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5세 칼라파테스(Michael V Kalaphates, AD.1015~1042) : 동로마 제국 제100대 황제(AD.1041~1042)
- 미카엘 5세 칼라파테스(Michael V Kalaphates)
- [Ancient Greek : Μιχαήλ Καλαφάτης, Michaḗl Kalaphátēs]
- 출생 : 1015년
- 사망 : 1042년
- 부친 : Stephen(a caulker), Michael IV the Paphlagonian(입양)
- 모친 : Maria(Paphlagonian), Zoë Porphyrogenita(입양)
- 재위 : 1041년 12월 13일 ~ 1042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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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5세 –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수록된 11세기 그림 |
1. 미카엘 5세 칼라파테스 황제 : 미천한 기원, 짧은 권좌, 그리고 비극적인 몰락
미카엘 5세 칼라파테스(Michael V Kalaphates, 1015–1042년 8월 24일)는 1041년부터 1042년까지 단 4개월 동안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칼라파테스(Kalaphates)’는 그의 아버지 스테판(Stephen)의 직업인 ‘배를 수리하고 틈새를 메우는 사람’, 즉 ‘선장공(caulker)’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이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황제 미카엘 4세(Michael IV the Paphlagonian, 1010년경–1041)의 조카이자 양어머니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ë Porphyrogenita, 978경–1050)의 총애를 받아 황위에 올랐지만, 결국 민심을 잃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2. 미천한 탄생과 황실의 사다리
미카엘은 1015년에 태어났다. 그의 친아버지는 스테판으로 선장공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Maria)로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황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황후 조에의 남편이자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미카엘 4세의 여동생이라는 점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이는 그에게 황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미카엘은 그의 숙부 미카엘 4세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궁정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특히 미카엘 4세의 실질적인 권력이었던 환관 요한네스(John the Orphanotrophos, 9세기)의 도움으로 그는 궁정에서 성장했다. 요한네스는 미카엘 4세의 친형이기도 했다. 요한네스는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968–1034)가 죽은 후 미카엘 4세를 황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미카엘 4세는 오랜 기간 간질병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병세가 심각해져 통치가 어려워졌다. 요한네스는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병약한 황제 미카엘 4세가 죽기 직전 조카 미카엘을 황후 조에의 양자로 입양하게 했다. 이는 조에의 황실 정통성을 이용하여 미카엘이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도록 후계 구도를 마련하려는 의도였다. 1041년 12월 13일, 미카엘 4세가 사망하자 미카엘은 공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5세 칼라파테스로 즉위했다 .
3. 권력 장악을 위한 숙청과 파멸의 시작
미카엘 5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그를 황제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자,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환관 요한네스였다. 요한네스는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많은 적을 만들었고, 황제에게까지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미카엘 5세는 요한네스를 즉시 제거하고 수도원으로 추방했으며, 요한네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다른 고위 관료들도 해임하거나 투옥했다. 이로써 미카엘은 명목상으로만 황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또 다른 존재인 양어머니 조에 황후마저 권력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조에 황후는 태어날 때부터 황실의 일원이었고,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960–1028)의 딸로서 비잔틴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민중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카엘 5세는 조에를 공주로서의 특권을 모두 박탈하고, 강제로 수도원으로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만이 유일한 정통 황제임을 과시하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꿈꿨다.
4. 민중의 분노와 거대한 봉기
미카엘 5세의 조에 황후 추방 조치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격분했다. ‘포르피로게니타(Porphyrogenita,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자)’로 불리며 황실의 적통임을 상징하는 조에를 건드린 것은 황제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1042년 4월 18일,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분노한 시민들은 “조에와 테오도라를 되돌려라!”를 외치며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조에 황후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생 테오도라(Theodora, 980년경–1056)까지 요구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카엘 5세는 추방했던 조에를 다시 궁정으로 데려와 군중들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에는 여전히 민중의 상징이었으나, 미카엘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군중들은 조에를 조롱하고, 미카엘에게 더욱 적개심을 드러냈다. 민중 봉기의 규모는 커져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시민들은 황궁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5. 파멸의 시작 : 테오도라의 황위 등극
미카엘 5세는 궁지에 몰리자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는 궁궐 안에 숨어 있던 조에의 동생 테오도라(Theodora, 980년경–1056)를 황제로 옹립하여 민심을 달래려 했다. 테오도라는 강제로 끌려 나와 황위에 올랐고, 함께 즉위한 조에와 함께 공동 여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미카엘 5세가 민심을 되돌리기는커녕, 자신의 파멸을 가속화시키는 행위였다.
밤새도록 이어진 콘스탄티노플의 봉기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폭력으로 치달았다. 1042년 4월 20일 새벽, 마침내 황궁의 방어선이 뚫리자, 미카엘 5세는 그의 삼촌과 함께 성 라자로 교회(Church of St. Lazarus)로 도망쳐 몸을 숨겼다. 한때 위세를 떨치던 황제는 이제 신의 보호를 갈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6. 굴욕적인 폐위와 비참한 죽음
민중의 봉기로 권력을 되찾은 조에 황후는 곧바로 미카엘 5세와 그의 삼촌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웠다. 그들의 죄목은 반역이었으며, 그들은 굴욕적인 처벌을 받았다. 미카엘 5세는 제위를 찬탈하고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조에를 추방하려 한 죄로 양쪽 눈이 뽑히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의 삼촌 역시 같은 형벌을 받았다.
눈이 먼 미카엘 5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스투디오스 수도원(Monastery of Stoudios)으로 유폐되었다 . 황제로 재위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다. 1042년 8월 24일, 그는 실명형으로 인한 부상으로 고통받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짧은 통치는 비잔틴 황제들이 민중의 지지를 무시하고 권력을 남용할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미카엘 5세의 몰락은 정통성의 중요성과 민심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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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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