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 AD.?~31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16~317)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 AD.?~31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16~317)

 

로마 제국 권력 투쟁의 희생자, 발레리우스 발렌스 황제

  • 이름 :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발렌스(Aurelius Valerius Valen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1731일 이후
  • 재위 : 기원후 31610~ 3172월경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 AD.?~31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16~317)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 AD.?~31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16~317)
 

1. 혼돈의 시대 속 짧은 등장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도입한 사두정치(Tetrarchy) 체제는 한동안 제국에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퇴위 이후 다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특히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와 동방의 리키니우스(Licinius) 아우구스투스 간의 갈등은 제국의 미래를 좌우할 최후의 대결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잠깐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비극적으로 사라진 인물이 바로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발렌스(Aurelius Valerius Valens, ?~317). 그는 짧은 재위 기간만큼이나 역사적 기록이 희미하지만, 당시 로마 제국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2. 군인의 길, 황제의 찰나

 
발레리우스 발렌스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가 권력의 중심에 나타난 것은 316년의 일이다. 당시 그는 다키아(Dacia) 지역의 군사령관, 두크스 리미티스(dux limitis, “국경의 공작”)’ 직책을 맡고 있었다. 316108, 서방을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발칸 반도에서 동방의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와 전투를 벌였고, 키발라이 전투(Battle of Cibalae)에서 리키니우스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일부 사료에서 314년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시대 자료는 317년경 발생했다고 본다.
 
키발라이 전투에서 패한 리키니우스는 시르미움(Sirmium)으로 도주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과정에서 발렌스의 도움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리키니우스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발렌스를 새로운 공동 황제,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임명했다. 이는 아마도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영향력을 대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문헌 기록에는 발렌스가 단순히 카이사르(Caesar, 부제)’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 발행된 주화들을 분석한 결과 그는 분명히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음이 확인된다. 발렌스는 사두정치 시대 황제들 사이에서 관례적으로 사용되던 발레리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3. 권위 훼손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격노

 
발렌스의 황제 임명 소식은 콘스탄티누스 1세를 극도로 격분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한 사두정치 체제는 엄격한 서열과 계승 원칙을 따랐다. 새로운 황제를 임명할 때는 기존 황제들의 동의가 필수적이었으며, 특히 갈레리우스의 죽음 이후 권력의 공백이 커지면서 이러한 절차는 더욱 민감한 문제였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동의 없이 발렌스를 황제로 삼은 것은 자신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역사가 페트루스 파트리키우스(Petrus Patricius)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발렌스의 승격 소식에 얼굴 표정과 몸의 뒤틀림으로 자신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우리가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 위해, 그리고 바다에서부터 지금 우리가 도달한 곳까지 싸우고 승리한 것이, 바로 그 끔찍한 행실 때문에 친동생 같은 처남마저 공동 통치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의 가까운 인척 관계를 부인하면서도, 그 비열한 노예(, 발렌스)를 황제단에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발렌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리키니우스가 자신의 처남(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이었음에도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미천한 출신의 발렌스를 황제로 내세운 것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불만을 여실히 보여준다.
 

4. 마르디아 전투와 불안정한 평화

 
발렌스를 황제로 임명한 리키니우스는 다시 한번 콘스탄티누스와 대결했다. 316년 말 또는 317년 초, 트라키아에서 마르디아 전투(Battle of Mardia)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키발라이 전투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전력에서 우위를 점한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자신을 상급 황제로 인정하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리키니우스의 패배로 인해 발렌스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평화 협상의 조건 중 하나는 발렌스의 황제 지위 박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연대기(Origo Constantini Imperatoris)’에 따르면, “발렌스는 다시 그의 이전 개인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발렌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5. 평화 협상과 비극적인 최후

 
두 황제 간의 평화 협정은 31731일 직전 세르디카(Serdica)에서 최종적으로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로마 제국의 통치 영역을 재분할하는 것이었다. 리키니우스는 동방, 아시아, 트라키아, 모에시아, 소 스키티아를 통치하기로 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제국의 광범위한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이 협정의 일환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1, 그리고 리키니우스의 아들 리키니우스 2세가 동시에 카이사르로 임명되며 새로운 황위 계승 구도가 확립되었다.
 
발렌스의 운명은 이 협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가 황제 지위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평화 협정의 명확한 조건이었다. 협정의 내용에 발렌스의 처형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결국 리키니우스는 발렌스를 처형했다. 발렌스는 31731일 직후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짧은 황제 재위를 마쳤다. 리키니우스는 훗날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라는 또 다른 장군을 공동 황제로 세우려 시도했으나,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그의 패배와 처형으로 이어졌다.
 

6. 역사적 의미와 유산

 
발레리우스 발렌스의 짧은 황제 재위와 비극적인 최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야심 차게 도입했던 사두정치 체제의 한계와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황제들 간의 개인적인 경쟁과 갈등이 제도적 장치마저 무력화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는 존재였다.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대립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새로운 서방 동맹을 만들고자 발렌스를 황제로 내세웠지만, 이는 결국 콘스탄티누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협상 과정에서 발렌스의 비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발렌스는 로마 제국의 전환기에 혼돈 속에서 잠시 빛났다가 스러져 간 수많은 이름 없는 인물들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정 말기 권력의 무대에서 황제의 타이틀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발렌스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더욱 촉진시켰고, 이후 리키니우스마저 그의 적수 앞에서 스러지며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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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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