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 AD.750~811) : 동로마 제국 제82대 황제(AD.802~811)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AD.750~811) : 동로마 제국 제82대 황제(AD.802~811)

 

1. 니케포로스 1: 재무 관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서기 8세기 말,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적으로 황실의 불안정성과 재정 문제를 겪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아랍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의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렸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뛰어난 재무 관료에서 시작해 제국의 황위에 오르고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750811)이다. 그는 802년부터 811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하며,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군사적, 재정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전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니케포로스 1세는 비잔티움 역사상 재무 책임자가 황제가 된 이례적인 사례로 기록되며, 그가 세운 니케포로스 왕조(Nikephorian dynasty)는 이후 몇몇 황제들을 배출하며 제국의 역사를 이어갔다.
 

2. 재무 총수에서 제위 찬탈자로 : 니케포로스 1세의 권력 장악

 
니케포로스 1세의 황제 즉위는 상당히 극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전 황제였던 이리니(Irene, 재위 797-802) 여제의 휘하에서 게니코스 로고테테스(Logothetes tou genikou), 즉 재무 총사령관(finance minister)을 역임했다. 그는 종종 로고테테스(Logothete)’ 또는 게니코스(Genikos)’라는 칭호로 불리며 그의 전직을 상징했다. 이레네 여제가 단독 통치를 하던 797년부터 802년까지, 그녀의 재정 운영이 느슨해지면서 궁정 내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서방에서는 새로운 서유럽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가 이레네 여제와 혼인하여 서방 제국과 동방 제국을 통합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리니 여제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비잔티움의 일부 고위 관료들과 군인들에게는 이러한 움직임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학교의 국내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니케타스 트리필리오스(Niketas Triphyllios), 이레네의 친척인 레온 사란타페코스(Leon Sarantapechos) 등 다수의 인물들이 카롤루스 대제와의 결혼 계획을 두려워했으며, 이러한 불안감을 배경으로 니케포로스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음모가 시작되었다 .
 
8021031, 카롤루스 대제의 대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결혼 협상을 벌이는 동안, 음모는 실행되었다. 니케포로스의 공모자들은 경비병들에게 에티오스(Aetios)라는 궁정 신하가 이레네 여제에게 그의 형제 레오에게 제위를 양도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쿠데타 반대자들이 니케포로스를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경비병들은 니케포로스 편에 섰고, 이레네 여제가 머물던 궁전은 포위되었다. 결국 이레네는 황위에서 물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대궁전에 유폐되었다가, 에티오스와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받아 레스보스 섬으로 추방되었다.

니케포로스 1세의 금화
니케포로스 1세의 금화
 
이렇게 니케포로스는 8021031, 하그리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타라시오스(Tarasios of Constantinople)에 의해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닌,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외교적 지형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AD.802년 동로마 제국의 영토
AD.802년 동로마 제국의 영토
 

3. 니케포로스 1세의 통치와 군사적 도전

 
니케포로스 1세는 재무 관료 출신답게 재정 개혁에 힘썼고,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끊임없는 군사적 도전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제국의 동쪽에서는 아랍 제국과, 북쪽에서는 불가리아 제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아랍 제국과의 전쟁은 비잔티움 제국의 오랜 숙명과도 같았다. 니케포로스 1세는 국경을 방어하고 제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수행했지만, 그 결과는 엇갈렸다.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며 제국의 한계를 실감해야 했다.
 
특히 그의 통치 후반기는 불가리아 제국과의 갈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불가리아의 칸 크룸(Krum)은 발칸 반도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이러한 불가리아의 위협에 단호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4. 비극적인 최후 : 플리스카 전투에서의 전사 (811)

 
811, 니케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직접 침공하는 대규모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스카(Pliska)를 향해 진격했다. 초기에는 승리를 거두며 불가리아 수도를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되어 병력을 지나치게 확산시키고 방심한 것이 패착으로 작용했다.
 
불가리아 칸 크룸은 니케포로스 1세의 군대를 기습적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811726, 플리스카 전투(Battle of Pliska)에서 비잔티움군은 불가리아군에게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니케포로스 1세는 전사했으며, 이는 비잔티움 황제가 전장에서 적에게 살해당한 매우 드문 사례로 기록된다. 당시 불가리아 칸 크룸은 니케포로스 1세의 머리를 잘라 은잔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져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더욱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니케포로스 왕조는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803811 공동 황제)와 사위 미카엘 1(Michael I Rangabe, 811813)로 이어지게 된다. 니케포로스 1세는 황제로 즉위하기 전 이레네 여제의 딸인 프로코피아(Prokopia)와 결혼하여 아들 스타우라키오스와 딸 프로코피아를 두었다. 그의 뒤를 이은 스타우라키오스는 병으로 인해 짧은 기간만 통치했으며, 이후 그의 사위인 미카엘 1세가 황위에 올랐다.
 

5. 니케포로스 1세의 유산

 
니케포로스 1세는 비록 전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재위는 비잔티움 제국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그는 군사적 약점과 재정적 문제를 개선하려 노력했고, 게르만족과 아랍 세력 사이에서 흔들리던 제국의 정체성을 다시 로마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재무 관료 출신으로서 그는 제국의 재정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니케포로스 1세의 등장은 이전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 이후 새로운 니케포로스 왕조를 개창하며 제국의 역사를 이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그의 통치가 짧고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제국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혼기에 황제들이 직면해야 했던 엄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국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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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니케포로스 1세의 금화 :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802년 동로마 제국의 영토 :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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