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AD.c.214~275) : 로마 제국 제37대 황제(AD.270~275)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AD.c.214~275) : 로마 제국 제37대 황제(AD.270~275)

 

아우렐리아누스, ‘세계를 되돌린 자가 완수한 재통합의 시간

 
아우렐리아누스는 270년부터 275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전임 퀸틸루스(Quintillus) 뒤를 이어 즉위하여, 재위 5년 만에 동서로 갈라진 제국을 실전 승리로 재결속시키고 뒤이어 타키투스(Tacitus)에게 바통을 넘겼다. 짧은 치세에도 팔미라와 갈리아의 분열 정권을 차례로 흡수하여 영토ㆍ권위ㆍ의전을 정상 상태로 복귀시켰다는 점에서 전환기의 결정적 인물로 평가된다.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AD.c.214~275) : 로마 제국 제37대 황제(AD.270~275)

출신과 초기 경력, ‘기병 장교의 별이 떠오르다

 
그의 초기 생애는 단편적으로만 전한다. 확실한 것은 역세의 한복판에서 군사 능력으로 평판을 쌓아 올랐다는 점이다. 사료 중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무용담은 종종 과장되거나 독립 증거가 없어 비판적 독해가 요구되지만, 갈리에누스(Gallienus) 치세의 기병군과 연계되어 경력을 다졌고, 클라우디우스 2(Claudius II) 즉위 초에는 그 정예 기병을 지휘하는 위치에서 역사 무대 전면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의 정세, ‘위기의 세기에 요구된 속도와 결단

 
아우렐리아누스가 권좌에 올랐을 때 제국은 변방 침입ㆍ내전ㆍ역병이 교차하는 위기 국면에 놓여 있었다. 그는 야전 장수의 장점인 민첩성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방어선의 구멍을 메우는 동시에 반격의 축을 세우는 이중 작전을 전개하였다. 재위 초기는 군대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승리를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팔미라 제국의 흡수, 동방 재건의 첫 고비를 넘다

 
그는 동방에서 팔미라 정권을 굴복시켜 제국의 핵심 속주들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도 다시 제국의 지배 아래 편입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왕궁 지구 브루케이온이 소실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도서관의 잔존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브루케이온의 화재는 회복 과정에 수반된 상흔으로 후세에 회자되었다.
 

갈리아 제국 정복, 샬롱(Châlons)의 결전과 선전의 그림자

 
동방 수복을 마친 뒤 그의 시선은 갈리아 제국으로 향하였다. 274년 초 북부 갈리아로 진입한 아우렐리아누스와 갈리아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샬롱 근교에서 격돌하였다. 일부 고전 사료는 테트리쿠스가 전투에 앞서 배신을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현대 연구는 로마 선전의 산물일 가능성을 지적한다. 전과의 핵심은 더 높은 군 기율과 아우렐리아누스의 지휘 능력이었고, 테트리쿠스가 전장에서 포로가 된 뒤 갈리아군의 사기가 붕괴하면서 전면 항복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정상화의 언어’, 칭호ㆍ의전ㆍ도시 개명으로 권위를 복구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제도 언어로 번역하는 데도 능했다. 그의 공식 명칭과 승전 칭호는 ‘restitutor orbis(세계를 되돌린 자)’ 같은 표어와 함께 전제국에 유통되었다. 사후 원로원 강경파가 일시적으로 그에게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을 적용했으나 연말 전에 취소되었고, 선왕 클라우디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신격화되어 Divus Aurelianus로 추앙되었다. 프랑스의 오를레앙(Orléans)은 그가 재건 후 붙인 ‘Aurelianum’에서 유래했다는 지명사의 흔적도 남아 있다.
 

주화와 개혁의 단서, ‘숫자가 말하는 표준의 회복

 
그의 치세를 전후하여 주화 합금 비율을 명시하는 관행이 확산되었다. 후대 타키투스와 카루스가 은 10% 표기를 뜻하는 XI 또는 IA 전설을 새긴 주화를 발행한 사실은, 쇠퇴했던 화폐 질서가 재조정되는 흐름의 신호로 읽힌다. 제국의 회복은 전장 승리와 더불어 화폐·세제·상거래의 신뢰를 복구하는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도 진행되었다.
 

울피아 세베리나와 공백기, ‘사후 권력에 관한 신중한 추정

 
그의 죽음 직후 황제 선출까지의 공백을 시사하는 자료가 남아 있고, 황후 울피아 세베리나(Ulpia Severina)274년에 이미 아우구스타 칭호를 부여받은 이후 잠시 독자 통치했을 가능성에 대한 추정도 존재한다. 다만 이 대목은 동시대 주화 몇 종과 일부 문헌의 암시를 근거로 한 제한적 가설에 가깝다. 확인 가능한 것은 울피아의 이름으로 보이는 몇몇 주화가 그의 사후 시점에 주조된 정황뿐이다.
 

사료 비판과 군사 엘리트, ‘신뢰할 수 있는 맥락의 경계선

 
아우렐리아누스의 무용담을 풍성하게 보태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독립 증거 없이 과장된 대목이 많다. 그럼에도 그는 갈리에누스 시대의 기병군과 확연히 연관되며, 클라우디우스 2세 치세 초의 확실한 문맥에서 그 기병을 지휘한 인물로 떠오른다. , 허구의 장식은 걷어낼지라도 정예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실체는 또렷하다.
 

유산과 평가, ‘결정적 전투 + 정상화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유산은 두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팔미라와 갈리아의 분열 정권을 연속 격파한 실전 성과이다. 둘째, 칭호ㆍ의전ㆍ지명ㆍ주화 같은 상징 장치를 통해 회복된 질서를 보이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원로원의 일시적 반발과 기억 말살 시도는 곧 되돌려졌고, 그는 신격화와 더불어 정상화의 시그널을 제국에 광범위하게 남겼다.
 

간단 연표

 
  • 270: 퀸틸루스 뒤를 이어 즉위하고 전선을 정비하다.
  • 272~273년경 : 팔미라 정권을 굴복시키고 이집트를 재수복하다. 알렉산드리아 왕궁 지구 브루케이온이 소실되다.
  • 2742~3: 샬롱 전투에서 테트리쿠스를 격파하고 갈리아 제국을 흡수하다.
  • 274: 울피아 세베리나가 아우구스타로 선포되고, 일부 주화가 사후 시점에까지 이어진 정황이 보이다.
  • 275: 원로원의 기억 말살 시도가 연내에 취소되고, 아우렐리아누스가 신격화되다.
 

사료 길잡이

 
  • 즉위ㆍ승계ㆍ재위 연도와 직함, 그리고 레지널 타이틀표기는 정식 연표와 표제 자료로 확인된다 .
  • 팔미라ㆍ갈리아 정복, 샬롱 전투의 배경과 배신 설에 대한 현대 학계의 재평가는 전투ㆍ주화 전환 자료를 교차해 읽을 필요가 있다 .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전승의 과장 가능성과 기병 지휘관으로서의 실체는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
  • 사후 공백기ㆍ울피아 세베리나의 역할ㆍ오를레앙 지명 유래ㆍ기억 말살과 신격화는 유산전승항목에서 요약된다.
 

맺음말

 
아우렐리아누스의 치세는 결정적 전투질서의 정상화가 결합될 때 제국이 얼마나 빨리 회복 탄력을 되찾는지를 증명한 시간이었다. 동방과 서방의 수복, 주화와 의전의 재정비, 사후의 신격화까지가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승리는 선전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어야 오래간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그 구조를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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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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