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04~100] 제2차 노예 전쟁 : 시칠리아를 뒤흔든 자유를 향한 불꽃
제2차 노예 전쟁은 기원전 104년부터 100년까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의 중요한 곡창지대이자 노예 노동의 중심지였던 시칠리아(Sicily)섬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예 봉기이다. 이는 약 30년 전에 발생했던 제1차 노예 전쟁(First Servile War, 기원전 135-132년)에 이어 시칠리아를 다시 한번 피로 물들인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다. 세 차례의 주요 노예 전쟁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봉기는 로마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이 심화되던 공화정 말기에 로마의 통치 시스템에 또 다른 균열을 드러내며, 노예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1. 전쟁의 배경 : 마리우스의 징집과 시칠리아의 불만
제2차 노예 전쟁은 카르타고(Carthage)의 멸망 이후, 서부 지중해의 유일한 패권자로 군림하던 로마가 새로운 내부 위협에 직면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로마 공화국은 북쪽에서 게르만족인 킴브리족(Cimbri)과 테우토네스족(Teutones)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다. 당시 집정관(consul)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년-기원전 86년)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을 징집하고 있었고, 특히 로마의 동맹국들에게도 병력 제공을 요청했다.
이러한 징집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비티니아(Bithynia)의 왕 니코메데스 3세(Nicomedes III of Bithynia, 생몰년 미상)는 자신의 백성들이 로마의 세금 징수관들에게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나가면서 병력 징집이 어렵다고 불평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조치 명령을 내렸다. 로마의 동맹국 출신 노예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으며, 그러한 노예들은 즉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로원의 명령은 시칠리아에 파견된 프라이토르(propraetor)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 생몰년 미상)에게 전달되었다.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는 명령에 따라 즉시 시칠리아에서 약 800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800명의 해방된 노예들은 시칠리아의 다른 국적 노예들, 특히 그리스계 노예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왜 자신들은 해방되지 않는지 의문을 가졌다. 동시에 시칠리아의 대규모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값싼 노동력이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결국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는 이러한 압력과 혼란 속에서 노예 해방 조치를 철회했다. 이 철회 결정은 이미 자유를 기대했던 노예들, 그리고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노예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예 봉기는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2. 살비우스 트리폰의 봉기 : 헤라클레아에서 왕국으로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의 모호한 대응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는 일부 노예들에게 거짓 약속을 하여 다시 노예 상태로 돌려보내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 헤라클레아 미노아(Heraclea Minoa) 근처에서 심각한 노예 봉기가 터져 나왔다.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600명의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 병력은 노예군에게 패배하여 전멸했다.
이 승리는 노예들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막대한 무기와 함께 새로운 지도자를 얻게 되었다. 바로 살비우스(Salvius, 생몰년 미상)라는 노예였다. 그는 제1차 노예 전쟁의 지도자 에우누스(Eunus)를 본보기로 삼아, 자신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로 선포하고 '트리폰(Trypho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으로 불렸다.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은 승리 후 모르간티나(Morgantina)를 포위했다. 네르바(Publius Licinius Nerva)는 시칠리아 민병대를 이끌고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에 맞섰지만 또 다시 패배했다. 결국 노예들은 모르간티나(Morgantina) 시를 함락시켰다. 모르간티나 전투 이후,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의 노예군은 기병 2,000명과 보병 20,000명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불어났다.
한편, 시칠리아 서부에서는 또 다른 봉기가 발생했다. 킬리키아 출신의 노예 아테니온(Athenion, 기원전 102년 전사)이 주도하는 봉기였다. 그는 모르간티나(Morgantina)에서의 승전 소식을 듣고 자신의 노예군을 이끌고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전역에서 노예 반란 세력이 결집되었고, 로마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3. 루쿨루스의 개입과 전술적 승리
기원전 103년,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의 노예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프라이토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 기원전 104년 프라이토르)를 파견했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는 이전에 캄파니아에서 발생했던 베티아누스 노예 봉기(Vettian Slave Revolt)를 진압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17,000명의 로마군과 동맹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서부에 상륙하여 반란군의 요새인 트리오칼라(Triocala)로 진격했다 .
