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AD.?~350) : 로마 제국의 황제 찬탈자(AD.350)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AD.?~350) : 로마 제국의 황제 찬탈자(AD.350)

 
  •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Nepotian)
  • 부친 : 비리우스 네포티아누스(Virius Nepotianus)
  • 모친 : 에우트로피아(Eutropia)
  • 황제 칭호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포필리우스 네포티아누스(Flavius Julius Popilius Nepotianus Constantin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50630/ 로마
  • 재위 : 기원후 35063~30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AD.?~350) : 로마 제국의 황제 찬탈자(AD.350)
네포티아누스(Nepotianus, AD.?~350) : 로마 제국의 황제 찬탈자(AD.350)
 

로마 제국의 짧지만 강렬했던 찬탈자

 
로마 제국의 역사는 언제나 권력 투쟁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얼룩져 있었다. 특히 4세기 중반은 콘스탄티누스 왕조 내부의 갈등과 끊임없는 황제 찬탈 시도로 혼란의 극치를 달렸다. 이 격동의 시기에, 불과 28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혈통을 이었던 네포티아누스(Nepotianus)이다. 그는 정통 황제와 찬탈자 사이의 치열한 암투 속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로마를 장악했지만,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역사 속에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권력욕과 비극적인 말년을 통해, 4세기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황제 시스템과 냉혹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1.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혈통과 숨겨진 야망

 
네포티아누스는 단순한 찬탈자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에우트로피아(Eutropia), 전설적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 재위 306~337)의 이복 누이였다. ,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손자였던 셈이다. 또한 그의 할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였고, 할머니는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Flavia Maximiana Theodora)였다. 그의 아버지 비리우스 네포티아누스(Virius Nepotianus)의 존재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명문 혈통은 네포티아누스에게 태생적인 정통성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로마의 정식 황제 서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일원으로서 그는 황위를 탐할 만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그의 세 아들 콘스탄스(Constans), 콘스탄티우스 2(Constantius II), 콘스탄스(Constans)가 제국을 분할 통치하며 내전을 반복하고 있었기에, 네포티아누스에게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기회가 끊임없이 엿보이는 시기였다.
 

2. 혼란의 350: 네포티아누스의 등장

 
350년은 로마 제국에 지독한 혼란과 권력 공백을 안겨준 해였다. 서기 350118, 서방의 군 사령관 마그넨티우스(Magnentius)가 반란을 일으켜 서방 황제 콘스탄스를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마그넨티우스는 곧바로 서방 지역의 통치권을 확보했고, 그의 권력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네포티아누스는 자신의 기회를 보았다. 그는 마그넨티우스의 찬탈로 인해 야기된 서방 제국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했다. 35063, 네포티아누스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로마에 입성했다. 그를 따랐던 것은 정식 로마군이 아닌 검투사들로 이루어진 무리였다는 기록은, 당시 로마의 군사 시스템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그리고 황제 찬탈이 얼마나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이 검투사 부대는 시민들을 위협하며 로마를 장악했고, 네포티아누스는 비록 불안정했지만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네포티아누스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마그넨티우스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도시 장관)였던 티티아누스(Titianus)는 마그넨티우스의 충신이었는데, 네포티아누스에 저항하려 했지만 곧 패배하여 도시를 떠나 도망쳐야 했다. 이로써 네포티아누스는 로마 시내에서 일시적으로 완전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불과 28일이었다.
 

3. 마그넨티우스의 반격과 비극적인 최후

 
네포티아누스의 짧은 통치는 마그넨티우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내준다는 것은 그의 정통성과 권위에 치명타였기 때문이다. 마그넨티우스는 즉시 그의 신임 받는 고위 관리인 마기스테르 오피시오룸(magister officiorum)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를 로마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네포티아누스는 마르켈리누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그의 검투사 군대는 정식 로마군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350630, 네포티아누스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참수되었고, 잘린 머리는 창에 꿰어 도시 곳곳에 전시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찬탈자에 대한 본보기이자, 마그넨티우스의 잔혹한 복수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네포티아누스의 죽음 이후에도 마그넨티우스의 복수는 계속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에우트로피아(Eutropia)와 네포티아누스를 지지했던 다른 많은 이들 역시 며칠 후 모두 처형당했다. 이로써 네포티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었던 로마 시내의 짧은 권력 다툼은 처참한 유혈 사태와 함께 막을 내렸다.
 

4. 역사에 남은 짧은 발자취와 그 의미

 
네포티아누스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4세기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하고 무자비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혈통이라는 강력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실질적인 지지 없이는 그 어떤 찬탈자도 살아남기 어려웠다. 불과 28일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로마를 장악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네포티아누스는, 4세기 로마의 정치적 불안정성과 황제의 생명이 한순간에 좌우될 수 있었던 냉혹한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의 등장은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스 황제를 암살한 이후, 로마의 정치적 공백과 혼란이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네포티아누스의 사례는 또한 로마 제국이 내부 갈등으로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국 곳곳에서 황제 찬탈 시도가 난무했고, 각 세력은 무력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제국을 파괴했다.
 
네포티아누스는 역사 속에서 비록 주연은 아니었지만, 격동의 시대에 짧고 굵은 흔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될 만하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잠시 빛나다 사라진 수많은 인물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당시 제국이 겪었던 혼란과 폭력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역사는 종종 강렬한 인물들만을 기억하지만, 네포티아누스처럼 짧지만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당대 로마 제국의 복잡하고 잔혹한 풍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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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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