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89~85]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로마의 동방 패권과 미트리다테스의 야망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89년부터 85년까지 약 5년간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폰토스 왕국(Kingdom of Pontus)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hridates VI Eupator, 기원전 135년-기원전 63년)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다. 이 전쟁은 소아시아(Asia Minor), 그리스(Ancient Greece), 에게 해(Aegean Sea)를 주 무대로 진행되었으며, 당시 로마의 동방 정책에 대한 야심 찬 헬레니즘 군주의 정면 도전이었다. 이 전쟁은 단순히 영토 분쟁을 넘어, 로마가 지중해의 서부를 넘어 동방에까지 패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동시에 로마 공화정 말기의 복잡한 정치적 격변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은 서부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와 동부 헬레니즘 세계의 부흥을 꿈꾼 미트리다테스의 숙명적인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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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9년 아시아 소아시아 지역의 지도. 로마의 속주와 클라이언트 국가들, 그리고 폰투스 왕국의 영토가 함께 표시되어 있음. |
1. 전쟁의 서막 : 동방의 패자 미트리다테스의 부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불씨는 폰토스 왕국의 젊고 야심 찬 왕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의 등장과 그의 끊임없는 확장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1) 폰토스의 성장과 미트리다테스의 야망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Eupator)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Mithridates V Euergetes)가 암살당한 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수많은 음모와 위험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비범한 리더십을 겸비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356년-기원전 323년)과 고대 페르시아 제국(Achaemenid Empire)의 군주 다리우스 1세(Darius I, 기원전 550년-기원전 486년)에 비견될 만한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품었다. 그는 코카서스 지역과 흑해 북안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보스포로스 왕국(Bosporan Kingdom)을 합병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목표는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동방의 강자로서 로마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2) 로마의 동방 정책과 착취적 지배
로마는 제1차, 제2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Macedonian Wars)을 통해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로마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왕국들의 분쟁에 개입하고, 세력이 강해지는 국가를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비티니아(Bithynia)와 카파도키아(Cappadocia) 왕국은 미트리다테스의 팽창 정책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고 로마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는 현지 주민들에게 매우 가혹했다. 로마의 세금 징수관인 '푸블리카니(publicani)'들은 엄청난 이율로 돈을 빌려주고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며 현지 주민들을 수탈했다. 이러한 착취는 그리스 도시들과 소아시아 지역 주민들 사이에 깊은 반로마 감정을 키웠다. 미트리다테스는 이러한 반로마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자신을 '동방 해방의 구세주'로 포장했다.
3) 전쟁 발발 직전의 긴장
기원전 90년대 중반,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로마는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를 파견하여 이를 저지했다. 술라는 로마의 명령에 따라 두 왕국의 왕들을 복위시키고 미트리다테스의 야심을 일시적으로 좌절시켰다. 하지만 로마의 비티니아 총독은 미트리다테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미트리다테스가 전면전으로 나설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
2. 미트리다테스의 대공세 : 아시아의 황혼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는 로마가 이탈리아 본토에서 동맹시 전쟁(Social War)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틈을 타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소아시아 정복 : 미트리다테스는 비티니아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카파도키아를 재정복했다. 그는 로마와 그 동맹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했다. 로마 총독 마니우스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 기원전 101년 집정관)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붙잡혀 참혹하게 처형당했다.
소아시아 로마인 학살 사건(Asiatic Vespers) : 전쟁 발발 후 약 1년이 지난 기원전 88년 5월경,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고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의 충성심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인을 학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학살은 미리 계획되고 조직적으로 실행되었으며, 단 하루 만에 수만 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살해되었다. 아피안(Appian, 서기 95년경-165년경)은 희생자 수를 8만 명으로, 플루타르코스(Plutarch, 서기 46년경-120년경)는 더 높은 수치로 기록했다. 이 사건은 로마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고, 미트리다테스를 단순한 적이 아닌 인류의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는 로마의 복수심을 불태웠고, 전쟁을 총력전의 양상으로 몰고 갔다.
그리스로의 진출 : 소아시아를 장악한 미트리다테스는 아르켈라오스(Archelaus) 장군을 그리스로 파견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을 규합하게 했다 . 아르켈라오스는 그리스인들의 반로마 감정을 자극하여 아테네(Athens)를 비롯한 많은 도시 국가들을 로마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다. 아테네에서는 아리스티온(Aristion)이 참주로 등극하며 친폰토스 정책을 폈다. 그리스는 다시 한번 로마와 동방 강국의 대결장이 되었다.
3. 술라의 반격 : 피 튀기는 그리스 전역
로마는 미트리다테스의 대공세와 아시아의 저녁 기도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국내의 사회 전쟁을 수습하고 동방으로 군대를 파견할 준비를 했다.
