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토요일

[BC. 83~81]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로마의 모호한 정책과 미트리다테스의 끈질긴 재도전

[BC. 83~81]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로마의 모호한 정책과 미트리다테스의 끈질긴 재도전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83년부터 81년까지 불과 2년여간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폰투스 왕국(Kingdom of Pontus)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hridates VI Eupator, 기원전 135-기원전 63) 사이에 벌어진 단기적인 군사적 충돌이다. '미트리다테스 전쟁(Mithridatic Wars)'이라고 불리는 세 차례의 대결 중 두 번째에 해당하며, 이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First Mithridatic War)이 종결된 직후 발생했다. 이 전쟁은 로마의 모호한 대외 정책과 미트리다테스의 끈질긴 재기 의지가 맞물려 일어났으며, 로마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로마의 동방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비록 소규모로 진행되었으나, 이 충돌은 결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Third Mithridatic War)이라는 더 큰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 왕의 흉상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 왕의 흉상
 

1. 전쟁의 배경 : 1차 전쟁의 잔재와 술라의 귀환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불완전하게 종결된 데서 비롯되었다.
 

1) 미트리다테스의 야망과 로마의 동방 착취

 
미트리다테스 6(Mithridates VI Eupator)는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에 비견될 만한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품은 강력한 헬레니즘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며 로마의 동방 패권에 도전했다. 특히 로마의 가혹한 세금 징수관인 '푸블리카니(publicani)'들의 착취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주민들 사이에 로마에 대한 깊은 반감을 심었고, 미트리다테스는 이러한 반로마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을 '동방 해방의 구세주'로 포장했다. 기원전 88, 그는 '소아시아 로마인 학살사건(Asiatic Vespers)'이라는 대규모 로마인 학살을 자행하며 전면전을 시작했다.
 

2) 술라의 승리와 불완전한 평화

 
로마는 당시 사회 전쟁(Social War)으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서 병력을 소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기원전 78)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미트리다테스를 상대하게 했다. 술라(Sulla)는 아테네(Athens)를 함락시키고 카이로네이아(Chaeronea)와 오르코메누스(Orchomenus)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술라(Sulla)는 로마 본토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로마에서 그의 정적인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가 정권을 장악하고 술라(Sulla)'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술라(Sulla)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로마를 장악하기 위해 하루빨리 이탈리아로 귀환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원전 85, 술라(Sulla)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와 다르다노스(Dardanos)에서 직접 만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미트리다테스에게 정복한 영토를 로마에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했지만, 폰투스 왕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의 왕위를 유지하게 하는 등 미트리다테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조건이었다. 이는 술라(Sulla)가 동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서둘러 봉합한 결과였다.
 

3) 무레나의 아시아 주둔과 야심

 
술라(Sulla)는 미트리다테스와 조약을 맺은 후, 로마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때 소아시아 지역에는 그가 지휘했던 두 개 군단의 잔여 병력이 남아 있었다. 술라(Sulla)는 이 병력의 지휘를 자신의 레가투스(legate)였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 생몰년 미상)에게 맡겼다.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술라(Sulla)의 전임자로서 아시아의 지휘권을 맡았고, 프리기아(Phrygia)와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포함한 지역의 통제를 맡았다 . 공식적으로 그는 이 지역에서 로마의 이익을 수호하고 다르다노스 조약의 이행을 감시해야 했다.
 

2. 무레나의 도발 : 전쟁의 시작

 
술라(Sulla)가 로마로 떠나자마자,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했다.
 

1) 무레나의 행동과 미트리다테스의 준비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가 로마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었다고 아피안(Appian)은 기록했다. 당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코카서스 지역과 키메리아 보스포러스(Cimmerian Bosphorus)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건설하고 군대를 증강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로마 동맹국인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Ariobarzanes I of Cappadocia)에게 카파도키아 전체를 아직 완전히 반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이러한 상황을 미트리다테스의 전쟁 준비로 간주했다.
 

