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AD.321~375) : 로마 제국 제48대 황제(AD.364~375)

발렌티니아누스 1(Valentinian I, AD.321~375) : 로마 제국 제48대 황제(AD.364~375)

 
  • 발렌티니아누스 1(Valentinian I), Valentinian the Great
  • 라틴어 : 발렌티니아누스(Valentinianus)
  •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Valentinian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21/ 키발라에(Cibalae), 판노니아
  • 사망 ; 기원후 3751117/ 브리게티오(Brigetio), 판노니아 발레리아(Pannonia Valeria)
  • 부친 :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Gratianus Funarius)
  • 배우자 : 마리나 세베라(Marina Severa), 유스티나(Justina)
  • 자식들 : 그라티아누스(Gratian), 발렌티니아누스 2(Valentinian II), 갈라(Galla), 그라타(Grata), 유스타(Justa)
  • 재위 : 기원후 364226~ 3751117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AD.321~375) : 로마 제국 제48대 황제(AD.364~375)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AD.321~375) : 로마 제국 제48대 황제(AD.364~375)
 

로마 제국 최후의 위대한 황제이자 폭군

 
고대 로마 제국은 수많은 강력한 황제들을 배출하며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하지만 3세기 위기 이후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과거의 영광은 퇴색하는 듯 보였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하여 제국의 서방을 안정시키고 강력한 통치력을 선보였던 인물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1(Valentinian I)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그를 로마가 배출한 마지막으로 정말 인상적인 황제라고 평가할 만큼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자 양심적인 행정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폭력적이고 잔혹한 성정을 지녀 수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복합적인 인물상은 혼돈의 4세기 로마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글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생애와 통치, 그리고 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살펴본다.
 

1. 군인 출신 황제의 탄생 : 갈라지는 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21년 로마 속주 판노니아(Pannonia)의 시발라에(Cibalae, 오늘날 크로아티아 빈코브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리로-로마(Illyro-Roman) 계통으로, 아버지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Gratianus Funarius)는 뛰어난 레슬링 기술로 유명한 군인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걸었고, 군대 내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빠르게 승진했다.
 
364225일 또는 26, 그는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Julian)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뒤이은 요비아누스 황제(Jovian)의 짧은 통치 끝에 찾아온 리더십 공백 속에서 발렌티니아누스는 군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제위에 올랐다. 그는 제위를 수락한 후, 동생 발렌스(Valens)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서방과 동방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서방 로마 제국을 통치했으며, 그의 통치는 375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로마 제국의 동서 분할 통치 체제가 사실상 굳어지기 시작했다.
 

2. 뛰어난 군사적 업적 : 국경 수호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난 황제였다. 그는 끊임없이 침략하는 게르만 부족들과 맞서 싸우며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 라인강과 다뉴브강 국경 강화 : 그는 알레만니족(Alamanni), 콰디족(Quadi), 사르마티아인(Sarmatians) 등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따라 로마 영토를 위협하는 부족들과 성공적으로 싸웠다. 그는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고, 이들 부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제국의 국경을 지켰다.
  • 브리튼과 아프리카의 반란 진압 : 그의 유능한 장군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훗날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브리튼(Britain)에서 픽트족(Picts), 스코티족(Scoti), 색슨족(Saxons) 등이 연합하여 로마군을 공격했던 대규모 음모(Great Conspiracy)’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러한 성공은 발렌티니아누스 휘하의 로마군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하며 제국 방위에 헌신하는 군인 황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은 흔들리던 제국에 잠시나마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3. 통치 철학 : 약자를 위한 통치와 엄격한 정의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느꼈으며, 로마의 상류층을 혐오했다.
 
  • 빈민 계층 보호 : 그는 로마의 14개 구역마다 의사를 두어 빈민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유아 유기를 금지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칙령을 다시 시행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교를 설립하고 라틴 학자 아우소니우스(Ausonius)를 아들 그라티아누스(Gratian)의 가정교사로 임명하는 등 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 종교적 관용과 규율 :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모든 백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다만, 특정 종류의 희생 제의나 마술 행위 등은 금지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부와 세속화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교황 다마수스 1(Pope Damasus I)를 통해 발효된 새로운 법은 성직자에게 유증을 금지했으며,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에 대한 공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그의 실용적이고 균형 잡힌 종교 정책을 보여준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숙청하고 사법 제도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등 정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겼다.
 

4. 폭력적인 성정 : 동전의 양면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는 빛나는 업적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도 드리웠다. 그는 격정적이고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발렌티니아누스가 화려하게 차려입고 교육받은 부유한 귀족들을 혐오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사소한 이유로 하인이나 수행원들을 처형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가장 악명 높은 일화는 그가 희생자들을 미카 아우레아(Mica Aurea)와 이노센스(Innocence)라는 두 마리의 곰에게 던져주어 잡아먹게 했다는 것이다. 이 곰들은 황제가 가는 곳마다 철창에 실려 따라다녔다고 한다. 비록 이 곰들은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나중에는 야생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의 잔혹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5. 아내들 : 마리나 세베라와 유스티나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사생활, 특히 그의 결혼 생활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는 처음에 마리나 세베라(Marina Severa)와 결혼하여 아들 그라티아누스(Gratian)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유스티나(Justina)라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자녀 발렌티니아누스 2(Valentinian II)와 갈라(Galla)를 두었다.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는 그의 저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발렌티니아누스가 유스티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 세베라를 부인하지 않고 유스티나와 결혼하기 위해 남자가 두 명의 합법적인 아내를 둘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발렌티니아누스를 중혼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의 기록에서만 등장하며, 당시 로마 황제가 중혼을 허용한 칙령을 발표했다는 다른 증거는 없다. 로마법에서는 이혼이 허용되었기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세베라와 이혼하고 유스티나와 재혼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른 역사가들은 세베라가 불법 거래로 인해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추방된 후 유스티나와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751117, 콰디족과의 협상 도중 사망했다. 협상 중 콰디족 대표들이 자신들의 침입을 정당화하려 하자, 그는 극도로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서방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불안정한 시대에 강력한 리더십을 잃게 만들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죽기 직전 아들 그라티아누스(Gratian)를 이미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의 사후, 그의 다른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2(Valentinian II)도 공동 황제로 추대되면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이어졌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고 제국을 방어하는 데 탁월했지만, 동시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혼란스러운 시기 로마 제국의 서방을 성공적으로 통치하고 강력한 기반을 다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의 재위는 로마 제국이 다시 한번 안정을 찾고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역사가들은 그를 단순한 폭군이 아닌, 위기에 처한 제국을 구하려 했던 최후의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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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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