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AD.790s~812) : 동로마 제국 제83대 황제(AD.811)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AD.790s~812) : 동로마 제국 제83대 황제(AD.811)

 
  • 이름 :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스타우라키우스(Stauracius)
  • Greek : Σταυράκιος / romanized: Staurákios
  • 출생 : 790년대
  • 사망 : 812111
  • 부친 ; 니코포로스 1
  • 배우자 : 테오파노(Theophano of Athens)
  • 재위 :
    공동재위 : 803~811 (니코포로스와 공동 재위)
    재위 : 811726~ 102
  • 대관식 : 8031225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AD.790s~812) : 동로마 제국 제83대 황제(AD.811)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AD.790s~812) : 동로마 제국 제83대 황제(AD.811)
 

1. 스타우라키오스 : 부자 황제의 비극적 운명과 짧은 제위

 
비잔티움 제국은 끊임없이 황위 다툼과 외세 침략에 시달리던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많은 황제들을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불과 6개월 남짓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비극적인 운명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겪었던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790년대812)이다. 그는 강력했던 아버지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750811)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지만, 치명적인 부상과 가족 간의 갈등 속에서 황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삶은 비잔티움 황제들이 직면했던 위태로운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 황제의 아들에서 공동 황제로 : 스타우라키오스의 초기 생애

 
스타우라키오스는 791년에서 793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니케포로스 1세로, 이레네(Irene, 재위 797-802) 여제의 재무 총사령관(Logothetes tou genikou)이었다. 니케포로스 1세는 802년에 쿠데타를 통해 이레니 여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당시 스타우라키오스는 10세에서 12세 사이의 어린 나이였다 .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가 황제가 되자, 스타우라키오스는 곧 공동 황제로 책봉되었다. 8031225, 크리스마스 당일에 그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니케포로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가 자신의 왕조를 확립하고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8071220일에는 아테네 출신으로 과거 이레니 여제의 친척이었던 테오파노(Theophano)와 결혼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비잔티움 귀족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와 함께 여러 군사 작전에 동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3. 플리스카 전투에서의 부상과 황위 계승 문제

 
스타우라키오스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은 811년 여름,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 칸 크룸(Krum, ?814)과의 전쟁에 나선 원정이었다. 니케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의 수도 플리스카(Pliska)를 약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하던 중 811726일 불가리아군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 플리스카 전투(Battle of Pliska)에서 니케포로스 1세는 전사했으며, 스타우라키오스 또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의 등 뼈가 칼에 베여 하반신 마비 상태가 되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극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스타우라키오스는 황제로서의 기능을 거의 수행할 수 없었다. 그의 부상은 제국의 황위 계승 문제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스타우라키오스는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황후 테오파노와 스타우라키오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후계자 문제가 제기되었다. 황후 테오파노와 다른 궁정 대신들은 그가 죽기 전에 후계자를 지명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자신의 아내 테오파노를 황후로 지명하고 싶었으나,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황실과 원로원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의 누나 프로코피아(Prokopia)와 그녀의 남편 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angabe, ?844)는 스타우라키오스를 폐위시키고 황위를 차지하려 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심지어 자신의 누나 프로코피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4. 폐위와 죽음 : 비극적인 종말

 
점점 심해지는 부상과 궁정 내의 격렬한 권력 다툼 속에서 스타우라키오스는 더 이상 황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811102, 그는 결국 황위에서 강제로 물러나 은퇴했다. 수도사로 출가하여 시메온(Simeon)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도복을 입었다.
 
황제 미카엘 1세 랑가베와 총대주교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of Constantinople)가 그를 방문하여 직접 설득한 결과였다. 스타우라키오스는 미카엘 1세가 자신보다 나은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하며 황위 이양을 거부했다고 한다.
 
황위에서 물러난 지 약 3개월 뒤인 812111, 스타우라키오스는 부상으로 인한 괴저(gangrene)로 사망했다. 그는 테오파노 황후와 함께 브라카(Braka)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시리아 연대기 작가들이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5. 역사적 평가 : 짧고 비극적인 기록

 
스타우라키오스의 재위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짧은 황제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의 삶과 통치는 주요 사료인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크로노그라피아(Chronographia)에 기록되어 있으나, 테오파네스가 니케포로스 1세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스타우라키오스에 대한 평가도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스타우라키오스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권력 승계가 얼마나 불안정했으며, 황제의 건강 문제가 제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는 비극적인 부상과 가족 간의 갈등 속에서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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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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