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angabe, AD.c770~844) : 동로마 제국 제84대 황제
- 미카엘 1세 랑가메(Michael I Rangabe, Michael I Rhangabe
- [Greek : Μιχαὴλ Αʹ Ῥαγκαβές / romanized: Mikhaḗl 1 Rhangkabés]
- 출생 : 770년경
- 사망 : 844년 1월 11일
- 부친 : 테오필락트 랑가베(Theophylact Rhangabe)
- 배우자 : 프로코피아(Prokopia)
- 자녀 : 게오르고(Georgo), 테오필락토스(Theophylaktos), 니케타스(Niketas),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테오파노(Theophano)
- 재위 : 811년 10월 2일 ~ 813년 7월 11일
- 공동재위
스타우라키오스(811년)
테오필락트(811~813년
1. 미카엘 1세 랑가베 : 위기 속의 즉위와 짧지만 중요한 제위
서기 9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황권과 외부적으로 불가리아 제국의 거센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재무 관료 출신으로 황위에 오르고, 짧은 기간 동안 제국을 통치했으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결정을 내렸던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angabe, 770경 – 844)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811년부터 813년까지 불과 2년 남짓이었지만, 비잔티움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황제의 전사라는 비극적인 사건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의 방향을 모색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미카엘 1세 랑가베의 이야기는 니케포로스 왕조(Nikephorian dynasty)의 혼란스러운 계승과 황권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마 제국 황제의 운명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2. 권력의 심장부로 : 황실과의 연결
미카엘은 소아시아 해군(Aegean fleet)의 제독이자 귀족 가문 출신의 테오필락트 랑가베(Theophylact Rhangab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그리스계 혈통이었다. 그는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 750–811) 황제의 딸 프로코피아(Prokopia)와 결혼함으로써 황실과 연결되었다. 802년, 장인 니케포로스 1세가 황위에 오르자 미카엘은 비잔티움 궁정에서 고위직인 ‘쿠로팔라테스(Kouropalates)’의 칭호를 받았다. 이 지위는 황실의 중요한 행사와 의례에 참여하는 명예로운 자리로, 미카엘이 이미 황실의 핵심 구성원 중 한 명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장인 니케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 칸 크룸(Krum)과의 참혹한 전쟁에서 사망한 이후의 혼란 속에서 황위에 오르게 된다.
3. 스타우라키오스의 퇴장과 미카엘 1세의 즉위
811년 여름, 니케포로스 1세 황제는 불가리아 원정에서 비잔티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전사하고,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790년대–812)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겨우 목숨은 건져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황위에 올랐지만, 그의 부상은 너무나 심각하여 통치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척추 부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스타우라키오스 황제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황후 테오파노(Theophano)를 비롯한 황실 내에서는 그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스타우라키오스는 후계자 지명을 미뤘으며, 심지어 아내 테오파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원로원과 궁정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타우라키오스의 누나인 프로코피아와 그녀의 남편 미카엘 랑가베가 권력의 중심에 떠올랐다. 미카엘은 재무 총사령관(magistros) 테오크티스토스(Theoktistos), 학교의 국내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스테판(Stephen), 그리고 총대주교 니케포로스 1세(Nicephorus I of Constantinople)와 같은 고위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스타우라키오스가 너무나 무력했으며, 더 이상 제국의 통치자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811년 10월 2일, 이들은 스타우라키오스를 압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수도원에 들어가게 했다. 같은 날, 미카엘 1세 랑가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황제로 즉위했다. 이로써 니케포로스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발생했던 황위 공백과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4. 미카엘 1세의 통치와 주요 정책
미카엘 1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세 가지 주요 문제에 직면했다 : 종교적 문제, 외교 관계, 그리고 불가리아의 위협.
1) 종교 정책 : 성상 숭배 지지 미카엘 1세는 독실한 성상 숭배 지지자(Iconophile)였으며, 총대주교 니케포로스와 테오도로 스투디테(Theodore the Studite)와 같은 성상 숭배주의자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성상 파괴론자(Iconoclast)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이는 이전 성상 파괴론자 황제들과 대조되는 입장이었다. 이 정책은 성상 숭배론자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제국 내에 존재하는 성상 파괴론자들의 반감을 샀다.
2) 외교 관계 : 프랑크족 황제 샤를마뉴 인정 미카엘 1세는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주장하며 로마 교황의 대관을 받은 프랑크족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와의 관계 정립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812년에 샤를마뉴와 조약을 맺어 샤를마뉴를 ‘프랑크족의 황제’로 인정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의 새로운 질서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로마의 후계자라는 비잔티움인들의 오랜 자존심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였다.
3) 공동 황제 책봉 : 미카엘 1세는 황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11년 크리스마스에 그의 아들 테오필락트(Theophylact)를 공동 황제로 책봉했다. 이는 자신의 왕조를 확립하고 계승을 안정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5. 베르시니키아 전투와 황위 상실
미카엘 1세의 통치는 불가리아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 앞에서 결국 무릎 꿇었다. 불가리아 칸 크룸은 니케포로스 1세를 죽인 이후에도 비잔티움 영토에 대한 침략을 계속했다.
813년 여름, 미카엘 1세는 불가리아군과의 대규모 전투에 직접 나섰다. 베르시니키아(Versinikia)에서 비잔티움군과 불가리아군이 대치했으며, 이 전투는 미카엘 1세에게 결정적인 시험대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군대는 이전에 황제 니케포로스 1세를 잃었던 트라우마와 내부적인 갈등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813년 6월 22일, 베르시니키아 전투(Battle of Versinikia)가 발발했다.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재앙적인 패배로 끝났다. 비잔티움군의 일부 지휘관들은 전투 초기에 전장을 이탈했고, 이로 인해 비잔티움군은 붕괴되었다. 이 패배는 미카엘 1세의 지도력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그의 통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베르시니키아 전투의 패배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수도에서는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미카엘 1세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미카엘 1세는 황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6. 폐위와 은퇴 : 비극을 넘어선 평온
군사적 패배와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한 미카엘 1세는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813년 7월 11일 황위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그는 황제의 지위를 레오 5세(Leo V the Armenian, 775경–820)에게 넘겨주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수도사로 개명하고 니케타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황위 계승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테오필락트, 니케타스 등)은 거세되었다. 거세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황위 계승권 박탈을 상징하는 잔인한 관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엘 1세는 비교적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니케타스는 훗날 니케타스가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 1세(Ignatius I of Constantinople)가 되었다. 미카엘은 844년 1월 11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자녀들보다도 오래 살았다.
7. 역사적 평가 : 비극 속의 안정
미카엘 1세 랑가베의 제위는 짧고 혼란스러웠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니케포로스 1세의 비극적인 전사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권의 안정을 시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상 숭배 정책을 강화하여 종교적 갈등의 불씨를 지폈고, 서방 황제 샤를마뉴를 인정하며 비잔티움의 외교적 지형을 재정립하려 했다.
그러나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여전히 외부의 강력한 위협에 취약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미카엘 1세의 삶은 비잔티움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예측 불가능한 운명에 처할 수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그의 강제적인 퇴위는 니케포로스 왕조의 종말을 알리고 새로운 황제인 레오 5세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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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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