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5일 월요일

후한 6대 안제 유호(安帝 劉祜, AD. 94~125년) : 재위 AD. 106~125년

후한 6대 안제 유호(安帝 劉祜, AD. 94~125) : 재위 AD. 106~125

 

기원후 94

  • 유호(劉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음력 223일생으로 추정된다.
  • 그는 후한 장제(章帝)의 손자이자 청하효왕(淸河孝王) 유경(劉慶)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소의(左小儀) 이씨(李氏)이다.
  •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송황태비(宋皇太妃) 밑에서 자랐다. 이 무렵 화제(和帝)에게 자식이 없어 황궁으로 불려와 후계자로 고려되기도 했다.
 

기원후 106

  • 기원후 106년 음력 813, 생후 100일 만에 요절한 상제(殤帝) 유륭(劉隆)의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 재위 기간은 기원후 106813일부터 기원후 125430일까지이다.
  • 그의 외할머니이자 화제의 황후였던 등태후(鄧太后)가 섭정(攝政)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의 연호는 영초(永初)였다(기원후 107~ 기원후 113).
 

치세 초기등태후의 섭정기 : 현명한 통치

  • 등태후는 매우 현명하고 유능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검소한 생활을 솔선수범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인재를 등용했다.
  • 잦은 자연재해와 흉작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노력했으며, 자신의 친족들(등씨 일족)에게 국정 개입을 자제하도록 지시했다.
  • 이 시기는 비교적 안정된 후한의 황금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원후 111

  • 서북 변방에 있는 티베트계의 유목민족인 강족(羌族)이 빈번하게 침략해 오자 대장군 등즐은 양주(凉州)를 포기하고 변방을 지키자고 주장했으나 낭중(郎中)인 우후(虞詡)는 서슴지 않고 반대하여 등즐은 우후를 미워하게 되었다. 마침 朝歌縣(조가현: 안휘성)에 도적 떼가 일어나자 등즐은 갑자기 우후를 조가현 장관에 임명해서 분풀이를 대신했다. 조가에 부임한 우후는 지혜와 용맹으로 도적을 평정했다. 그리고 이후 강족이 다시 침략하자 우후는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진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 반웅(班雄)이 해적을 격퇴하고 장백로(張伯魯)를 참수하였다.
 

기원후 114

  • 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웠다.
 

기원후 118

  • 선비족이 상곡(上谷)에 침입했고, 이듬해 마성(馬城)에 침입하였다.
 

기원후 120

  • 새로운 연호인 영녕을 사용했다(기원후 120).
  • 부여의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사신으로 와 인수(印綬) 및 금색의 비단 등을 내렸다. 이듬해 고구려가 마한과 예맥의 병사를 동원하여 현도군(玄菟郡)을 포위하자, 그는 2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한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기원후 121

  • 2, 섭정하던 등태후가 사망하자 안제는 13세에 시작된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 등씨 가문(등태후 일족)을 숙청하고 그 권력을 자신이 총애하는 황후 염기(閻姬)의 친족들(염씨 일족)에게 부여했다.
  • 특히 염기의 오빠인 염현(閻顯)이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며 외척들의 전횡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 이 시기의 연호는 건광(建光)이었다(기원후 121~ 기원후 122).
  • 안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유보(劉保)를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황후 염기가 자신에게 아들이 없자 유보를 미워하고 그를 폐위시키려 했다. 결국 염기의 모함으로 유보는 폐위되어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되었다.
 

기원후 122

  • 새로운 연호인 연광을 사용했다(기원후 122~ 기원후 125).
 

치세 후반

  • 등태후 사망 후 친정(親政)을 시작한 안제는 염씨 일족과 환관들의 비호를 받으며 점차 탐욕스럽고 잔혹한 폭군으로 변했다.
  • 자신에게 비판적인 대신들을 숙청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환관 이준(李閏) 등을 총애하여 정치 전면에 나서게 하면서 후한시대 환관 전횡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염씨 일족과 환관들의 부정부패가 심화되면서 한나라의 재정은 바닥났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농민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기원후 125

  • 430, 남순(南巡)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갑작스러운 병으로 430(양력) 사망했다.
  • 향년 30세였다.
  • 그의 죽음은 당시 이미 권력을 장악했던 염씨 일족에 의해 은폐되었다. 염황후는 황태후가 된 후, 자신의 조카인 유보(劉保)를 황제로 옹립하지 않고, 당시 10세였던 북향후(北鄉侯) 유의(劉懿)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는 염씨 일족이 계속해서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 능은 낙양(洛陽) 인근의 공릉(恭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호(劉祜)
  • 묘호 : 공종(恭宗) (일부 기록, 공식적인 묘호는 아님)
  • 시호 : 효안황제(孝安皇帝) : 안제(安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후 94(음력 223)
  • 출생지 : 청하왕국(淸河王國) (정확한 위치는 미상)
  • 사망 : 기원후 125430(향년 30)
  • 사망지 : (남순 도중 병으로 사망, 장소 미상)
  • 재위 : 기원후 106813~ 기원후 125430(18250)
  • 전임 : 후한 상제(殤帝) 유륭(劉隆)
  • 후임 : 후한 전소제(前少帝) 유의(劉懿, 북향후)
  • 후한 안제는 초기에 현명한 등태후의 섭정 아래에서 안정된 통치기를 보냈으나, 등태후 사망 후 친정을 시작하면서 외척 염씨와 환관들의 권력을 제어하지 못해 후한을 쇠퇴의 길로 이끈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는 외척과 환관의 극심한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는 전환점이었다.
 

안제의 가계

  • 부친 : 청하효왕(淸河孝王) 유경(劉慶)
  • 모친 : 좌소의(左小儀) 이씨(李氏)
  • 양부 : 한 화제(漢和帝) 유조(劉肇)
  • 배우자 :
    안사황후(安思皇后) 염기(閻姬)
    궁인 이씨(李氏)
  • 자녀 :
    아들 : 유보(劉保, 훗날 후한 순제), 이외 아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음.
    : 무양장공주(舞陽長公主) 1명의 딸이 기록되어 있음.
    양자 : 후한 전소제(前少帝) 유의(劉懿, 북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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