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상(商) 왕조 : 기원전 약 1600~1046년
상(商, 약 기원전 1600년~약 기원전 1046년) 왕조는 중국 황하(黃河) 유역을 지배했던 고대 왕조로, 전통적으로 하(夏) 왕조의 뒤를 이어 서주(西周) 왕조에 의해 교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상 왕조는 중국 역사상 확고한 고고학적 증거로 뒷받침되는 최초의 왕조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시기 중국 문명은 청동기 기술, 문자, 그리고 복잡한 종교 체계를 발전시키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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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상 왕조 영역 |
1. 기록과 고증, 상 왕조의 두 이름
상 왕조에 대한 고전적인 기록은 상서(尙書), 죽서기년(竹書紀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경~기원전 86년경)의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록들은 상 왕조의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등 다방면의 정보를 제공하여, 초기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
역사적으로 상 왕조는 '은(殷)'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사기와 죽서기년은 이 이름을 왕조 자체와 그 마지막 수도를 지칭할 때 모두 사용했다. 특히 서기 3세기 황보밀(皇甫謐, 215년~282년)의 제왕세기(帝王世紀) 이후 '은'이라는 명칭은 상 왕조의 후반부를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이 이름은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각각 '은(殷)', '인', '언'으로 불리며 사용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상 왕조 시대에 쓰인 갑골문(甲骨文)에는 '은'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고 '상(商)' 또는 '대읍상(大邑商)'으로 국가를 지칭하고 있다. '은'이라는 이름은 상 왕조를 계승한 주(周) 왕조 시대에 와서야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 상 왕조의 시작 : 신화와 역사 속 탕(湯) 왕
상 왕조의 건국 신화는 은본기(殷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제곡(帝嚳)의 둘째 부인인 간적(簡狄)이 검은 새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기적적으로 설(契)을 낳았다. 설은 우(禹)의 홍수 조절 사업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상'이라는 봉읍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 상에 봉해진 후예들이 나중에 상 왕조를 건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상 왕조가 건국되기 전의 시기를 '선상 시대' 또는 '원상 시대'라고 부른다.
설의 13대손인 탕(湯, ?~?)은 폭정으로 얼룩진 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걸(桀)을 명조(鳴條) 전투에서 물리치고 상 왕조를 건국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사기는 탕, 태갑(太甲), 태무(太戊), 반경(盤庚), 무정(武丁), 무을(武乙), 그리고 마지막 군주인 주(紂) 등 상 왕조의 주요 군주들의 치세를 상세히 묘사한다. 그러나 그 외의 군주들은 이름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 중국의 학자 왕국유(王國維, 1877년~1927년)는 사기에 기록된 상 왕조 군주의 계승 순서가 실제와 일치함을 밝혀내기도 했다. 상 왕조는 수도를 다섯 번 옮겼다고 전해지는데, 반경 시대에 은(殷)으로 천도한 것이 왕조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3. 상 왕조 역대 군주
4. 고고학적 대발견 : 은허(殷墟)와 갑골문
상 왕조의 존재를 명확하게 증명하고 그 문명을 구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고고학적 발견 덕분이다. 특히 현대 안양(安陽) 근처에 위치한 은허(殷墟) 유적지는 상 왕조의 마지막 수도 '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은허 발굴을 통해 11개의 주요 왕릉, 궁전 건물 기초, 그리고 국가 제의에 사용된 동물과 사람의 희생(犧牲)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되었다.
은허에서는 수만 점에 달하는 청동기, 옥기, 석기, 골기, 도자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바로 갑골문이다. 갑골문은 주로 거북의 등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牛骨)에 새겨진 점술 기록으로, 중국에서 알려진 가장 초기의 문자 형태를 보여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기 과학적 발굴에서 2만 점이 넘는 갑골문이 발견되었고, 이후에도 4배 이상 더 많은 갑골문이 세상에 나왔다. 이 갑골문은 상 왕조의 정치, 경제, 종교 관습, 예술, 의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며 초기 중국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갑골문 연구를 통해 상 왕조가 단순히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강력한 국가였음이 입증되었고, 이전까지 전설로만 여겨지던 많은 내용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외에도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와 쓰촨성(四川省) 삼성퇴(三星堆) 등지에서도 상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한 유적들이 발견되어 상 왕조의 문화적 영향력이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5. 상 왕조의 멸망과 유산
상 왕조는 주(紂)왕의 폭정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는 상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극심한 사치와 잔인한 통치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서방의 주(周) 부족의 지도자 무왕(武王, ?~기원전 1043년)이 병력을 일으켜 목야(牧野) 전투에서 상군을 대파하고 상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중국 역사에는 서주 왕조가 새롭게 들어서게 된다.
상 왕조는 비록 멸망했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후대 중국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 왕조는 체계적인 국가 통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뛰어난 청동기 기술을 통해 당대 최고의 예술품과 의례용 도구를 제작했다. 특히 갑골문으로 대표되는 문자의 발명과 발전은 중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 왕조의 역사와 유물은 중국 고대사의 공백을 메우고,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중국 문명의 토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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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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