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제논(Zeno, AD.c.425~491) : 동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74~475, 476~491)

제논(Zeno, AD.c.425~491) : 동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74~475, 476~491)

 
  • 영어 표기 : Zeno
  • Ancient Greek : Ζήνων, Zénōn (그리스 표현을 따라서 제논으로 표기한다)
  • 출생 : 기원후 425년경 / 루숨블라다(Rusumblada)
  • 사망 : 기원후 49149/ 콘스탄티노플
  • 부친 : 코디사(Kodisa)
  • 모친 : 랄리스(Lallis)
  • 배우자 : 아르카디아(Arcadia), 아리아드네(Ariadne)
  • 자식 :
    제논(Zenon) - 아르카디아(Arcadia)
    레오 2(Leo II) - 아리아드네(Ariadne)
  • 재위
    1차 : 기원후 474129~ 47519
    2차 : 기원후 4768~ 49149
 
제논(Zeno, AD.c.425~491) : 동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74~475, 476~491)
제논(Zeno, AD.c.425~491) : 동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74~475, 476~491)

동로마 제국을 구원한 이사우리아인 황제 : 제논의 격동적인 통치 (474-491)

 
5세기 후반의 로마 제국은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시기였다. 특히 서방 로마 제국이 종말을 고하던 이때, 동방 로마 제국은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존속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무려 17년 동안(474475, 476491) 제국을 통치하며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제논(Zeno, 425491) 황제이다. 이사우리아(Isauria)라는 변경 지역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했지만, 그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과 군사적 역량으로 제국을 지켜냈다.
 

1. 이사우리아 출신 타라시스, 황제의 사위가 되다 : 제논의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제논은 서기 425년경 이사우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타라시스(Tarasis)’였다. 이사우리아는 소아시아 남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로, 그곳 출신의 사람들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야만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훌륭한 군인이자 독립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타라시스는 군인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삶의 전환점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Leo I, 401474)와의 인연이었다. 레오 1세는 당시 제국 군부의 실세였던 아스파르(Aspar)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이사우리아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타라시스는 황제의 눈에 띄게 된다. 466, 그는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Ariadne, ?515)와 결혼하며 황실과 직접적인 인척 관계를 맺었고, 이때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어식인 제논으로 개명했다.
 
제논은 결혼과 함께 고위 군 지휘관으로 승진하여 제국 서방 군부 총사령관(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에 올랐다. 그는 469년 아시아 속주 관구장관(Praetorian Prefect of the East)이 된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본(Theodoric Strabo, ?481)을 경계하기도 했다. 471년에는 아스파르의 아르다부르(Ardabur)를 견제하는 데 레오 1세와 협력하여, 아스파르 일족의 숙청에 기여하며 황제의 신임을 더욱 얻었다.
 
레오 1세는 병환으로 인해 474년 어린 외손자 레오 2(Leo II, 467474)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는데, 이는 자신의 사위 제논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넘겨주면서도 이사우리아 출신인 제논의 배경이 일으킬 반감을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레오 1세는 4741월 사망했고, 어린 레오 2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며칠 뒤인 474129, 제논은 원로원과 군부의 추대를 받아 어린 황제 레오 2세의 공동 황제로 즉위하며 사실상 제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2. 제논의 첫 통치와 바실리스쿠스의 반란 (474-476)

 
제논은 동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상당한 안정을 가져오는 듯 보였다. 특히 474년에는 반달족(Vandals)의 왕 게이세리쿠스(Gaiseric)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며 해상 무역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는 이전 레오 1세 시대의 실패한 대규모 원정 이후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이사우리아 출신이라는 그의 배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통적인 로마 귀족들에게 반감을 샀고, 황후 아리아드네의 어머니이자 레오 1세의 황후였던 베리나(Verina, ?484)와 그녀의 오빠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425476)는 제논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475년 초, 베리나와 바실리스쿠스가 주도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베리나는 사위인 제논을 폐위하고 자신의 오빠 바실리스쿠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반란으로 인해 제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자신의 고향 이사우리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제논이 떠난 후 바실리스쿠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그의 통치는 매우 불안정하고 인기 없는 시기였다.
 