2) 조약의 무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평화 조약을 들어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에게 자신의 행동이 합법적임을 주장했지만,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술라(Sulla)가 평화 조약을 서면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 이는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독단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명분 없는 주장으로, 실제로는 그의 야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레나는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가로질러 미트리다테스의 도시 코마나(Comana)를 공격하고 약탈한 뒤 카파도키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로마 원로원에 대사를 파견하여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불법적인 공격에 대해 항의했다. 기원전 82,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미트리다테스의 영토 내 400개의 마을을 약탈하는 등 계속해서 도발을 이어갔다.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아직 로마의 공식적인 반응을 기다리며 무레나의 도발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에게 미트리다테스를 내버려 두라는 명령을 보냈다. 하지만 이 명령은 공식적인 칙령 형태가 아니었으며,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이 명령을 무시한 채 공세를 이어갔다. 일부 역사가들은 술라(Sulla)가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이러한 행동을 암암리에 승인하거나 심지어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술라(Sulla)는 미트리다테스를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전투의 전개 : 미트리다테스의 반격과 로마의 패배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지속적인 도발에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1) 미트리다테스의 승리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가 다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의 영토를 침공하자,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지휘관 고르디우스(Gordius of Cappadocia)를 시켜 로마 마을을 보복 공격하게 했다. 이후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와 맞붙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로마군은 패배하고 프리기아(Phrygia)로 도주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 군의 끈질긴 추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로마와의 동맹을 끊고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세력을 바꾸었다.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여세를 몰아 카파도키아에서 로마 수비군을 모두 축출했다.
 
멤논(Memnon of Heraclea)의 기록에 따르면,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자문관 중 일부는 폰투스의 수도인 시노페(Sinope)를 공격하여 다른 도시들을 함락시킬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시노페를 강력한 병력으로 방어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초기에는 미트리다테스가 우위에 있었으나, 이후 전투는 대등해졌고 양측 모두 전쟁에 대한 의지를 잃었다고 멤논은 기록했다. 이로 인해 미트리다테스는 동쪽으로 물러나고 무레나는 아시아로 돌아갔다.
 

2) 술라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이탈리아에 돌아와 독재관(dictator)으로 등극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술라(Sulla)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가 조약을 어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는 아울루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를 특사로 파견하여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에게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를 공격하지 말라는 로마의 명령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함을 강조했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와 아리오바르자네스 1(Ariobarzanes I of Cappadocia) 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네 살 된 딸을 아리오바르자네스(Ariobarzanes I of Cappadocia)에게 약혼시키고, 아리오바르자네스(Ariobarzanes I of Cappadocia)는 당시 점유하고 있던 카파도키아의 일부를 계속 소유하고 다른 부분도 가지기로 합의했다.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는 로마로 소환되었고,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전쟁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단기간의 충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폰투스 왕국의 관계, 그리고 로마 내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미트리다테스의 재기 가능성 입증 : 이 전쟁은 다르다노스 조약 이후 미트리다테스가 로마의 눈을 피해 군사력을 재건하고, 로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역량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훗날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 로마의 지휘권 문제와 원로원의 무능력 : 무레나의 독단적인 전쟁 시작과 로마 원로원의 미온적인 대응은 로마가 해외 총독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으며, 외부 정책이 명확한 원칙 없이 혼란스럽게 운영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는 로마 공화정 말기, 강력한 군사 지휘관들의 개인적 야심이 국가적 이익을 앞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 술라의 영향력 : 술라(Sulla)가 로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다시금 동방 문제에 개입하여 미트리다테스와의 불필요한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그의 압도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단기간의 공화정 회복과 독재를 끝내는 데 성공했음을 시사한다.
  • 다음 전쟁의 서막 : 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미트리다테스와 로마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로마가 내전을 겪는 동안 약해진 틈을 타 다시 세력을 키웠고, 로마는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결국 이는 십여 년 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와 폼페이우스(Pompey)가 활약하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짧고 불분명한 결과를 낳은 충돌이었지만,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내부의 모순, 그리고 강력한 적과의 끊임없는 대결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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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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