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스(Valens, AD.328~378) : 로마 제국 제48대 공동황제(AD.364~378)
- 발렌스(Valens) : Ancient Greek : Ουάλης, Ouálēs
-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발렌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Valen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28년 / 치발라이(Cibalae), 판노니아 세쿤다(Pannonia Secunda)
- 사망 : 기원후 378년 8월 9일 / 아드리아노플
- 부친 :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Gratianus Funarius)
- 배우자 : 돔니카(Domnica)
- 자식들 :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카로사(Carosa), 발렌티니아누스 갈라테스(Valentinianus Galates)
- 재위 : 기원후 364년 3월 28일 ~ 378년 8월 9일 [동방]
- 공동통치 :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364~175) : 서방
크라티아누스(Gratian, 175~378) : 서방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375~378) :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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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스(Valens, AD.328~378) : 로마 제국 제48대 공동황제(AD.364~378) |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비극적인 황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장대한 서사시와 같으며, 그 안에는 영웅들의 활약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패배의 기록 또한 담겨 있다. 4세기 후반,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였고, 거대한 혼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시기, 로마의 동방을 통치했던 황제 발렌스(Valens)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성실한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 ‘아드리아노플 전투(Battle of Adrianople)’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제국의 운명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의 삶은 유능함과 결단력 부족이 어떻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발렌스 황제의 생애, 통치, 그리고 그가 직면했던 도전과 비극적인 죽음까지의 여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1. 평범한 시작과 황제로서의 등극
플라비우스 발렌스(Flavius Valens)는 서기 328년에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친카노브치 근처에 위치한 시발라에(Cibalae)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은 훗날 로마 제국 서방을 통치하게 될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321~375)였다. 발렌스의 초기 군사 경력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성실함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364년 그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발렌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의 통치 기간은 364년부터 378년까지 약 14년간 이어졌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호하지 않았으며, 동생인 발렌스가 자신의 명령에 순종적인 인물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발렌스는 형의 그림자 아래에서 제국의 동방을 관리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2. 초기 도전과 안정화 노력 : 프로코피우스의 찬탈 진압과 고트족과의 갈등
발렌스의 통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365년,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친척인 프로코피우스(Procopius, 325~366)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찬탈을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발렌스가 동방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약하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다. 발렌스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366년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를 진압하고 반란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는 발렌스에게 황제로서의 자신감과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코피우스의 반란 진압 이후, 발렌스는 제국의 북방 경계선인 다뉴브 강을 넘어 침입을 계속하던 고트족과의 전쟁에 착수했다. 367년과 369년에 걸쳐 발렌스는 고트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여 다뉴브 강 북쪽으로 고트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초기 군사적 성공은 그의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3. 동방 전선에서의 고뇌와 국내 정책
고트족과의 문제가 잠시 수그러들자, 발렌스는 로마 제국 동방의 오랜 숙적이었던 사산 페르시아(Sasanian Empire)와의 긴장 관계에 집중했다. 특히 아르메니아(Armenia)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로, 끊임없이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발렌스는 페르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페르시아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이 외에도 사라스인(Saracens)과 이사우리아인(Isaurians) 등과의 소규모 충돌도 발생하여 동방 국경은 항상 불안정했다.
국내적으로, 발렌스는 유능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시민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여주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발렌스 수도교’(Aqueduct of Valens)를 건설하는 등 중요한 공공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수도교는 로마의 모든 수도교를 합친 것보다 길었으며, 도시의 물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다소 우유부단하고 인상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군사적 능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는 또한 의심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성격으로 인해 수많은 반역 재판과 처형을 단행하여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4. 종교 정책 : 아리우스파 기독교 옹호
발렌스의 종교 정책은 그의 통치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그는 기독교 내 비삼위일체파(non-trinitarian) 중 하나인 아리우스파(Arianism)를 지지했다. 이는 정통 기독교인(니케아파)들과의 갈등을 야기했지만, 발렌스는 이교도들의 종교 문제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내의 파벌 싸움을 최소화하고, 제국 전체의 종교적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발렌스는 니케아파와 아리우스파 사이의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같은 니케아파 주요 인사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의 종교 정책은 당대 로마 제국을 휩쓸었던 격렬한 교리 논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5. 대재앙의 서막 : 고트족의 대규모 이동과 이주 정책 실패
376년, 제국에 운명을 바꿀 대사건이 일어났다. 동방에서 훈족(Huns)의 침략을 피해 대규모의 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 제국 내로 이주를 요청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 수십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무리였다. 발렌스는 이들을 제국 내에 정착시키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는 제국에 노동력과 잠재적인 병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정착 과정은 재앙 수준으로 관리되었다. 로마 관리들의 부패와 고트족에 대한 학대, 그리고 불충분한 보급 지원은 고트족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굶주림에 지친 고트족은 로마 제국 내에서 약탈과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는 376년부터 382년까지 이어진 ‘고트 전쟁(Gothic War)’의 시작이었다.
6. 아드리아노플 전투(378)와 발렌스의 비극적인 최후
고트족의 반란이 심각해지자, 발렌스는 직접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방 전선에서 회군했다. 그는 서방 황제이자 조카인 그라티아누스(Gratian, 359~383)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고트족을 독자적으로 물리쳐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오늘날 터키 에디르네) 근처에서 발렌스 황제의 로마군과 고트족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군은 고트족 기병대의 강력한 공격에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전투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발렌스 황제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정확한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한 설은 그가 전투 중 전사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부상을 입은 채 오두막으로 피신했다가 고트족에 의해 불타 죽었다는 것이다. 발렌스 황제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패배는 로마군, 특히 동방 로마군의 정예병력을 거의 전멸시켰으며, 로마 제국에 엄청난 심리적, 군사적 충격을 안겼다. 이는 ‘야만족’이 로마 영토 내로 깊숙이 침입하여 대승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7. 발렌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의 유산
발렌스 황제는 능력 있는 행정가였으며, 시민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고 중요한 공공 사업을 추진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아드리아노플 전투라는 비극적인 패배로 인해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의 우유부단함과 잘못된 판단, 그리고 서방 황제와의 협력 부족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발렌스의 죽음은 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전투 이후 로마 제국은 더 이상 ‘야만족’을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군사 전략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고, 고트족과 같은 부족들을 제국 내에 정착시키면서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발렌스는 제국의 혼란기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 노력은 비극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쇠퇴의 가속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비극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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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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