하지만, 내부 결속(형제 숙청)과 종교 정책 실패가 결합해 통치 안정성은 무너졌다. 결과적으로 여호람은 다윗 언약 덕분에 체제가 붕괴되지 않았다는 신학적 변증을 남긴 왕으로 기억된다 .
2) 사료 읽기의 포인트
첫째, 이름 혼용과 동시대 이스라엘 왕과의 중첩을 구분해야 한다. 둘째, 공역·기산법·달력 오프셋 등 연대 주석을 염두에 두고 사건 순서를 재구성해야 한다. 셋째, 역대기의 신학적 평가와 열왕기의 정치·종교 평가 공식을 교직해 입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관점을 유지하면 여호람 본문은 혼란이 아니라, 편집사ㆍ연대학ㆍ신학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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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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