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토요일

[BC. 83~82] 술라의 내전 : 로마 공화정의 피로 물든 대격변과 군사 독재의 서막

[BC. 83~82] 술라의 내전 : 로마 공화정의 피로 물든 대격변과 군사 독재의 서막

 
술라의 내전(Sulla's Civil War)은 기원전 83년부터 82년까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에서 벌어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을 말한다. 이는 단순한 내부 갈등을 넘어, 로마 공화정의 오랜 정치적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군사 독재의 시대를 연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기원전 78)와 그에 대항하는 '킨나-마리우스 파벌(Cinna-Marius faction)', '마리우스파' 또는 '킨나파' 사이의 이 전쟁은 로마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으며,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4)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y Magnus, 기원전 106-기원전 48) 같은 강력한 군사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공화정이 몰락하는 비극적인 순환의 서막을 알렸다. 이 전쟁은 고대 로마의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잔혹한 흔적을 남겼다.
 
기원전 54년에 술라의 손자인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주조한 데나리우스(은화)에 새겨진 술라의 초상화
기원전 54년에 술라의 손자인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주조한 데나리우스(은화)에 새겨진 술라의 초상화
 

1. 공화정 위기의 서막 : 권력 투쟁의 씨앗

 
술라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이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겪었던 일련의 복합적인 위기의 결과였다. 그라쿠스 형제(Gracchi brothers)의 개혁 시도와 그들의 폭력적인 죽음은 로마 정치에서 피가 낭자한 대결의 서막을 열었다. 토지 불균형, 빈부 격차, 시민권 문제, 그리고 노예 문제와 같은 사회적 불안정은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파벌 싸움과 결합되어 공화정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군제 개혁과 사병화의 위험 :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기원전 86)는 로마 군대에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재산 없는 시민들을 병사로 징집하고 국가가 이들에게 무기와 급료를 제공하게 했다. 이는 로마군의 병력난을 해결하고 전문화를 가속화했지만, 동시에 병사들의 충성심이 국가보다 특정 지휘관에게 집중되는 '사병화'의 위험을 초래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 장군에게 충성했고, 이는 장군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길을 열었다.
 
사회 전쟁과 시민권 문제 : 기원전 91년부터 87년까지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 사이에 벌어진 사회 전쟁(Social War)은 로마 공화정을 심각한 위기에 몰아넣었다. 동맹국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군사적 기여에 상응하는 로마 시민권을 요구했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결국 동맹국들에게 시민권이 광범위하게 부여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 같은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이 정치 무대에 강력하게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 군사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했으며, 이들이 개인적인 군대를 이끌고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두 : 유구르타 전쟁(Jugurthine War)과 킴브리 전쟁(Cimbrian War)을 통해 마리우스는 로마의 영웅이자 탁월한 군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와 동시에 마리우스의 부관이었던 술라(Sulla) 역시 이 전쟁들에서 큰 공을 세우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유구르타를 생포한 공로를 두고 마리우스와 술라 간에 미묘한 경쟁 의식이 싹텄고, 이는 훗날 두 사람의 치명적인 라이벌 관계의 씨앗이 되었다.
 

2. 술라의 첫 번째 로마 진군(기원전 88) : 공화정의 파괴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First Mithridatic War)은 술라의 내전이 시작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Mithridates VI Eupator, 기원전 135-기원전 63)가 로마의 동방 속주를 침략하고 '소아시아 로마인 학살 사건(Asiatic Vespers)'이라는 대규모 로마인 학살을 자행하면서 로마는 동방에 대한 대규모 군사적 개입을 결정했다.
 
동방 사령관직을 둘러싼 갈등 : 로마 원로원은 당시 집정관이었던 술라(Sulla)에게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사령관직을 위임했다. 그러나 마리우스(Gaius Marius)와 그의 동맹인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Publius Sulpicius Rufus, 기원전 88년 사망)는 술라의 권한을 박탈하고 마리우스에게 동방 사령관직을 넘기려 했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이를 위해 로마 시민권자 부족 배분 재조정 법안을 통과시켜 새로운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등 무리수를 두었다.
 
