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보셋(Ish-bosheth, BC. ?~1010년경) : 사울 왕가의 마지막 왕, 그리고 이름 뒤에 숨겨진 이야기
- 재위 : 기원전 1012년경 ~ 기원전 1010년경
이스보셋(히브리어: אִישׁ־בֹּשֶׁת, ʼĪš-bōšeṯ)은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Saul)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사울의 죽음 이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는 매우 짧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 글에서는 이스보셋의 성경적 서사, 그의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논란, 그리고 관련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다.
1. 성경적 서사
이스보셋의 이야기는 혼란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스라엘 통일 왕국 초기의 격동기를 반영하고 있다.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Mount Gilboa) 전투에서 블레셋(Philistines)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후, 사울의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아브넬(Abner)은 사울 가문의 생존자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한다. 이스보셋은 당시 40세였으며,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Mahanaim)에서 두 해 동안 왕으로 통치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남부의 유다 지파(Tribe of Judah)는 이미 다윗(David)을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사울 가문(이스보셋)과 다윗(David) 사이에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둘러싼 긴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은 수년 동안 지속되었고, 초기에는 이스보셋의 군대가 열세였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아브넬(Abner)의 죽음이었다. 아브넬(Abner)은 이스보셋을 지지하는 주요 인물이었으나, 다윗의 장군 요압(Joab)에게 암살당한다. 아브넬(Abner)의 죽음 이후 이스보셋은 권력을 유지할 희망을 잃고 낙담한다. (아브넬은 사울의 후궁이었던 리스바를 범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갔다가 요압에게 암살당한다)
결국 이스보셋은 자신의 군대 지휘관이었던 레갑(Rechab)과 바아나(Baanah) 형제에게 암살당한다. 이들은 이스보셋을 살해하면 다윗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 다윗에게 가져갔지만, 다윗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왕에게 손을 댄 살인자들을 칭찬하기는커녕, 즉시 처형하고 그들의 손과 발을 잘라 매달게 한다. 이는 다윗이 이스보셋의 정당한 왕권을 인정했으며, 왕권에 대한 반역 행위를 용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이스보셋의 머리는 헤브론(Hebron)에 있는 아브넬(Abner)의 무덤에 묻힌다.
![]() |
레갑과 바아나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 |
이스보셋의 죽음은 사울 왕조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하며, 이로써 다윗은 비로소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통일된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2. 이름에 얽힌 문제
이스보셋은 성경 본문 내에서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바로 ‘이스보셋(Ish-bosheth)’과 ‘에스바알(Eshbaal)’이다. 이 두 이름의 사용은 단순한 호칭의 차이를 넘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학문적 논의 지점이다.
히브리어에서 ‘이스보셋(ʼĪš-bōšeṯ)’은 “수치의 사람(man of shame)”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반면 ‘에스바알(’Ešba‘al)’은 “바알이 존재한다(Baal exists)” 또는 “바알의 불(fire of Baal)”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 차이는 이름이 사용된 시기와 배경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가. ‘이스보셋’(Ish-bosheth)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사무엘서(Books of Samuel)에서는 이 왕의 이름이 주로 ‘이스보셋’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무엘하 2장 8절에서 10절에는 “사울의 군대 총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길르앗과 아술 족속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두 해 동안 다스렸다”고 언급된다. 또한 사무엘하 4장 5절에서 12절에는 이스보셋이 레갑과 바아나에게 암살당하고 그의 머리가 다윗에게 가져왔다가 아브넬의 무덤에 묻히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무엘서 저자가 이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배경에는 ‘바알(Baʿal)’이라는 이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나. ‘에스바알’(Eshbaal)
반면, 역대기(Books of Chronicles)에서는 이 왕의 이름이 ‘에스바알’로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역대상 8장 33절 또는 9장 39절에는 “넬이 기스를 낳고 기스가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대기 저자가 ‘에스바알’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의 종교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학자들은 ‘보셋(Bosheth)’이라는 접미사가 원래 ‘바알(Baʿal)’이라는 신의 이름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본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바알(Baʿal)’은 본래 ‘주인’ 또는 ‘소유주’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였으며, 종종 주신(主神)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알(Baʿal)’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인 야훼(Yahweh)의 경쟁자, 즉 이방 신의 상징이 된다. 특히 예언자 엘리야(Elijah) 시대 이후 ‘바알(Baʿal)’ 숭배는 강력하게 비판받았고, ‘바알(Baʿal)’이라는 이름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이 불경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학적 관점에서 ‘바알(Baʿal)’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에스바알’을 “수치”를 의미하는 ‘보셋(Bosheth)’으로 바꾸어 ‘이스보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이름에 내포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3. 고고학 (Archaeology)
이스보셋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시대와 관련하여 간접적인 고고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성경 서사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 중 하나는 ‘에스바알 벤 베다(Eshbaʽal Ben Bedaʽ)’라는 이름이 새겨진 토기 비문이다. 이 비문은 다윗 시대의 고대 도시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성경 속 인물인 ‘에스바알’과 동시대에 살았던 ‘베다의 아들 에스바알’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시사한다. 비록 이 비문이 직접적으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스바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에스바알’이라는 이름이 당시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이는 성경 속 이름들이 고대 근동 지역의 실제 문화적, 언어적 맥락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이스보셋이 왕으로 통치했다고 언급되는 마하나임(Mahanaim)이나, 그의 통치 기반이었던 기브아(Gibeah) 등 사울 시대의 주요 장소들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들은 이 시기의 사회 구조와 도시의 형태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들 유적지 발굴은 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은 중앙집권적이고 대규모의 왕국보다는, 부족적 성격이 강한 소규모 정착지들이 이스라엘의 주요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사울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 규모에 대한 학계의 논쟁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없더라도,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 서사의 배경을 이해하고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결론 : 비극적인 인물, 그러나 중요한 시대의 상징
이스보셋은 사울 왕가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짧은 통치는 혼란스러웠던 이스라엘 초기 왕정 시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권력 투쟁 속에서 외롭게 왕위를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은, 아버지 사울의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지 못한 나약한 군주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그의 이름 ‘이스보셋’과 ‘에스바알’을 둘러싼 논쟁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적 변화와 언어적 금기가 어떻게 역사적 기록에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바알(Baʿal)’ 숭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그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은 종교와 문화가 개인의 정체성과 기록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이스보셋은 비록 다윗이라는 걸출한 인물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한 과도기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이스라엘 왕국의 권력 전환 과정, 그리고 왕권의 정당성과 신의 뜻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는 통일 왕국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대가이자,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한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