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아누스(Martinian, AD.?~325)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24)
로마 제국 황제들의 마지막 격변 속에 스러진, 마르티니아누스 황제
- 이름 : 마르티아누스(Martinianus)
- 영문 : Martinian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25년 봄
- 재위 : 기원후 324년 7월 ~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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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아누스(Martinian, AD.?~325)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24) |
1. 격변의 시대, 그림자처럼 나타난 황제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는 극심한 혼란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황제가 등장하고 사라졌으며, 내전과 끊이지 않는 외침은 제국의 기틀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혼돈을 잠재우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는 사두정치(Tetrarchy)라는 통치 체제를 확립했지만, 그의 퇴위 이후 이 시스템은 다시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와 동방의 리키니우스(Licinius)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숙명적인 대결이 로마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리키니우스에 의해 잠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곧바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 325년 사망)다. 그의 존재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군인 황제 시대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러웠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 이름과 배경 : 역사 속에 희미한 인물
마르티니아누스의 정확한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주화에 새겨진 약어 ‘Mar(...)’는 그의 노멘(nomen)이 ‘마르키우스(Marcius)’일 수도 있고, 코그노멘(cognomen)이 ‘마르티누스(Martinus)’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낳았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나 가문, 그리고 초기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황제 리키니우스의 측근이자 고위 관료인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magister officiorum)’을 지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군사적 혹은 행정적 경험을 두루 갖춘 유능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마기스테르 오피키오룸은 제국 황실의 행정, 군수, 그리고 외교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요직이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마르티니아누스가 보여준 능력은 분명 뛰어났을 것이며, 이는 훗날 리키니우스가 그를 황제로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3. 절박한 황제, 리키니우스의 선택 : 마르티니아누스의 즉위
324년은 리키니우스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두 번째 내전이 절정에 달했고, 리키니우스의 상황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해 7월 3일,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를 대파하며 승기를 잡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명목상이나마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그 자리를 메울 새로운 황제를 임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거에 그는 발레리우스 발렌스(Valerius Valens)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콘스탄티누스에 맞선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도 충성스러운 새로운 공동 통치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324년 7월, 리키니우스는 자신의 측근인 마르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는 단순히 황제 한 명을 더하는 것을 넘어선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대한 리키니우스의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도 합법적인 ‘아우구스투스’를 두어 권력의 균형을 맞추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리키니우스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마르티니아누스의 즉위는 리키니우스의 절박함만 더 보여주는 조치였다.
4. 전쟁의 소용돌이 속 짧은 역할
마르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후 맡은 주요 임무는 콘스탄티누스의 해상 진격을 막는 것이었다. 리키니우스는 아드리아노플에서의 패배 후, 콘스탄티누스가 해상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아시아 미노르로 건너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는 마르티니아누스를 다르다넬스 해협(Hellespont)에 위치한 람프사쿠스(Lampsacus)로 보냈다. 마르티니아누스의 군대에는 비시고트(Visigothic) 보조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임무는 콘스탄티누스의 함대가 트라키아에서 미시아(Mysia)와 비티니아(Bithynia)로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헬레스폰트 해전에서 콘스탄티누스의 뛰어난 해군 사령관이자 그의 아들인 크리스푸스(Crispus)가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궤멸시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상 패배는 리키니우스에게 치명타였으며, 그는 비잔티움(Byzantium)을 포기하고 칼케돈(Chalcedon)으로 후퇴해야 했다. 리키니우스는 이 시점에서 마르티니아누스에게 람프사쿠스에서 주둔 중인 병력을 이끌고 자신의 주력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마르티니아누스의 병력이 324년 9월 18일에 벌어진 크리소폴리스 전투(Battle of Chrysopolis) 이전에 리키니우스에게 도달했는지, 아니면 전투에 참전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결국 이 전투에서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
5. 황제의 지위 상실,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리키니우스와 마르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 황제는 공식적으로 퇴위를 강요당했다. 당초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복 누이이자 리키니우스의 아내인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Flavia Julia Constantia)의 간청을 받아들여 리키니우스와 마르티니아누스의 목숨을 살려주는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 리키니우스는 테살로니키(Thessalonica)에, 마르티니아누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에 갇혔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곧 자신의 관대함을 후회했다. 그는 두 전직 황제가 다시 세력을 규합할까봐 우려했고, 마침내 그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마르티니아누스는 325년 봄, 카파도키아에서 처형당하며 짧고 불운했던 황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그와 동시에 리키니우스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6. 역사에 남긴 의미 : 권력 투쟁의 희미한 흔적
마르티니아누스는 로마 제국사의 마지막 대규모 황제 간 내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라는 거인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비교적 희미하게 기억된다. 그가 황제로 재위했던 기간은 불과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사두정치 체제의 붕괴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다.
마르티니아누스의 즉위는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그리고 이미 기울어진 전세 속에서 사두정치의 명분이 얼마나 무의미해졌는지를 드러낸다. 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모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단일 황제 시대를 여는 마지막 단계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결국 시대의 큰 물결에 휩쓸려간 비운의 황제였지만, 로마 제정 말기 전환기의 혼돈과 잔혹성을 증언하는 하나의 역사적 흔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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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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