술라의 군사적 쿠데타 : 이에 격분한 술라(Sulla)는 전례 없는 행동을 감행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던 로마 군단에게 로마 시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로마 역사상 로마 군단이 로마 시를 공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술라의 군대는 로마를 점령했고,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비롯한 반대파 지도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추방하거나 살해했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살해되었고, 마리우스는 북아프리카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술라(Sulla)는 로마의 정치 질서를 일시적으로 재확립한 후,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3. 킨나-마리우스 파벌의 재집권과 피의 숙청(기원전 87-84)

 
술라가 동방으로 떠나자 로마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 술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마리우스(Gaius Marius)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 기원전 84년 사망)가 재집권을 시도했다.
 
킨나의 권력 장악 : 술라(Sulla)의 반대파였던 킨나(Cinna)는 술라가 동방으로 떠나자마자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광범위하게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이는 술라가 재확립하려던 정치 질서를 다시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킨나(Cinna)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동료 집정관을 제거하고, 망명했던 마리우스(Gaius Marius)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마리우스의 귀환과 '공포 정치' : 기원전 87, 망명에서 돌아온 마리우스(Gaius Marius)는 킨나(Cinna)와 함께 로마를 장악하고 무자비한 '숙청(purge)'을 시작했다. 술라의 지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약탈당했다. 로마 거리는 시체로 뒤덮였다. 이 피비린내 나는 공포 정치는 로마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훗날 술라의 대규모 '살생부(proscriptions)'에 대한 정당성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킨나(Cinna)는 마리우스(Gaius Marius)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집정관직을 연임하며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술라(Sulla)가 동방에서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킨나는 술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던 중 병사들의 폭동으로 암살당했다. 킨나의 죽음으로 마리우스파는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젊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the Younger, 기원전 110년경-기원전 82)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 기원전 82년 사망) 같은 지도자들이 남은 세력을 규합했다.
 

4. 술라의 귀환과 내전의 절정(기원전 83-82)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85년에 다르다노스 조약(Treaty of Dardanos)을 맺은 후, 로마로 돌아올 준비를 했다.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로마에서 벌어진 마리우스와 킨나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탈리아 상륙과 지지 세력 확보 : 기원전 83, 술라(Sulla)는 수년간 동방 전선에서 단련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 브룬디시움(Brundisium)에 상륙했다. 그는 자신의 복귀가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질서를 회복하고 '진정한' 로마 시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선전했다. 그의 오랜 충성스러운 군단병들과 함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후손인 젊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y Magnus) 등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술라에게 합류했다. 이들은 로마를 안정시킬 강력한 군사 지도자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술라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전쟁 : 술라는 이탈리아 남부를 북상하며 마리우스파의 군대와 연이어 충돌했다. 술라의 군대는 노련했으며, 지휘관들도 탁월했다.
 
  • 사크리포르투스 전투(Battle of Sacriportus, 기원전 82) : 젊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마리우스파는 술라의 진격을 막기 위해 사크리포르투스에서 맞섰다. 그러나 술라는 이 전투에서 마리우스파를 대파하고 로마 진격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젊은 마리우스는 전투 후 로마로 도주했지만, 곧이어 자살하거나 살해당했다. 이 패배는 마리우스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 프라이네스테 포위(Siege of Praeneste) : 젊은 마리우스가 도주한 프라이네스테(Praeneste)를 술라는 포위했다. 이 포위는 내전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만큼 끈질긴 공성전이었다.
  • 캄파니아에서의 격돌 : 술라와 킨나-마리우스 파벌은 캄파니아에서도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마리우스파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술라는 점차 이탈리아 중남부에서의 주도권을 확립해나갔다. 이 시기에는 보헤미아에서 돌아온 킴브리족 보이(Boii) 일부와 같은 갈리아 부족들도 마리우스 파벌에 가담하여 로마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콜리나 문 전투(Battle of the Colline Gate, 기원전 82) : 프라이네스테에 고립된 젊은 마리우스를 구원하기 위해 마리우스파의 마지막 총력전이 펼쳐졌다. 삼니움인, 루카니아인, 갈리아 부족 등이 연합한 대규모 마리우스파 병력이 술라의 군대를 우회하여 로마 시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 술라(Sulla)는 즉시 로마 방어를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로마 시의 콜리나 문(Colline Gate) 앞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내전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후의 대결이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으며, 고대 로마인들의 피 비린내 나는 내전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싸움 중 하나로 기록된다. 술라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살루스티우스(Sallust)는 이 전투를 "로마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라고 묘사했다. 술라의 전선이 밀리며 로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술라의 지휘와 그의 병사들의 끈기, 그리고 그의 지휘관 술라와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결국 술라의 군대는 마리우스파 연합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이 승리로 술라는 로마의 패권을 장악했고,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5. 술라의 독재와 살생부(기원전 82-79) : 피의 재편