스키르타이아 전투(Battle of Scirthaea) :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은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의 도착 소식을 듣고 트리오칼라(Triocala) 내부에서 농성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장군 아테니온(Athenion)은 공개적인 전투를 통해 로마군을 맞서 싸우자고 설득했다 . 반란군은 로마군 진영에서 12마일 떨어진 스키르타이아(Scirthaea)에 진을 쳤고, 다음 날 양측은 전투를 위해 대치했다. 디오도로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에 따르면, 트리폰(Salvius Tryphon)의 병력은 약 40,000명에 달했다 .
격렬한 접전 끝에 주 전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반란군이 로마군을 밀어붙이는 듯했다. 아테니온(Athenion)과 그의 기병대는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의 측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노예군이 승리를 거두기 직전, 아테니온(Athenion)이 부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는 죽은 척하여 자신을 살렸다. 장군이 죽었다고 믿은 노예들은 사기를 잃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살비우스 트리폰(Salvius Tryphon)은 그의 군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트리오칼라(Triocala)로 도망쳤다. 그날 밤, 부상을 입은 아테니온(Athenion)은 어둠을 틈타 전장을 탈출했다. 수천 명의 노예가 학살되었고, 디오도로스(Diodorus Siculus)는 날이 저물 무렵 약 20,000명의 반란군, 즉 트리폰(Salvius Tryphon) 군대의 절반가량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
트리오칼라 공성전과 루쿨루스의 악의적인 행동 : 스키르타이아 전투 이후,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는 로마의 통치권을 회복하며 천천히 트리오칼라(Triocala)로 진군했다. 트리오칼라(Triocala)에 진을 친 반란군에 맞서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는 공성전을 시작하며 그의 지휘권이 연장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신이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는 악의적인 행동을 취했다. 그는 공성 장비와 진영, 보급품을 불태우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 철수했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는 그의 후임자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Gaius Servilius)의 임무를 더 어렵게 만들 의도로 이러한 행동을 했다. 이는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4. 봉기의 종결 : 아테니온과 아퀼리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가 그의 지휘권을 방해하면서, 노예 봉기는 다시금 활력을 얻었다.
아테니온(Athenion)의 재기 : 기원전 102년, 살비우스(Salvius)의 죽음 이후 노예 왕으로 계승한 아테니온(Athenion)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Gaius Servilius)의 진영을 기습하여 로마군을 격파하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는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의 이전 성공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었다 . 로마의 노예 봉기 진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의 최종 진압 : 마침내 기원전 101년, 로마는 집정관 마니우스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 기원전 101년 집정관)에게 시칠리아 봉기 진압을 맡겼다. 고위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자신의 갈리아군 중 일부를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에게 주었고,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는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군대를 징집, 무장, 훈련시켰다 . 시칠리아에 도착한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는 아테니온(Athenion)의 노예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전승에 따르면 아퀼리우스(Manius Aquillius)는 아테니온(Athenion)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고 한다 .
반란은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1,000명의 노예들은 로마에서 시민들의 오락을 위해 야수와 싸우도록 보내졌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인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서로를 칼로 조용히 죽였고, 마지막 한 명은 자신의 칼에 몸을 던져 자살하며 로마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보여주었다.
5. 전쟁의 의미와 영향
제2차 노예 전쟁은 제1차 노예 전쟁처럼 로마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이는 시칠리아에서의 노예 봉기 중 두 번째였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봉기로 이어지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노예 문제 심각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 반복되는 노예 제도의 문제 : 제1차 노예 전쟁 이후에도 로마는 노예 착취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노예들이 농장과 광산에 투입되면서 인구 불균형이 심화되었고, 이는 또 다른 봉기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노예 봉기는 로마의 사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문제였다.
- 로마의 군사적 한계 노출 :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의 악의적인 행동과 같은 로마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정치적 갈등은 전쟁을 불필요하게 장기화시켰다. 이는 공화정 말기 로마 정치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 내부 갈등 심화 : 노예 해방 조치와 그 철회는 노예들과 주인들 모두에게 불만을 안겼다. 이는 로마 사회 내부에 깊은 균열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시민권 확대를 둘러싼 사회 전쟁(Social War)과 같은 더 큰 갈등의 서막이 되었다.
- 로마의 강력한 응징 : 노예 봉기 진압 방식은 로마의 지배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에게도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로마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십자가형을 포함한 잔혹한 처벌을 통해 재발 방지를 위한 본보기가 되었다.
제2차 노예 전쟁은 로마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이 얼마나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로마는 노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군사력을 통한 진압을 선택했고, 이는 공화정 말기 로마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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