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8일 월요일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e Porphyrogenita, AD.978~1050) : 동로마 제국 제101대 황제(AD.1042)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e Porphyrogenita, AD.978~1050) : 동로마 제국 제101대 황제(AD.1042)

 
  •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e Porphyrogenita)
  • [Zoë / Greek : Ζωή Πορφυρογέννητη / romanized : Zōē Porphyrogénnētē]
  • 출생 : 978년경
  • 사망 : 1052
  • 부친 : 콘스탄티노스 8(Constantine VIII)
  • 모친 : 헬레나(Helena)
  • 배우자 :
    Romanos III(1028
    1034)
    Michael IV(1034
    1041)
    Constantine IX(1042
    1050)
  • 재위 : 1042421~ 1042611
  • 대관식 : 1042421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 조이 황후의 동시대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 조이 황후의 동시대 모자이크 — 조이가 예수 그리스도께 두루마리를 바치는 장면. (보이지 않는캡션에는 지극히 경건한 아우구스타 조이라고 적혀 있다.
 

1. 조에 포르피로게니타 황후 :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비극의 비잔틴 여제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e Porphyrogenita, 978년경1050)1042년에 잠시 단독으로 비잔틴 여제로서 통치했으며, 이후 그의 여동생 테오도라(Theodora Porphyrogenita, 980년경1056)와 함께 공동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황후 조에는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자(Porphyrogenita)’라는 별칭을 지녔는데, 이는 그녀가 재위 중인 황제의 자녀로 궁궐 내 포르피라(Porphyra)’라 불리는 자줏빛 방에서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황실의 적통이자 정통성을 상징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스 8(Constantine VIII, 9601028) 황제와 황후 헬레나(Helena, 생몰년 미상)의 둘째 딸로, 당시 비잔틴 제국의 오랜 전통을 지닌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마지막 직계 혈통이었다. 그녀의 삶은 황제의 딸, 세 명의 황후, 그리고 잠시나마 제국을 직접 통치하는 여제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의 연속이었다.
 

2. 황궁의 그림자 속 어린 시절 (978년경1028)

 
조에는 황궁의 자줏빛 방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그녀의 삶은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8세는 그의 형인 바실리우스 2(Basil II, 9581025)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재위하고 있었다. 강력한 바실리우스 2세는 자신의 조카들이 비잔틴 귀족들과 결혼하여 황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막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떤 국가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던 조에는 수년간 사실상 궁정 내 여성 구역인 기나이케움(gynaeceum)에서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녀는 한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Otto III, 9801002)의 유력한 신부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다. 996년에 처음 혼담이 오갔고, 1001년에는 오토의 신부를 고르기 위해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이때 콘스탄티노스 8세의 세 딸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23세의 조에가 오토의 신부로 선택되었다. 10021, 조에는 사절단과 함께 이탈리아 바리(Bari)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오토 3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3. 첫 번째 결혼과 비극적인 황후 생활(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 10281034)

 
바실리우스 2세가 1025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 8세가 단독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역시 아들이 없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명맥을 잇기 위해 그의 딸 중 한 명을 서둘러 결혼시키려 했다. 당시 50세였던 조에는 유력 귀족 가문의 로마노스 아르기로스(Romanos Argyros, 9681034)와 결혼했다. 조에와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스 8세가 사망한 다음 날인 1028년에 황제 부부로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에와 로마노스 3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조에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둘 사이는 곧 냉랭해졌다. 로마노스 3세는 결국 1034년 목욕 중에 의문사했다. 그의 죽음은 조에, 혹은 그녀의 연인이었던 미하일(Michael, 훗날 미하일 4)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4. 두 번째 결혼과 권력에서의 소외(미하일 4세 파플라고니아, 10341041)


로마노스 3세가 사망한 바로 그날, 조에는 미하일과 재혼했으며, 미하일은 다음 날 황제 미하일 4(Michael IV the Paphlagonian, 1010년경1041)로 즉위했다. 미하일 4세는 젊고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간질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문제가 되었다.
 