 
내전에서 최종 승리한 술라(Sulla)는 로마의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화정의 오랜 전통적인 틀에 맞추는 대신,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독재관(dictator)' 직위를 부활시키고 무기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 공화정을 뿌리째 흔드는 일련의 조치들로 점철되었다.
 
살생부(Proscriptions)의 공포 : 술라(Sulla)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마리우스파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 위해 잔혹한 살생부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공개된 적(public enemies)'의 명단을 작성하여 로마 포룸(Roman Forum)에 게시했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될 수 있었고, 그들을 죽인 자에게는 포상이, 숨겨준 자에게는 처벌이 주어졌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가와 술라의 추종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술라의 살생부에는 수천 명의 원로원 의원, 기사 계급, 부유한 상인들이 포함되었다. 이는 로마 사회에 엄청난 공포와 불안을 야기했으며, 술라에게 반대하거나 단순히 그에게 밉보인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었다. 이 살생부는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적 목적을 위한 폭력이 제도화되는 비극적인 선례가 되었다.
 
헌정 개혁과 공화정의 왜곡 : 술라(Sulla)는 살생부를 통해 자신의 적들을 제거한 후, 로마 공화정 체제를 재편했다.
  • 원로원 강화 : 술라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호민관(tribunes of the plebs)의 권한을 축소했다. 그는 호민관이 법안을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하고, 다른 고위직에 오를 수 없게 만들었다.
  • 법원 개혁 : 그는 사법권을 기사 계급에서 다시 원로원에게 돌려주었으며, 법원의 독립성을 훼손했다.
  • 장군들의 통제 : 술라는 군사 지휘관들이 임기를 마친 후에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통제 조치를 시행했다. 이는 장군들의 군사적 권력이 정치적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행동 자체가 이러한 선례를 남긴 것이었다.
 
술라의 개혁은 공화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공화정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는 군사력으로 권력을 잡고 개인의 의지로 헌법을 개혁하는 선례를 남겼다.
 
독재관직 사퇴 : 예상 밖에도 술라(Sulla)는 기원전 79년에 독재관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은퇴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는 당시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공화정의 이상을 추구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의 통치 방식은 공화정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6. 술라의 내전이 로마에 미친 영향

 
술라의 내전과 그의 독재는 로마 공화정 말기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여파는 수십 년간 이어졌다.
 
  • 군사력의 정치 개입 제도화 : 술라의 첫 번째 로마 진군은 군사력이 로마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강력한 선례를 남겼다. 이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 이후 모든 권력 투쟁에서 군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 정치적 폭력의 만연 : 살생부와 같은 잔혹한 숙청은 로마 정치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폭력이 공공연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로마 공화정 말기 끝없는 내전과 폭력의 시대를 열었다.
  • 공화정 제도의 약화 : 술라의 헌정 개혁은 표면적으로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특정 개인의 군사적 힘으로 헌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공화정의 제도적 권위를 약화시켰다. 원로원은 이제 군사적 지지를 가진 강력한 개인들에게 대항하기 어려워졌다.
  • 카이사르의 부상과 공화정의 몰락 :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술라의 살생부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술라의 등장을 보며 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훗날 카이사르는 술라가 남긴 군사적 권력 장악의 선례를 따랐고, 그 자신도 군사력을 이용해 공화정을 완전히 해체하는 길을 걷게 된다.
 
결론적으로 술라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전쟁이었다. 이는 로마의 황금기가 끝났음을 알리고, 공화정이 더 이상 자신의 내부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피비린내 나는 이 대격변 속에서 로마 공화정은 서서히 죽어갔고, 그 자리에는 강력한 군사적 힘을 가진 개인이 지배하는 제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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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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