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7일 토요일

진성제 사마연(晉成帝 司馬衍, AD. 321~342년) : 동진 3대 황제(AD. 325~342)

진성제 사마연(晉成帝 司馬衍, AD. 321~342) : 동진 3대 황제(AD. 325~342)

 
  • 사마연 (司馬衍)
  • 출생 : 32112월 또는 3221
  • 사망 : 342726(향년 20)
  • 진성제(晉成帝)
    • 재위 : 3251019~ 342726(재위 16280)
    • 전임 : 진명제(晉明帝)
    • 후임 : 진강제(晉康帝)
    • 묘호 : 현종(顯宗) 또는 현조(顯祖)
    • 시호 : 성황제(成皇帝)
    • 능호 : 흥평릉(興平陵)
  • 연호
    • 함화(咸和) : 3262~ 334
    • 함강(咸康) : 335~ 342
 

기원후 321

  • 진명제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자는 세근(世根)이다.
 

기원후 325

  • 325년 태녕(太寧) 33월 무진일(41), 진명제는 사마연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 같은 해 윤 8월 무자일(1018), 진명제가 세상을 떠났고, 다음날 다섯 살의 진성제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머니 황태후 유문군(庾文君)이 섭정했으며, 일곱 명의 고명대신들이 보좌했다. 중서령 유량은 국구(國舅) 신분으로 정치를 주도했다.
 

기원후 327

  • 327년 함화(咸和) 2년 연말, 역양 내사 소준은 예주자사 조약과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후 328

  • 다음 해 역양 내사 소준은 예주자사 조약이 군대를 이끌고 건강까지 공격해왔다. 유량이 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어쩔 수 없이 도주해야 했다. 진성제는 왕도 등 여러 관료들과 함께 소준에게 억류되었다. 궁중은 소준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탔으며, 태관(太官)에는 진성제가 먹을 수 있는 쌀이 몇 섬밖에 남지 않았다.
  • 328년 함화 35월 을미일, 소준은 진성제를 강제로 석두성(石頭城)의 한 창고로 이주하게 했다. 진성제는 울면서 수레에 올라 출발했고, 궁중의 사람들도 모두 슬피 울었다.
 

기원후 329

  • 329년 함화 4, 도간을 필두로 한 군대가 소준의 난을 평정하고 진성제를 모셔왔다. 궁전이 전화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건평원(建平園)을 수리하여 궁실로 사용하였다.
 

기원후 332

  • 332년 함화 7년에 새로 지은 건강궁이 완공된 후에 새 궁전으로 옮겨갔다.
  • 소준의 난 이후, 조정은 왕도(王導)가 전권을 휘둘렀다. 진성제 또한 왕도를 매우 존경하여, 심지어 여러 차례 왕도의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 유량은 예주자사로서 무호(蕪湖)에 주둔하며 군사를 총괄했다. 도간이 세상을 떠나자, 유량은 형주(荊州), 강주(江州), 예주 세 주의 관직을 겸하게 되었고 무창(武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후조에 대한 북벌에 주력했다.
 

기원후 336

  • 336년 함강 2, 진성제는 임진조서(壬辰詔書)를 반포하여 사대부, 관리가 개인적으로 산천(山川)과 큰 못을 사유화하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후 339

  • 339년 함강(咸康) 5, 유량은 북벌 계획을 세우고, 양양 석성(襄陽石城)으로 거점을 옮길 것을 상주했다. 또한 장강(長江), 한수(漢水) 유역 및 회수(淮水)-사수(泗水)-수양(壽陽) 지역 요지에 병력을 증강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했다. 당시 유량은 바군(巴郡)을 공격하여 강양(江陽)까지 진격했고, 후조 장수 이홍(李閎)과 황식(黃植)을 사로잡았다. 진성제는 이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고, 상소는 왕도의 지지를 받았지만, 희감(郗鑒)은 자원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유량의 행동은 후조의 군사적 대응을 불렀다. 후조는 대규모 병력을 남하시켰고, 유량이 정했던 요충지 주성(邾城)마저 함락되었다. 결국 유량의 북벌은 좌절되었다.
 

기원후 341

  • 341년 함강 7년에는 토단(土斷) 방식으로 강북에서 이주해 온 세족들을 호적에 편입시켰다.
 

기원후 342

  • 342년 함강 8723, 진성제가 병에 걸렸다. 중서감 유빙(庾冰)은 영천 유씨 가문이 황제와 혈연적 친밀감을 유지하고자, 나라 밖에 강한 적이 있어 나이 많은 군주를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진성제에게 동생 낭야왕 사마악(司馬岳)을 태자로 삼도록 설득했다.
  • 726, 진성제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 818, 흥평릉(興平陵)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 후비 (후궁)
    • 두황후(杜皇后, 杜氏) : 시호 - 성공황후(成恭皇后), 咸康 2(336)에 황후로 책봉됨. 두예(杜預)의 증손녀.
    • 주태비(周太妃, 周氏) : 원래 귀인, 성제 사후 황태비로 존숭됨. 사마비, 사마의의 생모.
  • 자녀 (황자 및 황녀)
    • 사마비(司馬丕) - 초봉 : 낭야왕(琅邪王), 이후 즉위 진 애제(晉哀帝)
    • 사마의(司馬奕) - 초봉 : 동해왕(東海王), 후에 낭야왕(琅邪王)으로 이동, 애제 사후 즉위 진 폐제(晉廢帝), 후에 환온(桓溫)에 의해 폐위됨
    • 남평공주(南平公主) - 남편 : 유적송(劉赤松)
    • 심양공주(尋陽公主) - 남편 : 왕의지(王禕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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