1) 술라의 그리스 상륙(기원전 87년)
유구르타 전쟁의 영웅이자 노련한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내전으로 로마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했다. 술라는 병사들에게 미트리다테스를 격퇴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약속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2) 아테네 및 피레우스 공성전(기원전 87-86년)
술라의 첫 번째 목표는 그리스의 중심지이자 폰토스의 강력한 거점이 된 아테네였다. 술라의 로마군은 아테네와 그 항구인 피레우스(Piraeus)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시작했다. 이 공성전은 길고 잔혹했으며, 술라는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심지어 아테네 외곽의 신성한 숲을 벌목하여 공성 장비를 만들고, 아테네 아카데미(Academy)와 리케이온(Lyceum)과 같은 철학 학당까지 파괴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수개월 간의 포위 끝에 아테네는 기원전 86년 3월에 함락되었고, 술라는 도시를 약탈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어서 피레우스도 함락시키고 아르켈라오스(Archelaus)의 병력을 해산시켰다. 이 잔혹한 공성전은 로마군이 미트리다테스의 학살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음을 보여준다.
3) 카이로네이아 전투(기원전 86년)
아테네를 함락시킨 후,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아르켈라오스(Archelaus)가 이끄는 폰토스-그리스 연합군을 상대로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카이로네이아(Chaeronea)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폰토스군은 수적으로 로마군을 압도했으나, 술라의 탁월한 전술과 병사들의 훈련된 전투력에 패배했다. 술라는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폰토스군의 병력 우위를 무력화시키는 기동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폰토스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그리스에서의 주력군을 상실했다 .
4) 오르코메누스 전투(기원전 86년)
아르켈라오스(Archelaus)는 카이로네이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트리다테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군대를 재건하려 했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베오티아(Boeotia)의 오르코메누스(Orchomenus)에서 재정비된 폰토스군과 다시 맞붙었다. 술라는 이 전투에서도 기발한 전술을 구사했다. 폰토스군의 강점인 기병대와 전차 부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그는 전투 지형 주변의 늪지대를 인공적으로 배수하여 적군의 기동을 방해했다. 결국 오르코메누스 전투는 로마군의 또 다른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이는 그리스에서 폰토스의 군사적 역량을 완전히 꺾는 계기가 되었다.
4. 피브리아누스 군대의 등장과 다르다노스 조약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그리스에서 폰토스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로마 본토에서는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추방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마리우스(Gaius Marius)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 기원전 87년 집정관)가 로마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술라의 적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피브리아(Gaius Flavius Fimbria)에게 군대를 주어 소아시아로 파견했다. 피브리아는 미트리다테스를 상대하는 동시에 술라를 견제하거나 제거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피브리아의 소아시아 전역 : 피브리아(Gaius Flavius Fimbria)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에 상륙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Eupator)에게도 승리를 거두며 그를 압박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피브리아와 그의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고 본거지인 폰토스까지 밀려났다.
술라의 선택과 다르다노스 조약(기원전 85년) : 술라는 그리스에서 승리했지만, 로마 본토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정치적 복수를 위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기 전에 동방의 문제를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 역시 연이은 패배로 지쳐 있었고, 피브리아의 로마군에게까지 압박을 받고 있어 평화를 원했다. 기원전 85년,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와 다르다노스(Dardanos)에서 직접 만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트리다테스는 정복한 모든 영토를 로마에 반환한다.
-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2,000~3,000 탈렌트)을 지불하고, 함대를 넘겨준다.
- 로마는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의 왕들을 복위시키고, 전쟁 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로 돌아간다.
일부 로마인들은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에게 너무 관대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와 같은 장군들은 미트리다테스를 완전히 격파할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술라는 로마의 내전 상황을 고려할 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조약 체결 후, 술라는 피브리아의 로마군과 마주했다. 피브리아의 병사들은 술라에게 항복했고, 피브리아는 자살했다.
5. 전쟁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로마의 동방 패권에 대한 미트리다테스의 야심찬 도전을 보여주었으며, 로마 역사와 동방 지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로마의 동방 패권 강화 :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소아시아와 그리스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 로마는 이 지역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 술라의 부상과 공화정 위기 심화 :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영웅으로서 로마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던 정치적 적들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하고 독재관(Dictator)으로 등극했다. 그의 성공은 로마 군사 지도자들의 개인적 권력이 증대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새로운 경향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로마 공화정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그리스 도시들의 고통 : 미트리다테스를 지지했거나 중립을 지키지 않았던 그리스 도시들은 전쟁 후 술라에 의해 막대한 배상금과 세금을 부과당하여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로마 지배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우기도 했다.
- 미트리다테스의 재도전 : 다르다노스 조약은 미트리다테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었다. 결국 그는 이후 두 차례 더 로마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제2차 및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로마 군사 전술의 발전 : 술라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은 로마 군사 역사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점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로마의 동방 확장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충돌이자, 헬레니즘 세계가 로마의 패권에 굴복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로마의 군사적 우위와 정치적 역동성을 보여주면서도, 공화정의 내부 모순과 미래의 대규모 내전을 예고하는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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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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