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넨티우스(Magnentius, AD.c.303~353) : 로마 제국의 찬탈자(AD.350~353)
- 이름 :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Magnus Magnentius)
- 출생 : 기원후 303년경 / 갈리아의 사마로브리바(Samarobriva, 아미앵)
- 사망 : 기원후 353년 8월 10일 / 갈리아의 루그두눔(Lugdunum, 리용)
- 배우자 : 유스티나(Justina)
- 재위 : 기원후 350년 1월 18일 ~ 353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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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넨티우스(Magnentius, AD.c.303~353) : 로마 제국의 찬탈자(AD.350~353) |
마그넨티우스(Magnentius, AD. c.303~353) : 로마 제국의 찬탈자이자 비운의 황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수많은 황제들의 흥망성쇠로 가득하다. 그중 3세기의 혼란기를 지나 4세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제국은 여전히 권력 다툼과 내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그넨티우스(Magnentius)는 바로 이 시기, 로마 제국의 서방을 장악하고 합법적인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에 맞서 비극적인 내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게르만족 혈통의 군인이었던 그는 짧은 치세 동안 로마 정치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었으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글에서는 마그넨티우스의 생애와 그가 겪었던 치열한 권력 다툼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1. 출생과 초기 경력
마그넨티우스는 서기 303년경 갈리아(Gaul) 지방의 사마로브리바(Samarobriva)에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신이나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게르만족 혈통을 가진 로마의 장군으로 갈리아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민족 출신의 유능한 군인들을 등용했고, 마그넨티우스도 그러한 기회를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군대 내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다져나갔으며, 이는 훗날 그가 황제위를 찬탈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2. 황제위 찬탈: 콘스탄스의 암살 (350년)
350년 1월 18일, 마그넨티우스는 당시 서방을 통치하던 황제 콘스탄스(Constans, 재위 337~350)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재위 306~337)의 아들이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동생으로, 당시 로마 시민과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는 황제였다. 그는 사냥을 즐기고 대중과의 소통이 부족했으며, 심지어 동성애 스캔들까지 겹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그넨티우스는 병사들의 불만을 이용해 쉽게 지지를 얻었고, 갈리아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받으며 황제로 추대되었다. 콘스탄스는 마그넨티우스의 추격대에 쫓겨 피레네 산맥에서 살해당했다. 이로써 마그넨티우스는 서방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곧 브리타니아(Britannia)와 히스파니아(Hispania) 지방에서도 빠르게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그의 행정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났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한 역사가인 리바니우스(Libanius)는 마그넨티우스가 “법률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 통치의 정당성 확보 노력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스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기에, 그의 통치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콘스탄스의 형제이자 동방의 정통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 정략 결혼 :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증손녀일 가능성이 있는 유스티나(Justina)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려 했다.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로마 제국 내에서 합법적인 혈통을 통해 통치권을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 화폐 주조 : 그는 ‘로마 세계의 해방자’(liberator of the Roman world)와 같은 문구를 새긴 동전을 발행하며 자신을 억압적인 통치로부터 제국을 구원한 존재로 포장하려 했다.
- 외교적 접근 : 초기 6개월 동안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를 자신의 선임자로 언급하고 그의 이미지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자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 종교 정책 : 그는 논란의 여지가 많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주교에게 호소했고, 코스탄스가 이탈리아에서 금지했던 이교도 제사의 일부 제한을 해제하기도 했다. 이는 부유한 이탈리아 이교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스스로 이교도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지만, 그의 종교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많은 학자들은 그를 기독교인으로 보기도 하며, 그의 동전에는 기독교 상징인 키-로(Christogram)가 새겨진 것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상징이 4세기 중반에는 이미 탈(脫)기독교화되어 이교도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자를 합법적인 황제로 인정하는 것이 전례를 남길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그넨티우스에 대한 무력 진압을 준비했다.
4. 제국 내 경쟁자들과 혼란
마그넨티우스의 통치 초기는 만만치 않았다. 그가 서방의 권력을 장악하는 동안에도 여러 경쟁자들이 등장하며 그를 위협했다.
- 네포티아누스(Nepotianus)의 반란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인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Julius Nepotianus)는 로마를 장악하고 27일간 통치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고위 관리(magister officiorum)였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를 파견하여 로마를 탈환하도록 했다.
- 베트라니오(Vetranio)의 부상 : 350년 3월 1일, 일리리아(Illyria) 지방에서는 베트라니오(Vetranio)가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 콘스탄티나(Constantina)의 지지하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베트라니오는 공개적으로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그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서방으로 진군할 때까지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러한 내분은 마그넨티우스의 불안정한 지위를 더욱 부각시켰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혼란을 이용하여 서방으로의 진격을 준비했다.
5. 내전의 발발과 최후
마그넨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 사이의 내전은 350년부터 353년까지 약 3년간 지속되었다. 이 내전은 로마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351년에 벌어진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Battle of Mons Seleucus)는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마그넨티우스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세력을 잃기 시작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3년 알프스를 넘어 마그넨티우스를 추격했다. 마그넨티우스는 같은 해 7월, 몬스 셀레우쿠스(Mons Seleucus)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후 그는 루그두눔(Lugdunum, 오늘날 리옹)으로 도피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집이 콘스탄티우스의 군대에 포위되자 그의 형제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를 학대했다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료는 그가 353년 8월 10일 스스로 칼에 엎어져 자살했다고 전한다. 마그넨티우스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의 부제이자 형제였던 데켄티우스(Decentius) 역시 목을 매 자살했다.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추종자들을 뿌리 뽑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악명 높은 ‘사슬 바울’이라 불린 파울루스 카테나(Paulus Catena) 같은 인물들이 활약하기도 했다.
6. 마그넨티우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마그넨티우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 속에서 비운의 찬탈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는 짧았지만,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3세기 위기 이후 군대의 영향력이 로마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의 통치가 폭압적이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에서 빠르게 지지를 얻은 것을 들어, 그의 행정 능력이 상대적으로 유능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가 제위를 찬탈한 방식은 콘스탄티우스 왕조의 정통성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는 결국 거대한 내전으로 이어져 제국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겼다. 마그넨티우스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시기에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취약했으며, 군대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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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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