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타키투스(Tacitus, AD.?~276) : 로마 제국 제38대 황제(AD.275~276)

타키투스(Tacitus, AD.?~276) : 로마 제국 제38대 황제(AD.275~276)

 

원로원 권위의 복원을 시도하고 고트 격퇴로 이름을 남긴 황제

 
타키투스는 27512월경부터 2766월경까지 재위한 로마 황제이며, 즉위 직후 고트족과 헤룰리족을 상대로 원정을 전개하여 고티쿠스 막시무스(Gothicus Maximus)’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짧은 재위에도 원로원의 권능을 되살리려는 정치적 시도와 동방ㆍ발칸 전선의 급한 불을 끈 군사적 조처로 기억된다. 그의 치세는 전임 아우렐리아누스의 암살 이후 동요하던 제국을 합법성과 질서의 언어로 수습하려는 과도기적 장면을 보여준다.
 
타키투스(Tacitus, AD.?~276) : 로마 제국 제38대 황제(AD.275~276)
타키투스(Tacitus, AD.?~276) : 로마 제국 제38대 황제(AD.275~276)

출신과 초기 경력, ‘일리리쿰계 군사 엘리트의 맥락

 
타키투스의 출생ㆍ가계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즉위 후 자신을 움브리아의 대부호이자 역사가 타키투스의 후예로 포장하는 설화가 유포되었다. 그러나 현대 연구는 역사가 타키투스와의 혈연을 부정하며, 그가 일리리쿰계 군사 엘리트 출신으로 정치에 진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는 긴 경력 동안 민정ㆍ군정의 요직을 거쳤고, 발레리아누스 치세와 273년에 각 1회씩, 도합 두 차례 집정관(Consul)을 역임하여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이후의 즉위, ‘원로원 선거설군단 추대설의 교차

 
아우렐리아누스가 피살된 뒤 군대가 스스로의 역할을 반성하며 후계 선정을 원로원에 일임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타키투스가 275925일 원로원에서 선출되었고, 군대가 이를 환영했다고 서술하며, 사실이라면 그는 원로원이 선출한 마지막 황제가 된다. 다만 조시무스와 조나라스는 원로원의 관여 없이 군대가 타키투스를 즉위시켰다고 하므로, 원로원 선거서사는 부분적으로 가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선포 시점은 11월 말~12월 초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울피아 세베리나의 공백기 통치가설은 최근 연구에서 부정되는 추세이다. 타키투스는 즉위 직후 아우렐리아누스의 신격화를 추진하고, 암살 가담자들을 색출ㆍ처벌하였다.
 

원로원 권능 복원 시도, 제정의 옛 껍질을 되살린 실험

 
타키투스는 원로원에 대해 황제ㆍ집정관ㆍ속주 총독의 임명권, 모든 재판에 대한 최종 항소권, 일부 재정 부문에 대한 관리권 등 광범위한 특권을 법제화하여 부여했다. 뒤이어 집권한 프로부스가 표면적으로는 이를 존중했으나, 수십 년 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체제 개편 속에 이러한 권능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타키투스의 복원은 제정의 공화적 외피를 되살리려는 의욕을 보여주지만, 구조적 추세를 바꾸기에는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았다.
 

동방 민족집단 토벌과 고티쿠스 막시무스칭호

 
아우렐리아누스의 동방 원정에 동원되었다가 주인이 사라지자 약탈로 돌아선 용병 집단을 진압하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타키투스와 프라이토리아누스 총관이자 이복형제로 전해지는 플로리아누스는 헤룰리족 등 복수의 집단을 격파했고, 이 승리로 황제는 고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영예 칭호를 받았다. 이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느슨해진 동방 질서를 재정비하고 변방 기강을 회복하려는 초기 성과로 해석된다.
 

서방 급보와 귀환 도중의 죽음, 상이한 전승의 정리

 
타키투스는 갈리아 방면의 프랑크ㆍ알레만니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서방으로 향하던 길에 카파도키아의 티아나에서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이 전승을 공유하며, 재위 약 6개월 남짓의 짧은 치세였다. 반면 조시무스는 그가 친족을 시리아의 요직에 앉힌 뒤 암살당했다고 전하므로, 사인ㆍ정황에는 사료 간 차이가 존재한다. 공통분모는 2766월경 티아나에서의 사망이라는 지점이다.
 

노년 황제의 이미지와 실제 연령, 그리고 평가의 논점

 
고대 전승은 타키투스를 고령의 원로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50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원로원 선거서사를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그가 공화정적 합법성을 복구하려 했다는 상징성이 커지지만, 군단 추대설을 감안하면 원로원과 군단의 양면 승인을 받은 과도기 황제라는 성격이 더 정확하다. 어느 쪽이든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체제의 승리 서사를 이어받아 전선 수습 + 원로원 복원이라는 두 축으로 질서 회복을 시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사료 비판과 전승의 결합, ‘믿을 만한 층위를 고른다

 
타키투스를 다루는 전승은 종종 상징ㆍ미화가 섞여 있다. 초상ㆍ동전ㆍ비문과 같은 물질 자료, 아우렐리우스 빅토르ㆍ에우트로피우스ㆍ조시무스ㆍ조나라스 등 다원적 서술의 교차가 필수적이다. 특히 원로원 선거ㆍ공백기 통치ㆍ사인 등 핵심 논점은 사료 간 서술이 달라 단정에 신중해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한 채 재위 기간ㆍ주요 조치ㆍ사망지같은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서술할 때 오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타키투스 치세의 구조적 의미, ‘질서의 언어를 복구한 과도기

 
군사적으로는 동방의 약탈 세력을 철수시키고 발칸 방면의 불안 요소를 억제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원로원의 역할을 법제 차원에서 복구했다. 다만 제국을 재통합한 대개혁의 주인공은 아니었고, 그의 조치 상당수는 후대 체제 개편 속에 소멸하였다. 그럼에도 아우렐리아누스의 정상화를 제도 언어로 연결하고, 원로원군단 양자 간의 합의 공간을 잠시 복원했다는 점에서 과도기의 의미가 분명하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7511~12월경 : 타키투스가 즉위하다. 원로원 선거설과 군단 추대설이 병존한다.
  • 275~276년 초 : 동방의 약탈 집단을 토벌하고 헤룰리 등 복수 부족을 격파하여 고티쿠스 막시무스칭호를 얻다.
  • 2766월경 : 갈리아 침입 급보에 대응하여 귀환 길에 오르다 카파도키아 티아나에서 사망하다. 열병설과 암살설이 병존한다.
 

사료 길잡이

 
  • 기본 약력ㆍ군사 원정ㆍ칭호는 표제 개요와 본문 전반에서 교차 확인된다 .
  • 즉위 경로ㆍ원로원 권능 복원ㆍ공백기 통치설의 수정은 최근 개설과 고전 사료의 대조를 통해 정리된다 .
  • 사인과 말년은 고대 사가들의 진술이 갈리므로, 빅토르ㆍ에우트로피우스ㆍ조시무스의 대목을 함께 참조해야 한다.
 

맺음말

 
타키투스의 6~7개월은 원로원 권위의 복원변방 기강 수습으로 요약되는 과도기의 시간이었다. 원로원 선거서사와 군단 추대설이 교차하는 즉위 맥락 자체가 3세기 제정의 복합 합법성을 드러내며, 그의 사망 이후 곧 전개된 플로리아누스·프로부스의 전개는 속도와 합의의 균형이 무너지면 권력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는지 보여준다. 짧은 재위에도 타키투스가 남긴 제도적 흔적과 군사적 조정은 위기의 세기가 버틴 이유를 설명하는 한 요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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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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