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대홍수를 다스린 영웅, 우(禹)의 위대한 삶과 업적
중국 고대 신화 속 전설적인 인물이자 하(夏) 왕조의 시조로 알려진 우(禹, ?~?)는 대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려 백성을 구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가족 세습' 왕조를 연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는 치수(治水) 사업에서의 헌신과 탁월한 능력으로 후대에게 '대우(大禹)'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의 8대손인 우는 요(堯) 시대에 하백(夏伯)으로 봉해지기도 했으며, 도교에서는 수관대제(水官大帝), 수선존왕(水仙尊王)으로도 추앙받는다. 휘는 사문명(姒文命)이다.
1. 대우의 탄생과 초기 생애
우는 석천(石泉)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구체적인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어떤 기록은 그가 지금의 쓰촨성 문산군 광유현(汶山郡廣柔縣) 출신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기록은 촉(蜀) 서천(西川)의 석뉴(石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곤(鯀, ?~?), 어머니는 여지(女志)이다. 곤은 황제의 8대손인 우와 마찬가지로 전욱(顓頊)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요순 시대에 중국을 덮친 대홍수는 백성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요 임금은 곤에게 이 재앙을 해결하도록 명했다.
2. 아버지 곤의 실패와 대홍수의 재앙
곤은 요 임금의 명을 받아 9년 동안 치수 사업에 매달렸지만, 그는 물길을 다스리지 않고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방식만을 고수했다. 결국 곤의 치수는 실패로 돌아갔고, 백성들의 고통은 깊어졌다. 순(舜) 임금은 곤의 무능함에 분노하여 우산(羽山)에서 그를 처형했다. 이처럼 치수 사업은 당시 중국 사회의 존망이 달린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 곤의 실패는 또 다른 유능한 지도자를 요구했다.
3. 치수 사업의 성공 : 대홍수를 다스리다
순 임금은 곤의 아들인 우를 치수 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아버지가 실패한 임무를 물려받은 우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는 단순히 둑을 쌓아 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강과 산의 지형을 면밀히 파악하고 물길을 터서 바다로 흐르도록 하는 '소통(疏通)'의 방법을 사용했다. 우는 13년 동안 쉬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수 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치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삼과기문이불입(三過其門而不入)'의 고사가 전해질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이러한 우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대홍수는 진정되었고, 백성들은 안전하게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성공적인 치수 사업은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4. 하(夏) 왕조의 건립과 통치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우는 요 임금에 의해 하백(夏伯)으로 봉해졌고, 순 임금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것을 하늘에 추천했다. 순 임금이 승하한 후, 우는 순의 아들 상균(商均)에게 제위를 양보하며 사양했지만,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상균을 떠나 우에게 복종했다. 이에 우는 제위에 올라 기원전 2070년부터 2061년까지 약 9년간 통치했으며, 양성(陽城)에 도읍을 정하고 하(夏) 왕조를 건립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양(禪讓)'이 아닌 '가족 세습'에 의해 왕조가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우는 통치 기간 동안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구주 공법(九州貢法)'을 제정했다. 이는 당시 농업 생산의 1/10을 세금으로 거두는 방식으로,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희중(奚仲)에게 거정(車正)이라는 관직을 맡겨 수레 제작과 관리, 깃발 제도를 정비하게 하여 신분에 따른 구별을 두었다. 우는 미주(美酒)를 싫어하고 선한 말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치우(蚩尤)의 후손으로 알려진 삼묘(三苗)족을 정벌하여 중원 지역의 질서를 확립하고 국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삼묘족은 황하 유역에 살던 부족으로, 화하(華夏) 부족 연맹과 오랫동안 대립해 왔으며, 요순 시대에도 끊임없이 충돌했다. 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삼묘족을 격파하여 중원의 패권을 확립했다.
5. 요순우(堯舜禹)의 비선양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요, 순, 우는 평화로운 선양을 통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이와 다른 주장이 제기된다. 진(晉)나라 때 발견된 고대 문헌인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서는 순이 요를 감금하고 제위를 찬탈했으며, 우 역시 순에게 왕위를 강제로 넘겨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대에도 조비(曹丕, 187~226)가 한(漢) 헌제(獻帝)의 제위를 찬탈한 후 "순과 우의 일은 이제 알 만하다"고 탄식하거나, 이백(李白, 701~762)의 시 '원별리(遠別離)'에서 "요는 유폐되고 순은 들에서 죽었다"고 노래한 것은 이러한 비선양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6. 대우의 계승과 죽음
우는 처음에 자신을 이을 후계자로 고요(皋陶, ?~?)를 지명했으나, 고요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익(益, ?~?)을 다음 후계자로 추천했다. 재위 10년째 되던 해, 우는 동방 순찰을 위해 회계(會稽)로 가던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계(啟, ?~?)는 익에게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하 왕조를 세습했다. 이 사건은 중국 고대 정치 체제가 선양에서 세습으로 전환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우의 시신은 회계산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들 계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绍兴)에 있는 회계산에 대우릉(大禹陵)을 건립했다. 이 능은 우릉, 우사(禹祠), 우묘(禹廟)의 세 가지 주요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오싱 우릉촌에는 우의 후손인 사(姒)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우의 묘를 지켜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는 단순한 전설 속 인물이 아닌, 실제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치수 사업은 고대 중국 문명의 기초를 다졌고, 그가 세운 하 왕조는 중국 최초의 국가 형태를 제시하며 후대 왕조들의 모범이 되었다. 대우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재난을 극복하고 사회를 건설하는 지도자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7. 우의 초상화
순우 원년(1241년), 송나라 이종(理宗, 1205–1264)은 태학(太學, 국가 최고 교육기관)에 직접 찾아가 〈도통십삼찬(道統十三贊)〉이라는 글을 지었다. 이후 마린(馬麟, 활동 시기: 1195–1264)에게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유교의 도통(道統)과 정치적 정통성(政統)을 하나로 합치려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그 중 다섯 폭만이 전해지며, 이를 합쳐 「도통오상(道統五像)」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 〈복희상(伏羲像)〉에는 마린의 서명이 남아 있지만, 나머지 네 폭에는 서명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작품의 화풍은 매우 유사하며, 그림 상단에 모두 송나라 이종의 친필 찬문이 있어, 모두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 분명하다.
![]() |
우의 초상화 |
이 중 〈우(禹)상〉에서는 우의 모습이 당당하고 위풍이 있으며, 필치는 힘차고 굳세어 황제의 위엄 있고 단정한 태도를 생생하게 종이 위에 드러내고 있다. 이는 마린이 그린 대형 족자 중에서도 공을 들인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