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AD.c.465~511이후) :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제62대) 황제(AD.475~476)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 별명 : 아우구스툴루스(Augustulus)
- 황제 명칭 : 도미누스 노스테르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Dominus Noster Romulus Augustus Pius Felix Augustus)
- 출생 : 기원후 465년경 / 판노니아
- 사망 : 기원후 511년 이후
- 재위 : 기원후 475년 10월 31일 ~ 476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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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AD.c.465~511이후) :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제62대) 황제(AD.475~476) |
고대 로마 제국은 약 1,200년에 걸쳐 유럽과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지배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로마 제국은 끊임없는 내부 혼란과 외부 침략에 시달리며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기나긴 역사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인물이 바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이다. 그는 475년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위에 올랐다가 단 10개월 만에 폐위되며 서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말을 고했다. 그의 이름은 로마를 건국한 전설적인 인물 ‘로물루스’와 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합쳐 놓은 것이었으나, 정작 그는 제국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지극히 미미했지만, 그의 폐위는 고대 로마 시대의 종결과 중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글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짧고 허무한 치세, 그의 폐위 과정, 그리고 역사적 아이러니에 빛바랜 그의 유산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1. 어린 황제의 탄생과 가족 배경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는 약 465년경 판노니아(Pannonia)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로물루스였으며,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고유명사로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고위 장군이자 행정가였던 오레스테스(Orestes)였다. 그의 어머니는 바르바리아(Barbaria) 또는 플라비아 세레나(Flavia Serena)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판노니아 출신으로 군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이러한 배경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태어날 때부터 군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 배경이 황제로서의 역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어려서부터 정치나 군사에 대한 훈련을 받기보다는 귀족 가문의 도련님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2. 권력 찬탈의 배경 : 오레스테스의 야망과 율리아누스 네포스의 몰락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황제 즉위는 그의 아버지 오레스테스의 야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475년 당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율리아누스 네포스(Julius Nepos, 재위 474~475)였다. 율리아누스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합법적인 황제'로서 통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군부 내에서의 자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율리아누스 네포스를 축출하려 했다. 475년 8월 28일, 오레스테스는 이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율리아누스 네포스를 라벤나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율리아누스 네포스는 자신의 근거지였던 달마티아(Dalmatia)로 도피해야 했다.
오레스테스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보다는, 자신의 꼭두각시를 세워 실권을 쥐고 흔들기를 원했다. 그는 475년 10월 31일, 불과 10세였던 어린 아들 로물루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이름뿐인 황제였으며, 모든 권력은 그의 아버지 오레스테스의 손에 있었다. 이로 인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동로마 황제 제논(Zeno)으로부터 단 한 번도 정통성 있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율리아누스 네포스는 폐위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동로마 제국에 의해 정당한 서로마 황제로 간주되었다.
3. ‘작은 아우구스투스’ : 짧고 허무했던 통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황제에 올랐지만, 그의 통치는 단 10개월에 불과했다. 재위 기간 동안 그가 특별한 정책을 내놓거나, 중요한 법령을 제정했다는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그가 실제 통치자라기보다는 아버지 오레스테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존재는 지극히 미미했으며, 황제로서의 중요성은 거의 없었다.
그의 이름에 붙은 ‘아우구스툴루스(Augustulus)’라는 별칭은 그의 어린 나이를 조롱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우구스툴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으로, 당시에도 그의 권위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별칭은 그의 공식적인 칭호는 아니었지만, 당대에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의 동전에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어로는 그를 ‘모미루스(Momylus)’라고 불렀는데, 이는 ‘작은 불명예’를 뜻한다.
4. 서로마 제국의 종말 : 오도아케르에 의한 폐위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즉위는 그의 아버지 오레스테스의 정치적 야욕의 산물이었으나, 이는 결국 서로마 제국에 최후의 치명타를 안겼다. 오레스테스에게는 제국을 지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게르만 용병대(포에데라티, foederati)라는 불안정한 동맹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대규모 정착지를 요구했지만, 오레스테스는 이를 거부했다.
오레스테스의 거부는 용병대의 강력한 불만을 초래했고, 결국 헤룰리족(Heruli) 출신 용병 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Odoacer)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도아케르는 용병대를 이끌고 오레스테스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향해 진격했다. 476년 8월, 오도아케르의 군대는 오레스테스를 물리치고 그를 살해했다.
이어서 476년 9월 4일,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살해하지 않고,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카스텔룸 루쿨라눔(castellum Lucullanum)이라는 거대한 요새로 추방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 이후, 오도아케르는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왕(King of Italy)’이라 칭하며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로마 황제를 다시 옹립하지 않고, 로마 황제의 상징물(제위 상징물)을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보내 서방에는 더 이상 황제가 필요 없으며, 제논이 전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임을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5. 망명 생활과 알려지지 않은 최후 (511년 이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망명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카스텔룸 루쿨라눔이라는 안락한 저택에서 연금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480년대나 490년대에 그곳에 수도원을 설립하는 데 관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은 507년 또는 511년경에도 그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오도아케르의 후계자였던 테오도리크 대왕(Theodoric the Great)이 ‘로물루스’라는 인물에게 연금에 관한 서한을 보냈다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530년대 중반 이후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재정복 시기에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540년대 중반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이름과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다. 로마를 건국한 전설적인 인물 ‘로물루스’와 로마 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모두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멸망하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극적인 ‘어린 황제’로 기억된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그가 “로물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이어받아 욕되게 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폐위는 고대 로마 제국의 종결과 중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역사학에서 널리 사용된다. 비록 그가 황제로서 아무런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그의 폐위는 서방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스스로의 황제를 선출하고 통치할 능력이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이야기는 서방 로마 제국의 암울한 종말을 대변하는 슬픈 초상화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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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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