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리키니우스(Licinius, AD.c.265~325년)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8~324)

리키니우스(Licinius, AD.c.265~325)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8~324)

 

로마 제국의 운명을 가른 숙명적인 라이벌, 리키니우스 황제

  •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그리스어 : Λικίνιος
  • 출생 : 기원후 265년경
  • 사망 : 기원후 325년 봄
  • 재위 : 기원후 3081111~ 324919

리키니우스(Licinius, AD.c.265~325년)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8~324)
리키니우스(Licinius, AD.c.265~325년)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8~324)
 

1. 혼돈의 로마, 그리고 등장한 한 남자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격동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사두정치(Tetrarchy)라는 독특한 통치 체제를 도입했다. 이 체제 아래 로마 제국은 네 명의 황제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 미천한 출신의 군인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그가 바로 훗날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와 제국의 운명을 건 최후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즉 리키니우스(Licinius, 265년경 325) 황제다.
 

2. 미천한 시작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리키니우스는 기원후 265년경 모에시아 수페리어(Moesia Superior) 지방의 평범한 농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군대에 입대하여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특히 훗날 황제가 되는 갈레리우스(Galerius)와는 절친한 어린 시절 친구였다. 298, 그는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동행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갈레리우스는 그를 깊이 신뢰했고, 이는 리키니우스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07,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의 특사 자격으로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막센티우스(Maxentius)와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3081111, 갈레리우스는 로마 황제 세베루스 2(Severus II)가 막센티우스에게 살해당한 후, 리키니우스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격상시켰다. 이로써 리키니우스는 발칸 반도의 일리리아, 트라키아, 판노니아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310년 사르마티아족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다.
 

3. 밀라노 칙령과 불안정한 동맹

 
3115월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동방 제국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za) 사이에 분할되었다. 리키니우스는 유럽 지역을,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아시아 지역을 차지했다. 당시 서방에서는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대립하고 있었고, 동방의 두 황제는 이들과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 놓였다.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맹을 맺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손을 잡게 되었다.
 
3133, 리키니우스는 메디올라눔(Mediolanum, 오늘날 밀라노)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여동생인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Flavia Julia Constantia)와 결혼하며 콘스탄티누스와의 동맹을 공고히 했다. 이 결혼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합을 넘어선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 황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공동으로 반포했다. 이 칙령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언하고 박해를 중단하며, 몰수된 재산을 반환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는 동방으로 돌아가 밀라노 칙령의 내용을 공포했고, 그해 614일 니코메디아(Nicomedia) 근처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대결하여 그를 물리치고 동방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전 사두정치 황제들의 친족들(다이아의 아내와 두 자녀, 세베루스의 아들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 갈레리우스의 아들 칸디디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갈레리아 발레리아 등)을 숙청했다.
 

4.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숙명적인 대결

 
밀라노 칙령 이후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통치하는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두 황제 사이의 긴장감은 높아져만 갔다. 316,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가 자신의 정적 세네키오(Senecio)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전쟁을 시작하며 첫 번째 내전이 발발했다. 리키니우스는 판노니아의 키발라이 전투(Battle of Cibalae, 316108)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패배했다. 이후 그는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를 자신의 공동 황제로 임명했으나, 트라키아의 마르디아 평원 전투(Battle of Mardia, 316년 말 또는 317년 초)에서도 다시 패했다. 이 두 번의 패배 후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화해하고 발렌스를 처형해야 했다.
 
이후 7년 동안 두 황제는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했다. 리키니우스는 318년 사르마티아족과 싸우며 국경 방어에 집중했다. 그러나 321,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신의 영토를 약탈하던 사르마티아족을 추격하다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범하면서 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콘스탄티누스는 323년 고트족과의 전투에서도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범했고, 리키니우스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비난했다.
 

5. 최후의 전투와 비극적인 종말

 
324,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의 나이 듦과 인기 없는 악덕을 빌미로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32473, 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에서 리키니우스는 병력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대패했다. 패배 후 그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퇴각하여 포위되었다. 이어 다르다넬스 해협(Hellespont)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Crispus)가 이끄는 함대에 의해 리키니우스의 해군이 격파되었다.
 
결정타는 324918일 칼케돈(Chalcedon) 근처에서 벌어진 크리소폴리스 전투(Battle of Chrysopolis)였다. 이 전투에서 리키니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누스에게 참패를 당하며 결국 항복했다. 당시 고트족 부족장 알리카(Alica)가 리키니우스를 지원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이자 리키니우스의 아내인 콘스탄티아의 중재 덕분에 리키니우스와 그의 공동 황제였던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는 처음에는 목숨을 건졌다. 리키니우스는 테살로니키(Thessalonica)에 투옥되었고, 마르티니아누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에 갇혔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가 야만족 사이에서 병력을 모아 재기하려 한다고 고발하며, 그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리키니우스는 325년 봄, 60세의 나이로 테살로니키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며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6. 로마 역사에 남긴 그림자

 
리키니우스는 로마 제국이 이교에서 기독교 시대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밀라노 칙령의 공동 반포자로 기록되었지만,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배하며 제국의 기독교화와 단일 통치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역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는 3세기 위기 이후 혼란스러운 제국 상황과 치열한 권력 투쟁, 그리고 종교적 변화의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비록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강력한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이지만, 로마 제정 말기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분명히 존재했던 한 명의 황제로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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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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