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라니오(Vetranio, AD.?~c.35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50)
- 이름 : 베트라니오(Vetranio)
- 출생 : 미상 / 모에시아(Moesia)
- 사망 : 기원후 356년경 / 비티니아(Bithynia)
- 재위 : 기원후 350년 3월 1일 ~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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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라니오(Vetranio, AD.?~c.35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50) |
4세기 로마의 예상치 못한 황제이자 특이한 찬탈자
로마 제국은 끊임없는 권력 투쟁과 제위 찬탈의 역사였다. 특히 3세기 위기 이후에도 제국의 황위는 늘 불안정했고, 많은 인물들이 권력을 쥐기 위해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 모든 황제들 중에서도 유독 특이한 사례가 있다. 바로 350년, 잠시나마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베트라니오(Vetranio)이다. 그는 찬탈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대부분의 찬탈자들과는 달리, 놀랍도록 온화한 결말을 맞이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았지만 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가 어떻게 황제가 되었고, 또 어떻게 퇴위했으며, 말년은 어떠했을까? 베트라니오의 흥미로운 생애를 함께 살펴보자.
1. 낮은 출신에서 최고 군 지휘관으로
베트라니오는 3세기 말경 로마 속주 모이시아(Moesia)에서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군대에 입대하여 비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오를 만큼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학식이 없고 인맥도 부족했지만, 황제 코스탄스(Constans, 재위 337~350)에 의해 최고 군 지휘관인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직위는 로마군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중요한 자리로, 그의 군사적 역량과 경험이 뛰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베트라니오는 이 지휘관직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350년경에는 인기와 경험을 겸비한 고위 장교로 평가받았다. 이는 그가 병사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350년, 제위 찬탈의 격동 속으로
350년은 로마 제국에 있어서 격동의 한 해였다. 이 해 초, 군 사령관 마그넨티우스(Magnentius, 재위 350~353)가 반란을 일으켜 서방의 합법적인 황제였던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마그넨티우스는 빠르게 서방 영토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베트라니오가 통치하던 일리리아(Illyricum) 속주의 경계까지 진격했다.
콘스탄스 암살 3개월 후, 베트라니오는 그의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베트라니오가 황제로 추대된 정확한 경위와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자발적인 찬탈 : 일부 학자들은 베트라니오가 콘스탄스 사후의 혼란을 틈타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고 본다.
- 정통 황제의 의도 :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재위 337~361)가 베트라니오를 사실상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아 마그넨티우스의 서진을 막으려 했다고 추정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인 콘스탄티나(Constantina)가 베트라니오를 직접 찾아가 황제 칭호를 수여하고 왕관을 씌워주며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콘스탄티나의 지지는 베트라니오에게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정통성을 일부 부여하는 효과를 주었다.
베트라니오는 황제로 선포되자마자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즉시 충성을 맹세했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 역시 베트라니오의 황제 칭호를 인정했다.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와 싸우기 전에 자신의 동방 전선을 안정화하고, 베트라니오가 자신의 충실한 대리인으로 서방의 혼란을 막아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베트라니오의 동전에는 마그넨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 두 황제 모두와 동맹 관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 새겨졌다.
3. 불편한 동맹과 평화로운 퇴위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가 동방으로 진격해 오는 것을 막는 동시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지원을 기다리는 중간자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겉으로는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실질적인 목표는 마그넨티우스의 확장을 저지하고 동방 황제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350년 12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그의 대군을 이끌고 세르디카(Serdica)에 도착했고, 베트라니오와 그의 군대를 만났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군대 앞에서 설득력 있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정통 황자임을 주장하며 군사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그 연설이 끝난 후, 베트라니오는 갑자기 그의 황제 상징물(띠와 왕관)을 벗어 콘스탄티우스 2세의 발아래 내려놓았다. 병사들은 베트라니오를 버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환호했다.
이러한 평화로운 퇴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찬탈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베트라니오를 처형하는 대신, 그에게 충분한 연금과 함께 프루사 아드 올림품(Prusa ad Olympum)의 평화로운 저택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했다. 베트라니오의 이러한 결말은 그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반역하려던 의도보다는, 오히려 마그넨티우스에 대항하는 일종의 ‘임시 황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4. 말년과 평화로운 최후
황위에서 물러난 베트라니오는 이후 6년 동안 평범한 시민으로 프루사 아드 올림품(오늘날 터키 부르사)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는 이 시기에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친구로서”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 조언은 “개인적인 지위에서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는 황제의 권좌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 자리였는지를 깨달은 베트라니오의 진심 어린 충고였을 것이다.
베트라니오는 약 356년경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로마 역사상 흔치 않게 황위를 찬탈한 인물이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눈을 감은 사례로 기록되었다.
5. 베트라니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
베트라니오의 짧고도 특이한 이야기는 4세기 로마 제국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는 비천한 출신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권력을 탐하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마그넨티우스가 로마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던 시기에, 베트라니오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정통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군대를 정비하고 반격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의 사례는 또한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정치적 지혜와 유연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베트라니오가 자신의 충실한 신하이며 잠재적인 위협이 아님을 파악하고 그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이는 무력으로 모든 반란을 진압하던 당시의 관행과는 달랐다.
베트라니오는 역사 속에서 비록 주연은 아니었지만, 격동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한 독특한 인물로 기억될 만하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 단순히 전쟁과 암살로만 점철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상치 못한 평화와 관용의 순간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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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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