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AD.c.397~455) : 서로마 제국 제54대 황제(AD.455)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 출생 : 기원후 397년경
- 사망 : 기원후 455년 5월 31일 / 로마
- 부친 :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Anicius Probinus)
- 배우자 : 에파르키아(Eparchia), 루키나(Lucina), 루키나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
- 자녀 : 팔라디우스(Pallad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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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AD.c.397~455) : 서로마 제국 제54대 황제(AD.455) |
서로마 제국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황제
로마 제국, 특히 서방 로마 제국은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외부의 거대한 압력과 내부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는 더 이상 안정적인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으며, 탐욕과 야망에 눈먼 인물들의 암투로 얼룩진 위험한 자리가 되었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는 바로 이러한 시대에 불과 두 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비운의 황제이다.
그는 훈족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지켜냈던 영웅 아에티우스(Aëtius)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황제의 암살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길을 열었지만, 결국 반달족(Vandals)의 로마 약탈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의 짧고 강렬한 통치는 로마 제국이 직면했던 극심한 불안정성과 리더십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글에서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생애와 권력 장악 과정, 그리고 그의 비참한 최후와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
1. 명문 귀족의 성공 가도 : 화려한 초기 경력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397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비록 출신이 미천하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당대 로마의 가장 유력한 가문 중 하나인 아니키우스(Anicius) 가문과 페트로니우스(Petronius) 가문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훗날 황제가 되는 올리브리우스(Olybrius)와도 연관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니키우스 프로비누스(Anicius Probinus)였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정치가이자 세 차례나 집정관(consul)을 지낸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Sextus Claudius Petronius Probus)였다.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 내에서 매우 인상적인 경력을 쌓았다.
- 다양한 고위 관직 : 411년경 법무관(praetor)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그는 황제의 고위 행정관(tribunus et notarius), 재무관(comes sacrarum largitionum) 등을 역임했다. 특히 420년부터 421년까지 로마 시장(praefectus urbi)을 역임하며 로마 시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고, 한 차례 더 이 직책을 맡았다. 그의 두 번째 시장 재임 기간에는 오래된 성 베드로 대성당(Old St. Peter's Basilica)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 최고의 영예, 집정관과 귀족 : 421년에서 439년 사이에는 로마 제국 서부의 최고 민정관이었던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praetorian prefect)에 올랐다. 그는 433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에 임명되어 로마 국가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443년에는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고, 445년에는 제국 최고의 명예 칭호인 귀족(patrician)으로 선정되었다.
- 공공 사업 : 443년에서 445년 사이에는 로마에 자신의 이름을 딴 ‘포럼 페트로니(Forum Petronii Maximi)’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처럼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 시대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능력, 막대한 부를 이용해 제국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2. 권력 장악의 배경 : 아에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두 인물이 있었다. 훈족의 아틸라(Attila)로부터 로마를 지켜낸 ‘제국의 방패’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였다. 역사가들은 막시무스가 이 두 사람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다고 기록한다.
- 아에티우스의 제거 : 막시무스는 먼저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측근 환관 헤라클리우스(Heraclius)와 손을 잡고, 황제에게 아에티우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설득했다. 존 오브 안티오크(John of Antioch)의 기록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황제의 눈을 가려 아에티우스를 암살하게 했다고 한다. 454년 9월 21일, 아에티우스는 황제의 손에 의해 직접 살해되었다. 제국의 가장 유능한 군사 지도자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암살과 루키나의 비극 : 아에티우스의 죽음 이후,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의 자리를 요구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여기에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존 오브 안티오크의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도박에서 막시무스의 돈을 따내고, 그 담보로 막시무스의 반지를 가져갔다고 한다. 황제는 이 반지를 이용해 막시무스의 아내 루키나(Lucina)를 불러 강제로 겁탈했다. 아내의 호소에 막시무스는 복수를 맹세했지만, 그는 동시에 황제의 자리에 대한 야망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에티우스 휘하의 충성스러운 두 스키타이 전사, 옵틸리아(Optilia)와 트라우스트리아(Thraustila)를 매수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게 했다. 황제는 455년 3월 16일 로마에서 살해되었다.
3. 찬탈과 파멸의 서곡 : 짧고 혼란스러웠던 통치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 이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확보하고 궁정의 고위 관리들을 매수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이었던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 황후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더욱이 에우독시아 황후의 딸 에우도키아(Eudocia)를 자신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시켜, 그녀가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Genseric)의 아들과 약혼했던 관계를 파기했다.
이 강압적인 혼인은 에우도키아뿐만 아니라 반달족의 겐세리크 왕의 분노를 샀다. 겐세리크는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고, 그의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막시무스는 반달족의 침입 소식을 듣고 서고트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로마를 방어할 군사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병사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자신을 지키도록 명했지만 누구도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반달족이 로마로 다가오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시무스 역시 퇴각을 시도했지만, 혼란스러운 도주 와중에 경호대에게서 떨어져 홀로 남게 되었다.
4. 비극적인 최후와 로마의 약탈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통치는 그의 야망만큼이나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455년 5월 31일, 로마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도주하던 막시무스는 자신의 계획에 반대했던 로마 시민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로마 성벽 밖에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테베레 강(Tiber River)에 버려졌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막시무스의 죽음 직후, 반달족의 겐세리크는 로마로 입성하여 도시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역사에 기록된 ‘455년 로마 약탈(Sack of Rome 455)’은 410년의 서고트족 약탈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파괴적이었다. 반달족은 보물과 약탈품을 가득 싣고 떠났으며,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두 딸(에우도키아와 플라키디아), 그리고 수천 명의 로마 시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서로마 제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제국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5. 역사적 평가 : 스스로 파멸을 부른 황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의 마지막 단명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짧은 통치는 혼란과 암투, 그리고 파멸의 연속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부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권력욕과 개인적인 원한에 사로잡혀 제국의 마지막 방패를 스스로 걷어냈다. 아에티우스를 제거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한 그의 행위는 로마 제국이 겪었던 붕괴를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제국을 구원할 기회를 잡았지만, 개인적인 야망에 눈이 멀어 오히려 제국을 더 큰 혼란과 약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막시무스의 통치는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비참한 증거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권력에 대한 탐욕이 어떻게 개인의 파멸을 넘어 거대한 제국의 운명까지 뒤흔들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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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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