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아누스(Florianus, AD.?~276) : 로마 제국 제39대 황제(AD.276)
플로리아누스, 타키투스의 뒤를 이은 과도기의 황제
플로리아누스는 276년에 황제로 선포되어 매우 짧은 기간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그는 전임자 타키투스(Tacitus, 생년 미상~276)의 사후 권력을 승계하려 했으나, 동방 군단이 아우렐리아누스의 계승자 노선을 잇는 프로부스(Probus, 232~282)를 옹립하면서 내전에 직면하였다. 재위는 수주에서 길어야 석 달 남짓으로 추정되며, 276년에 종말을 맞았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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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아누스(Florianus, AD.?~276) : 로마 제국 제39대 황제(AD.276) |
출생ㆍ가문과 이름, 전승이 말해 주는 최소 정보
플로리아누스의 본명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Marcus Annius Florianus)로 전한다. 그의 가문은 ‘안니이(Annii)’ 계통으로 분류되며, 구체적 출생지는 전하지 않는다. 후기 전기에 보이는 “타키투스의 친ㆍ이부형제”라는 서술은 권력 정당화용 전승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며, 오늘날에는 신중하게 다뤄진다.
타키투스 치세의 프라이토리움 총관, 그리고 황제 선포
플로리아누스는 타키투스 재위 말에 프라이토리움 총관(근위대 장관)을 지낸 것으로 정리된다. 타키투스가 갑작스럽게 붕어하자 이탈리아와 서방의 병력ㆍ행정 기반을 장악한 그는 즉시 황제를 칭하고 주화 발행과 관료 명령을 통해 통치의 외피를 가동하였다. 프라이토리움 총관 경력과 근위대 기반은 그의 “즉각적 권력 승계”의 핵심 자원이었다.
276년 여름, 프로부스와의 충돌 구도
동시에 동방 군단은 일리리쿰계 정예 지휘관 프로부스를 황제로 추대한 뒤, 아시아 방면에서 서진하였다. 플로리아누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해 킬리키아 일대를 장악했으나, 무더위ㆍ보급ㆍ지형 등 불리한 조건에서 기동전에 능한 프로부스군과 장기 대치에 들어갔다. 수적 우세를 조직력으로 바꾸지 못한 채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타르수스 주변에서의 최후, ‘병사들에 의한 살해’ 전승
대치가 길어지는 동안 불만이 쌓인 병사들은 276년 늦여름 타르수스(Tarsus) 인근에서 플로리아누스를 살해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가 “살해된 로마 황제”로 분류되는 점, 그리고 사망 연대가 276년으로 정리되는 점은 표준 분류가 일치하는 사실 골격이다. 재위 기간의 극단적 단명과 폭력적 결말은 3세기 위기의 권력 작동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짧지만 분명한 재위’의 흔적, 주화와 칭호
그의 주화에는 통상 ‘IMP C M AN FLORIANVS AVG’ 범례가 새겨져 황제 칭호가 정식으로 선언되었음을 보여준다. 주화의 상대적 분량은 재위가 ‘수주’라는 최단 기록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며, 최소 한두 달 이상 관료ㆍ재정 명령이 작동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통치 행정의 실체가 빈약하게 전하더라도, 주화와 칭호는 그의 재위가 “공식 질서”의 언어로 인지되었음을 말해 준다.
타키투스 ‘형제’ 전승과 사료 비판
플로리아누스를 타키투스의 형제(혹은 이복형제)로 묶는 전기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계열에서 반복되지만, 독립적 물질 증거와 동시대 사가의 교차가 부족하다. 반면 그가 프라이토리움 총관으로 근위대를 장악했다는 점, 276년 사망ㆍ살해 전승, 3세기 위기기의 황제로 분류된다는 점은 전승 간 합치가 높아 신뢰 가능한 층위로 정리된다. 따라서 가계 전승은 보류하고, 직책ㆍ연대ㆍ사망 경위 같은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태도가 타당하다.
3세기 위기 속 좌표, 왜 빨랐고 왜 짧았는가
플로리아누스는 ‘서방 행정ㆍ근위대 기반 + 신속한 황제 선포’라는 공식으로 속도전을 걸었으나, 동방의 현장 카리스마와 기동전을 앞세운 프로부스와의 맞대결에서 전략적 열세를 드러냈다. 다뉴브ㆍ아시아 방면에서 압축적으로 반복된 “군단의 즉시 추대–단기 대치–병사들의 매몰찬 선택”은, 제국 최고 권력이 군심의 체감 효용과 보급 곡선에 종속되던 3세기 구조를 보여준다. 플로리아누스의 사례는 그 구조의 전형에 가깝다.
‘위기의 세기’ 분류와 사인 분류, 표준 지표의 의미
현대 분류에서 플로리아누스는 3세기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의 황제, 출생연도 미상, 276년 사망자, 근위대 총관 출신, 살해된 로마 황제 범주로 동시에 표기된다. 이 분류 묶음 자체가 “짧은 재위–군사 기반 즉위–폭력적 종결”이라는 패턴을 한눈에 요약한다는 점에서, 상세 사료가 빈약한 그의 통치를 이해하는 실질적 힌트가 된다.
사료와 읽을거리, 무엇을 최소 사실로 잡을 것인가
플로리아누스에 관한 개별 기사들은 상·하한선을 제시하는 ‘연대–직책–사망’의 최소 공통분모 위에 서술을 얹는다. 이 가운데 비교적 신뢰 가능한 층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276년의 황제 재위와 동년 사망. 둘째, 타키투스 말기 프라이토리움 총관 경력. 셋째, 살해에 의한 최후. 넷째, 3세기 위기의 군인 황제 계열이라는 구조적 좌표이다. 이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나머지 전승을 보조적으로 읽는 것이 오류를 줄이는 방법이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76년 초ㆍ중반 : 타키투스 붕어 직후 플로리아누스가 황제를 칭하고 서방 병력ㆍ행정을 장악한다. 근위대 총관 경력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 276년 여름 : 동방 군단이 프로부스를 옹립하고, 소아시아 킬리키아 일대에서 양군이 대치한다. 수적 우세에도 장기 대치로 전략 주도권이 흔들린다.
- 276년 늦여름 : 타르수스 인근에서 병사들의 반란으로 살해된다. ‘살해된 로마 황제’ 분류와 276년 사망 분류가 합치한다.
마무리 : ‘속도전의 시대’가 남긴 한 페이지
플로리아누스의 통치는 정책의 목록이 아니라, 권력의 속도ㆍ군심의 변덕ㆍ보급과 지형의 한계가 얽힌 3세기 로마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짧은 기록이다. 즉위의 신속함과 몰락의 속도 사이에서, 그는 “근위대 기반의 서방 황제”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남긴 것은 패배의 서사가 아니라, 위기의 세기에 권력이 어떻게 오르고 내려왔는지를 설명하는 구조적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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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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