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 AD.c.980~1056) 동로마 제국 제101대 황제(AD.1042, 1055~1056)
-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
- [Greek : Θεοδώρα Πορφυρογέννητη / romanized : Theodṓra Porphyrogénnētē]
- 출생 : 980년경
- 사망 : 1056년 8월 31일
- 부친 :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 모친 : 헬레나(Helena)
- 재위
1042년 4월 21일 ~ 1042년 6월 11일 : 조에 포르피로게니타와 공동 통치
1055년 1월 11일 ~ 1056년 8월 31일 : 단독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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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마코스 관(Monomachos Crown)에 묘사된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의 모습 |
1.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 :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마지막 여제, 덧없고 찬란했던 통치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 980년경–1056년 8월 31일)는 1042년에 언니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ë Porphyrogenita, 978년경–1050년)와 공동으로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으며, 1055년부터 1056년 사망할 때까지 단독 여제로서 제국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녀는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마지막 통치자라는 점에서 비잔틴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의 삶은 황실의 적통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소외되고, 유폐되었다가 극적으로 복귀하여 마침내 제국의 최고 권력을 쥐었던 파란만장한 역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2. 탄생과 궁정에서의 소외(980년경–1031년)
테오도라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960–1028)와 황후 헬레나(Helena, 생몰년 미상)의 셋째 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황궁의 ‘자줏빛 방(Porphyra)’에서 태어났기에 ‘포르피로게니타(Porphyrogenita)’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는 그녀가 황실의 적통임을 상징했다.
어린 시절 테오도라는 서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Otto III, 980–1002)의 유력한 신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996년에 혼담이 오갔고, 1001년에는 사절단이 신부를 고르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오토는 언니 조에를 선택했으며, 오토 3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 혼담마저 무산되었다. 그녀의 삼촌이자 선왕인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는 자신의 조카들이 비잔틴 귀족들과 결혼하여 황위 계승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여성 황족들은 어떠한 국가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으며, 테오도라 역시 오랫동안 궁정 내 여성 구역인 기나이케움(gynaeceum)에서 거의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8세가 1028년에 사망한 후, 언니 조에는 남편들과 함께 공동 황제로 통치했지만, 테오도라를 계속 감시했다. 1031년에는 두 번의 황위 찬탈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에 있는 섬 수도원으로 유폐되었다.
3. 유폐와 극적인 복귀(1031년–1042년)
10여 년간의 수도원 생활 끝에, 테오도라의 삶은 다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미하일 4세(Michael IV the Paphlagonian, 1010년경–1041)의 뒤를 이은 미하일 5세 칼라파테스(Michael V Kalaphates, 1015–1042)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양어머니 조에를 추방하려 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격렬히 분노하여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미하일 5세를 폐위시키려는 민중은 황실의 적통성을 가진 조에와 그녀의 여동생 테오도라를 복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042년 테오도라는 유폐되었던 수도원에서 다시 황궁으로 소환되었다. 황궁에 복귀한 테오도라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언니 조에와 함께 황궁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고, 마침내 미하일 5세는 폐위되고 실명당한 뒤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
4. 조에와의 공동 통치와 다시 찾아온 은둔 생활(1042년–1055년)
1042년 4월 21일, 테오도라는 언니 조에와 함께 공동 여제로 즉위했다. 두 자매는 처음에는 협력했지만, 성격 차이와 오랜 갈등으로 인해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공동 통치는 단 65일 만에 끝났다. 국정 운영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조에는 세 번째 결혼을 추진했고,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e Monomachos, 980년경–1055년)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Constantine IX, 1042–1055)로 옹립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황위를 물려받자 테오도라는 다시 궁정에서 물러나 수녀원으로 돌아갔고, 1050년 조에가 사망한 후에도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5. 예상치 못한 단독 통치(1055년–1056년)
테오도라의 인생은 은둔으로 끝나는 듯 보였으나, 운명은 다시 한번 그녀를 황제의 자리로 불렀다. 1055년, 콘스탄티노스 9세가 사망하자, 당시 74세의 고령이었던 테오도라가 다시 제위로 복귀했다. 궁정 관리들과 군부 인사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황실의 유일한 적통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단독 여제로서 황좌에 앉았다.
비록 고령의 나이였지만, 테오도라의 통치는 강력하고 단호했다. 그녀는 니케포로스 프로테우온(Nikephoros Proteuon)과 같은 고위 관리들과 서방군 총사령관 나이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Nikephoros Bryennios) 등 여러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하고 유배 보냈다. 또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지자들을 궁정에서 축출했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중앙집권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원로원 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민사 소송의 최고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리는 등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했다.
그녀는 유능했지만 미천한 출신이었던 환관 레오 파라스폰딜로스(Leo Paraspondylos)를 고문으로 삼는 등 자신의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등용했다. 이러한 인사는 때로는 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히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arios)는 여성인 테오도라가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남성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불만을 표했다.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발행된 동전과 인장에는 ‘테오도라, 데스포이나(여주인)이자 포르피로게니타’, 또는 ‘테오도라, 아우구스타(황후)이자 포르피로게니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6. 죽음과 마케도니아 왕조의 종말(1056년)
테오도라는 16개월 동안 단독 통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76세의 나이에 그녀는 1056년 8월 말에 장 질환으로 위중한 병에 걸렸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제국에 큰 불안을 야기했다.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를 포함한 그녀의 고문들은 테오도라에게 결혼을 통해 후계자를 선정할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8월 31일, 고문들은 황제의 후계자로 나이가 많고 다루기 쉬운 고위 관료 미하일 브링가스(Michael Bringas)를 추천했다. 의식이 희미했던 테오도라는 이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미하일 브링가스는 미하일 6세(Michael VI, 생몰년 미상)로 즉위했다. 테오도라는 몇 시간 후인 1056년 8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비잔틴 제국을 189년간 통치하며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는 황금기를 이끌었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7. 테오도라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불꽃이자, 황실의 적통으로서 비잔틴 역사의 혼란기를 홀로 마주했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권력에서 소외된 황족의 비애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최고 권력을 쥐게 된 여제의 강력한 의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의 16개월간의 단독 통치는 제국의 법과 행정을 재정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한 왕조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비잔틴 제국이 새로운 권력 다툼과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비록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녀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테오도라의 삶은 단순한 황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과 정통성, 그리고 개인의 운명이 교차하는 비잔틴 역사의 드라마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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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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