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e IX Monomachos, AD.1000/1004~1055) : 동로마 제국 제102대 황제(AD.1042~1055)
-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e IX Monomachos)
- [Greek : Κωνσταντῖνος Μονομάχ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Monomachos]
- 출생 : c.1000/1004년
- 사망 : 1055년 1월 11일
- 부친 : 테오도시오스 모노마코스
- 배우자 : daughter of Basil Skleros, Maria Skleraina, Zoe Porphyrogenita
- 자녀 : Anastasia
- 재위 : 1042년 6월 11일 ~ 1055년 1월 11일
- 대관식 : 1042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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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9세 황제의 모자이크 |
1.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 : 낭비와 영광이 교차한 비잔틴의 마지막 ‘현자’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e IX Monomachos, 1000년경/1004년경–1055년 1월 11일)는 1042년 6월 11일부터 1055년 1월 11일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11세기 전반기의 경제적 번영과 선대 황제들의 정복 사업으로 축적된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비교적 풍요로웠다. 그러나 그는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말년에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등 군사적, 외교적으로도 다양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종종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 시대의 마지막 효과적인 황제로 평가되기도 한다.
2. 파란만장한 권력으로의 여정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는 1000년경 또는 1004년경 안티오키아(Antioch)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모노마코스(Theodosios Monomachos)는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와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960–1028) 시대의 고위 관료였으며, 명성 높은 모노마코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가문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젊은 콘스탄티노스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미래 또한 불확실해졌다. 그의 지위는 두 번째 아내가 된 바실 스클레로스(Basil Skleros)의 딸, 즉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968–1034) 황제의 조카와의 결혼으로 개선되었다. 이후 그는 황후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ë Porphyrogenita, 978경–1050)의 눈에 띄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미하일 4세(Michael IV the Paphlagonian, 1010년경–1041) 황제에 의해 레스보스 섬(Lesbos)의 미틸리니(Mytilene)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1042년, 미하일 4세의 사망과 미하일 5세(Michael V Kalaphates, 1015–1042)의 폐위로 혼란에 빠진 콘스탄티노플에서 조에 황후와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 980년경–1056)는 잠시 공동 통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두 자매의 갈등이 심화되자, 조에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남편을 찾았고, 이때 콘스탄티노스를 유배지에서 불러들였다. 결국 1042년 6월, 조에는 콘스탄티노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로 옹립했다. 이로써 그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조에와 테오도라 두 여제와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3. 낭비적인 통치와 궁정의 모습
콘스탄티노스 9세의 재위 기간은 사치와 낭비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선대 황제들의 정복 사업 덕분에 풍부한 재정을 물려받았고, 이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는 돈이나 토지, 세금 면제 등의 형태로 많은 선물을 베풀었고, 특히 종교계에 대한 지원이 두드러졌다. 그는 조에와 테오도라의 승인 아래 모든 결정을 내렸으며, 모든 공식 행사에서 두 여제는 그의 곁에 있었고, 그들의 이름은 공적인 찬양에 함께 포함되었다.
황제가 된 그는 쾌락을 추구하고 음모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아내의 친척이었던 마리아 스클레라이나(Maria Skleraina)를 비롯해 ‘알란족 공주’ 등 여러 정부를 두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마리아 스클레라이나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녀에게 ‘세바스테(sebaste)’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그녀를 조에와 테오도라 다음 가는 서열에 두려 했다. 이는 1044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봉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마리아 스클레라이나가 조에와 테오도라를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을 믿었고, 결국 조에와 테오도라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안전함을 보여준 후에야 소요가 진정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통치 스타일이 황실 내의 불화와 민중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군사적 도전과 제국의 방어
콘스탄티노스 9세의 재위 기간은 제국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 마니아케스 반란(1042-1043) : 제위 초, 유능한 장군 게오르게스 마니아케스(George Maniakes)가 이탈리아에서의 지휘권을 박탈당하자 1042년 9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마니아케스는 군대를 발칸반도로 이동시켜 콘스탄티노스 9세의 군대를 전투에서 거의 격파할 뻔했으나, 전투 중에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위기가 진정되었다.
- 루스-비잔틴 전쟁(1043) : 마니아케스 반란 직후, 키예프 루스(Kievan Rus')의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루스군은 마니아케스 반란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비잔틴은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사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평화 협상의 일환으로 콘스탄티노스 9세는 자신의 딸 아나스타시아(Anastasia)를 키예프의 미래 대공인 프세볼로드 1세(Vsevolod I of Kiev)와 결혼시켰고, 그의 손자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Vladimir II Monomakh)는 콘스탄티노스의 성인 ‘모노마코스’를 상속받기도 했다.
- 페체네그족 침략 : 1048년부터 발칸반도에서는 페체네그족(Pechenegs)의 대규모 침략이 시작되어 제국에 큰 부담을 안겼다. 이들의 약탈은 제국의 국방력을 시험대에 올렸다.
- 튀르크족의 부상 : 동방에서는 셀주크 튀르크(Seljuq Turks)의 부상이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군사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스 9세는 바실리우스 2세 시대에 확립된 제국의 국경을 대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부유한 아르메니아 왕국인 아니(Ani)를 합병하여 제국의 동방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재위 기간이 군사적으로 전반적인 후퇴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5. 대분열과 외교적 노력
콘스탄티노스 9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는 1054년에 발생한 동서 교회 대분열(Great Schism)이었다. 로마 교황 레오 9세(Pope Leo IX)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arios) 사이에 상호 파문이 오가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영구적으로 분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이러한 분열이 가져올 정치적, 종교적 파장을 인식하고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총대주교와 교황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으나, 결국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그의 통치에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비잔틴 제국이 이후 서유럽과 맺을 관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6. 말년과 평가
콘스탄티노스 9세는 1055년 1월 11일, 50대 초반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가 잠시 단독 여제로서 제위를 계승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낭비적인 지출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의 재정적 번영을 즐기게 해준 황제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르네상스’적 요소가 계속 유지되었으며, 그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법학부와 철학부를 재건하여 비잔틴 제국의 교육 및 학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그의 개인적인 성향과 일부 정치적 실책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9세는 바실리우스 2세의 강력한 통치 이후에도 제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경제적 번영을 지속시켰으며, 마케도니아 르네상스의 마지막 황제로 평가받는 등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는 화려함과 동시에 내외적인 도전이 교차하던 복잡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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