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6일 금요일

진명제 사마소(晉明帝 司馬紹, AD. 299~325년) : 동진 2대 황제(AD. 323-325년)

진명제 사마소(晉明帝 司馬紹, AD. 299~325) : 동진 2대 황제(AD. 323-325)

 
  • 이름 : 사마소(司馬紹)
  • 출생 : 299
  • 사망 : 3251018(향년 2526)
  • 진명제(晉明帝)
    • 재위 : 32314~ 3251018(2287)
    • 전임 : 진 원제 사마예(晉元帝 司馬睿)
    • 후임 : 진 성제 사마엽(晉成帝 司馬衍)
  • 묘호 : 숙조(肅祖) 또는 숙종(肅宗)
  • 시호 : 명황제(明皇帝)
  • 능호 : 무평릉(武平陵)
  • 연호
    • 태녕(太寧) : 3233~ 3261(재위 기간 중)
 

기원후 299

  • 그는 진원제 사마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도기(道畿)이며, 어머니는 예장군군 순씨(荀氏)이다.
 

기원후 307

  • 사마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 사마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307년 영가(永嘉) 원년에 아버지와 함께 건업(建業, 후에 건강(建康)으로 개칭, 지금의 강소성 난징시)으로 거점을 옮겼다.
 

기원후 313

  • 313년 건흥(建興) 원년에 사마예가 좌승상으로 승진하자, 사마소는 동중랑장(東中郎將)에 임명되어 광릉(廣陵)을 진수(鎭守)했다.
 

기원후 316

  • 316년에 진민제(晉愍帝)가 있던 장안(長安)이 전조(前趙)에 의해 함락되고 진민제가 항복하면서 서진(西晉)은 멸망했다.
 

기원후 317

  •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317년에 사마예는 진왕(晉王)이라 칭하고 건무(建武)로 개원했으며, 사마소를 진왕태자로 삼았다.
 

기원후 318

  • 318년에 사마예가 제위에 올라 황제라 칭하고 태흥(太興)으로 개원하자, 사마소는 황태자가 되었다.
 

기원후 322

  • 322년 영창(永昌) 원년에 왕돈의 난이 발생했다. 대장군 왕돈은 군사를 이끌고 건강을 공격하여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했다. 진원제는 왕도 등을 파견하여 석두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모두 왕돈에게 패했다. 이에 사마소는 장병들을 이끌고 왕돈과 사력을 다해 싸우려 했다. 막 출발하려 할 때 태자중서자 온교(溫嶠)의 강력한 만류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왕돈은 스스로 승상에 임명되어 조정을 장악했다. 그는 사마소가 용감하고 지략이 있으며 조정과 재야에서 모두 명망이 높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불효하다며 모함하여 폐위시키려 했다. 하지만 온교 등 대신들이 사마소를 지지했기 때문에 왕돈은 결국 사마소를 폐위시키지 못했다.
 

기원후 323

  • 진원제는 왕돈의 난으로 인해 근심과 분노 속에 병이 깊어져, 같은 해 윤 11월 기축일(32313)에 병사했다. 사마소는 다음날 즉위하여 진명제가 되었고, 사공 왕도의 보좌를 받았다.
  • 왕돈은 비록 322년 영창 원년에 무창(武昌)으로 돌아가 조정을 원격 조정했지만, 황위 찬탈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에 323년 태녕(太寧) 원년에 자신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도록 암시했다. 진명제는 이에 수조(手詔)를 내려 왕돈을 불렀다. 같은 해 왕윤지(王允之)는 술자리에서 왕돈의 음모를 알게 되었고, 곧바로 경사로 돌아와 아버지 왕숙(王舒)에게 알렸다. 왕숙은 왕도와 함께 진명제에게 보고하여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기원후 324

  • 이듬해 진명제는 왕돈의 의도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미행하여 우호(于湖)에 있는 왕돈의 영지를 시찰하러 갔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발각되었고, 다섯 명의 기병이 그를 추격했다. 진명제는 도망치면서 타고 있던 말의 똥에 물을 뿌려 온도를 낮추었다. 또한 칠보채찍을 길가의 음식 파는 할머니에게 주면서, 자신을 쫓아오는 기병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라고 일렀다. 진명제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추격병들이 도착하여 할머니에게 물었고, 할머니는 칠보채찍을 보여주며 그 사람이 이미 멀리 갔다고 말했다. 기병들은 칠보채찍을 서로 돌려보며 구경하느라 그곳에 한참 머물렀고, 말똥이 이미 식은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추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모두 추격을 멈추었다. 진명제는 이로써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 이후 진명제는 경사 건강의 방어를 적극적으로 준비했고, 결국 같은 해 왕돈이 파견한 공격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여 왕돈의 난을 평정했다. 왕돈의 난이 평정된 후, 진명제는 왕돈의 관료들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명령했다. 또한 응점(應詹)을 강주자사(江州刺史), 유하(劉遐)를 서주자사(徐州刺史), 도간(陶侃)을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숙(王舒)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각각 임명하여 각 주의 형세를 재정비했다. 이는 왕돈이 왕씨 종족을 통해 각 주를 장악하고 나약한 황실을 능멸하던 불균형한 상황을 해소하려는 의도였다.
 

기원후 325

  • 325년 태녕 3년 윤 8월 무자일(1018), 사마소는 동당(東堂)에서 병사했다. 나이는 스물일곱 살에 불과했다. 그는 무평릉(武平陵)에 안장되었고, 묘호(廟號)는 숙조(肅祖)이다.
 

가족 관계

  • 후비
    • 명목황후(明穆皇后) 유문군(庾文君, 297~ 328)
  • 황자
    • 황태자 사마연(司馬衍) - 동진 제3대 황제 성제(成帝).
    • 낭야왕(琅邪王) 사마악(司馬岳) - 동진 제4대 황제 강제(康帝).
  • 황녀
    • 남강공주(南康公主) 사마흥남(司馬興男) - 초나라 황제 환현(桓玄)의 어머니.
    • 여릉공주(廬陵公主) 사마남제(司馬南弟, ? ~ 357) -
    • 남군도공주(南郡悼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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