미하일 4세가 황위에 오르면서, 그의 형이자 강력한 환관이었던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John the Orphanotrophos, 9세기)가 사실상 제국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요한네스는 조에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그녀를 황궁의 여성 구역인 기나이케움에 가두고 감시했으며, 조에를 거의 황제의 권한에서 멀어지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에는 사실상 명목상의 황후로 전락하고 만다.
 

5. 세 번째 권력 도전과 드라마틱한 복위(미하일 5세 칼라파테스, 10411042)

 
미하일 4세는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의 조카인 미하일 칼라파테스(Michael Kalaphates, 10151042)를 황후 조에의 양자로 입양하게 했다. 이는 자신의 가문이 황실을 계속 지배하기 위한 요한네스의 계략이었다. 1041년 미하일 4세가 사망하자 미하일 칼라파테스는 황제 미하일 5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미하일 5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요한네스를 추방하고, 급기야 양어머니이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유일한 혈통인 조에 황후마저 수도원으로 추방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황실의 상징이자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자인 조에를 배척한 것은 시민들에게 황제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증폭시켰다. 1044,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미하일 5세를 폐위시키고 조에를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황제의 경호원들이 시민들을 막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시민들은 황궁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 조에 황후는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미하일 5세는 결국 폐위되고 실명형을 당한 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로써 조에는 잠시 단독 황후로 통치하게 되었으나, 곧 그녀의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공동 여제로 즉위하며 권력을 나누었다.
 

6. 세 번째 결혼과 마지막 재위(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10421050)

 
조에와 테오도라의 공동 통치는 단 두 달간 지속되었다. 조에는 국가를 직접 통치하는 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다시 결혼하여 통치의 부담을 넘기려 했다. 1042, 그녀는 이전부터 연인이었던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e Monomachos, 9801055)와 세 번째로 결혼했으며,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는 콘스탄티노스 9세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비록 권력을 그에게 넘겼지만, 조에는 비잔틴 여제로 계속해서 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 결혼 생활 또한 순탄치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오랫동안 정부인 마리아 스클레라이나(Maria Skleraina, 생몰년 미상)를 두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녀를 궁정으로 데려오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공식적인 인정을 받으려 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세바스테(sebaste)’라는 칭호를 주어 조에와 테오도라 다음의 높은 서열에 두었으며, 공식 행사에서도 두 자매의 바로 뒤에 위치하도록 했다. 64세였던 조에는 남편이 정부를 두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대중의 눈에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이러한 행동이 스캔들로 비춰졌다.
 
결국 마리아 스클레라이나가 조에와 테오도라를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1044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콘스탄티노스 9세를 위협했고, 조에와 테오도라가 발코니에 나타나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야 군중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조에가 여전히 시민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도 조에는 자신의 미모와 그 유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역사가 미하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는 그의 연대기(Chronographia)에서 조에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며 그녀의 모든 부분이 단단하고 상태가 좋았다고 언급했다. 조에는 자신의 미모를 극대화하고 그 효과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치료법을 시도했다. 그녀는 기나이케움 내에 화장품 실험실을 운영하며 향수와 연고의 효능을 개선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프셀로스는 조에가 60대가 되어서도 얼굴이 젊어 보였다고 기록했다.
 

7. 말년과 사망(1050)


조에 포르피로게니타는 1050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직계 혈통의 소멸을 의미했으며, 이는 비잔틴 제국이 새로운 권력 다툼과 혼란에 접어들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8. 조에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조에 포르피로게니타는 비잔틴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자로서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군사적 재능이나 통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은 세 번의 결혼과 끊임없는 궁정 내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들의 즉위를 돕고 때로는 그들을 폐위시키는 데 기여하며 비잔틴 정치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적으로는 미모와 쾌락을 추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황실의 유일한 정통성이라는 막강한 카드를 쥐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권력의 취약성과 동시에 황실 혈통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에의 시대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화려함이 저물고 제국의 내부 혼란이 심화되는 시기였지만,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은 비잔틴 역사의 가장 흥미로운 장 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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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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