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네포스(Julius Nepos, AD.?~480) : 서로마 제국 제61대 황제(AD.474~475)
- 율리우스 네포스(Julius Nepos), Nepos
- 출생 : 미상 / 달마티아
- 사망 : 기원후 480년 5월 9일 / 살로나 근처
- 부친 : 네포티아누스
- 모친 :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의 누이
- 배우자 : 레오 1세의 조카
- 재위 : 기원후 474년 6월 24일 ~ 475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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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네포스(Julius Nepos, AD.?~480) : 서로마 제국 제61대 황제(AD.474~475) |
로마 제국의 역사는 장대하지만, 5세기 후반의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의 침입과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서서히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 시기, 비록 이탈리아를 잃었지만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서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어갔던 황제가 있었다. 바로 율리우스 네포스(Julius Nepos)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불리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보다 이후까지 제위 칭호를 유지하며 실제 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삶은 서로마 제국 멸망의 복잡성과,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려 했던 마지막 황제의 비극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율리우스 네포스의 생애와 즉위, 제위 찬탈과 달마티아(Dalmatia)로의 퇴각, 그리고 그의 죽음과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
1. 달마티아의 명문가 출신 : 로마 제국과의 인연
율리우스 네포스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일부인 로마 속주 달마티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465), 어머니는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이었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의 누이였다. 마르켈리누스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 달마티아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달족(Vandals)과 맞서 싸웠던 인물이다. 네포스는 이러한 군사 명문가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Leo I, 재위 457~474)의 황후 베리나(Verina)의 친척이자, 레오 1세의 조카딸과 결혼하며 동로마 제국 황실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혈연적 관계는 훗날 그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 서로마 황제로의 등극 : 글리케리우스의 폐위 (474년)
472년,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리키메르(Ricimer)가 사망한 후 서로마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473년, 리키메르의 조카 군도바드(Gundobad)가 글리케리우스(Glycerius, 재위 473~474)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글리케리우스를 찬탈자로 보고, 그의 대항마로 율리우스 네포스를 지명했다.
레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이자 새로운 동로마 황제인 제논(Zeno, 재위 474~491) 또한 네포스에게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다. 474년 봄, 율리아누스 네포스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쉽게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고 474년 6월 24일 라벤나(Ravenna) 또는 로마(Rome)에서 서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흥미롭게도 네포스는 글리케리우스를 살해하지 않고, 그를 살로나(Salona)의 주교로 임명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9세기 샤를마뉴(Charlemagne)가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로마에서 즉위한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다.
3. 이탈리아 상실과 달마티아로의 퇴각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는 서로마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서고트족에게 히스파니아(Hispania)와 갈리아(Gaul) 지역의 일부 영토를 양도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짧고 비극적이었다.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던 오레스테스(Orestes)라는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이 배신했다. 오레스테스는 로마 제국으로 편입된 훈족 출신 장군으로, 네포스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475년 8월 28일, 오레스테스는 반란을 일으켜 네포스를 이탈리아에서 축출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를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기에, 그의 근거지였던 달마티아로 퇴각했다. 비록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잃었지만, 그는 달마티아에서 계속해서 서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주장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제논 황제는 그를 정식 황제로 인정했다. 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찬탈자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4. 달마티아에서의 통치 : 이름뿐인 황제의 고군분투 (475~480년)
네포스는 달마티아에서 황제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며 잃어버린 이탈리아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제논 황제는 이탈리아의 실권자 오도아케르(Odoacer)에게 네포스를 정당한 황제로 인정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도아케르는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을 칭하며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제거했다. 그는 로마 황제의 상징물을 동로마 제논 황제에게 보내며, 서방에 더 이상 별도의 황제는 필요 없고, 제논이 전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임을 인정했다. 제논은 오도아케르의 통치를 인정했지만, 네포스를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정당한 황제로 보고 오도아케르에게 네포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네포스가 명목상이나마 서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네포스는 달마티아에서 반달족과 서고트족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통치권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군대를 재건하고 이탈리아로 복귀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은 매우 미약했다.
5. 비극적인 죽음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는 480년 5월 9일, 달마티아 살로나 근처 그의 저택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암살 배후에는 글리케리우스와 오비다(Ovida)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비다는 군인으로, 오도아케르와도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도아케르가 달마티아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기 위해 네포스를 제거하려 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네포스의 죽음 이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시켰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이 인정했던 서로마 황제의 계보는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6. 율리우스 네포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율리우스 네포스는 서로마 제국 멸망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 중 한 명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단순히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 진정한 마지막 황제 논쟁 : 일반적으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마지막 서로마 황제’로 간주된다. 이는 그가 이탈리아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으며, 그의 폐위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동로마 제국이 사망할 때까지 율리우스 네포스를 정당한 서로마 황제로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율리우스 네포스가 ‘진정한 마지막 서로마 황제’였다고 주장한다.
- 복합적인 인물 : 네포스의 이름 ‘율리우스’는 로마의 위대한 카이사르(Caesar)와 같은 이름이었으며, ‘네포스’는 ‘조카’라는 뜻으로 그의 가문과 관련이 있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외교관이었지만, 동시대의 강력한 게르만 장군들의 힘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쇠퇴해 가던 제국을 재건하려 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율리우스 네포스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멸망의 복잡한 드라마 속에서, 명예를 지키려 했던 마지막 황제의 고뇌와 그를 둘러싼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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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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