바실리스쿠스는 즉위 초부터 무고한 이사우리아인들을 학살하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다. 또한, 정통 칼케돈 기독교가 아닌 단성론(Monophysitism)을 지지하며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종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다. 결정적으로, 그는 동고트족의 실력자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본(Theodoric Strabo, ?481)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아스파르의 아들들 역시 소외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의 통치 기반을 심각하게 흔들었다.
 
기회를 엿보던 제논은 유능한 장군 일루스(Illus)와 아르마투스(Armatus)를 포섭하여 바실리스쿠스로부터 등을 돌리게 했다. 제논은 그들에게 고위직을 약속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476년 여름, 제논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민중과 원로원 모두 바실리스쿠스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고, 수도의 성문은 제논에게 활짝 열렸다. 바실리스쿠스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도피했으나, 결국 제논에게 투항했다. 제논은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가족을 갑파도키아(Cappadocia)의 마른 우물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 .
 

3. 서방 로마 제국의 종말과 제논의 위상 (476)

 
제논이 황위를 되찾은 476년은 로마 제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였다. 같은 해, 서로마 제국에서는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lus, 460/461507/511)를 폐위시켰다. 오도아케르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서로마 제국의 상징인 황제 휘장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논에게 보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제논을 로마 제국 전체의 유일한 황제로 인정하고, 오도아케르 자신은 제논의 대리인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겠다는 의미였다.
 
비록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이었지만, 제논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 전체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는 오도아케르의 사실상의 이탈리아 지배를 인정했고, 이로써 로마 제국의 통치 체계는 동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공식화하는 동시에,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그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두 번째 통치의 난관과 해결 (476-491)

 
황제 자리에 복귀한 후에도 제논의 통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황후 베리나의 선동을 받은 그의 동생 일루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를 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또한 자신의 매형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내부 반란 진압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
 
외부적으로는 동고트족(Ostrogoths)의 위협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제국 내에는 테오도리쿠스 아말(Theodoric the Amal, 454526)과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본(Theodoric Strabo, ?481)이라는 두 명의 강력한 동고트족 지도자가 있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위협하고 조공을 요구했다. 제논은 이 두 명의 테오도리쿠스를 서로 대립시켜 약화시키는 교묘한 외교술을 펼쳤다. 스트라본이 일찍 사망하자, 제논은 이제 위협적인 존재가 된 테오도리쿠스 아말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바로 그를 이탈리아로 보내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도록 한 것이다. 이 전략은 동로마 제국에게 동고트족의 위협을 제거하는 동시에, 명목상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동고트 왕국을 서로마 제국 영토 내에 건설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테오도리쿠스는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을 세웠다.
 

5. 종교 정책과 아카키우스 분열

 
제논의 치세 동안 종교 문제 또한 끊이지 않는 골칫거리였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지속된 기독론(Christology) 논쟁으로 인한 제국의 종교적 분열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482, 제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Acacius, 사망 489)의 조언을 받아들여 헤노티콘(Henotikon)’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니케아 신경과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을 강조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 단성론자(Miaphysites)와 칼케돈 정통론자 모두를 포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적인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의 교황 펠릭스 3(Pope Felix III, 440492)는 헤노티콘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484년 아카키우스를 파문했다. 이 사건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심각한 균열인 아카키우스 분열(Acacian Schism)’로 이어졌으며, 이 분열은 519년까지 35년 동안 지속되었다. 제논의 종교 정책은 제국 내부의 안정을 꾀했지만,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이라는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6. 제논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

 
제논은 49149,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황후 아리아드네가 궁중 관리인 아나스타시우스 1(Anastasius I Dicorus, 430518)를 황제로 선택하며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는 막을 내렸다.
 
제논의 통치기는 로마 제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 동로마 제국의 안정화 : 그는 끊임없는 내부 반란과 외부 위협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게르만족의 지배력에서 벗어나 제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이후 천 년 이상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외교적 수완 : 두 명의 테오도리쿠스를 이탈리아로 보내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게 한 그의 외교 정책은 동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서로마 제국 영토를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 이사우리아 세력의 활용 : 비록 이사우리아 출신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같은 출신 인물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이는 이후 동로마 제국의 군사 및 정치 인력 풀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논은 개인적인 인기나 혈통적 정통성은 부족했지만,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실용적인 정책과 과감한 결단을 내릴 줄 알았던 황제였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종말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동로마 제국을 새로운 시대로 이끈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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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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