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프로코피우스(Procopius, AD.325~36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65~366)

프로코피우스(Procopius, AD.325~36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65~366)

 
  • 프로코피우스(Procopius)
  • Ancient Greek : Προκόπιος
  • 출생 : 기원후 3257/ 킬리키아(Cilicia)의 코뤼쿠스(Corycus)
  • 사망 : 기원후 366527
  • 모친 : 바실리나(Basilina)의 자매
  • 배우자 : 아르테미시아(Artemisia)
  • 자식 : 프로코피우스(Procopius)
  • 재위 : 기원후 365년 9월 28일 ~ 366년 5월 27일

프로코피우스(Procopius, AD.325~36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65~366)
프로코피우스(Procopius, AD.325~366)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65~366)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유산, 로마의 비운의 찬탈자

 
로마 제국의 4세기는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변화의 시대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재위 306~337)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제국의 황위는 여전히 불안정했으며, 끊임없는 내전과 찬탈 시도는 제국을 흔들었다.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바로 이 격동의 시기에 등장하여 잠시나마 로마 황제 발렌스(Valens)에 대항했던 비운의 찬탈자이다.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명문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학식과 교양을 겸비했던 인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의 짧은 권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는 기회를 엿보던 권력자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프로코피우스의 생애와 교육, 그리고 황제위 찬탈의 과정과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자세히 살펴본다.
 

1. 명문 혈통과 학구적인 성장

 
프로코피우스는 3257월경 소아시아 킬리키아(Cilicia) 지방의 코리쿠스(Coryc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오늘날 터키 지역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바로 혈통이었다. 그는 황제 율리아누스(Julian, 재위 361~363)의 외사촌이었다.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율리아누스(Julius Julianus)를 통해 이어진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깊은 연관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문 혈통은 그에게 로마 정치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뛰어난 학식을 자랑했다. 율리아누스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 철학과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동방 제국의 그리스어 사용 지역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그리스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학구적인 배경은 훗날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해 교육받은 철학자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 콘스탄티우스 2세 휘하의 경력과 사산 페르시아 원정

 
프로코피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Constantius II, 재위 337~361)의 치세 동안 트리부누스 엣 노타리우스(tribunus et notarius)라는 고위 관직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이 직책은 황제의 비서실과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로, 그는 이 경험을 통해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와 권력 구조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358년에는 황제의 신임을 얻어 루킬리아누스(Lucillianus)와 함께 사산 제국(Sasanian Empire)의 궁정으로 사절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외교 경험은 그의 시야를 넓히고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363, 프로코피우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사산 페르시아 원정에 동참했다. 율리아누스는 사산 제국을 단기간에 정벌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원정은 로마군의 보급 문제와 페르시아군의 저항으로 난관에 봉착했고, 결국 율리아누스 황제는 전투 중 전사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Jovian, 재위 363~364)는 페르시아와의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이때 프로코피우스는 로마군 본진과 함께하기보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유해를 안티오키아(Antioch)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임무를 마친 후, 프로코피우스는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잠시 피신하는 길을 택했다.
 

3. 황제들의 위협과 피신 생활

 
요비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후, 발렌티니아누스 1(Valentinian I, 재위 364~375)와 그의 동생 발렌스(Valens, 재위 364~378)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이들은 프로코피우스를 체포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다. 프로코피우스는 병사들에게 항복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그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술을 먹인 뒤 가족과 함께 도주했다. 그는 흑해와 타우리스 헤르소네소스(Tauric Chersonese) 지역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프로코피우스는 배신당할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지냈다. 그는 결국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스트라테기우스(Strategius)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4. 제위 찬탈 : 365년의 반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프로코피우스는 발렌스 황제의 폭정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감지했다. 특히 발렌스의 장인이자 근위장관인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탐욕스럽고 가혹한 통치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황제위 찬탈을 결심했다.
 
365928, 프로코피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고 있던 두 개의 로마 군단을 매수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병사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 이어서 그는 트라케(Thrace)와 비티니아(Bithynia) 지방까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을 동방 제국의 그리스어에 능통한 교육받은 철학자로 홍보하며, 그리스화된 동방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콘스탄티우스 2세의 미망인 파우스티나(Faustina)와 그들의 딸 콘스탄티아(Constantia)와 함께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이었다. 이는 그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유일한 적통 계승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으며,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이 행동이 그에게 큰 지지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했다.
 

5. 짧은 영광과 비극적인 최후

 
발렌스 황제는 프로코피우스의 반란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그는 즉시 아나톨리아(Anatolia)로 향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 처음에는 프로코피우스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발렌스를 압박했다. 하지만 발렌스에게는 서방 황제인 그의 형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지원이 있었다.
 
점차 전세가 불리해지자 프로코피우스 휘하의 장군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결국 3665, 그의 충신으로 여겨졌던 고마리우스(Gomarius)와 아길로(Agilo)는 프로코피우스를 배신하고 발렌스에게 투항했다. 곧이어 다른 장군인 마르켈루스(Marcellus)도 그를 버렸다.
 
궁지에 몰린 프로코피우스는 프리가아(Phrygia) 지방으로 도주했지만, 동맹이었던 고트족의 배신으로 발렌스의 손에 붙잡혔다. 그는 366527, 발렌스의 명령으로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으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유일한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다.
 

6. 프로코피우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프로코피우스의 짧은 찬탈 시도는 로마 제국의 4세기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는 3세기 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군대의 지지가 황제 권력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입증했다. 또한 그가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혈통적 연관성을 강조하고 파우스티나와 콘스탄티아를 내세웠던 전략은 당시 로마 시민들이 여전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유산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시사한다.
 
비록 그는 실패한 찬탈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그의 등장은 발렌스 황제의 통치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발렌스는 프로코피우스의 반란 진압 이후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동방 제국의 안정화에 힘쓰게 된다. 프로코피우스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진 별과 같은 존재였지만, 로마 제국의 복잡하고 격동적인 4세기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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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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